[지역] 전국 최대 직거래장터, 원주 농업인 새벽시장

원주시 판부면 신촌리에 사는 김옥란(80) 할머니는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4시에 집을 나섰다. 산두릅과 곰취, 껍질 벗긴 감자와 시래기나물 등을 한 짐 가득 싸서 할머니가 향한 곳은 원주천 둔치 ‘농업인 새벽시장’이다. 어제 갓 딴 봄나물들이 좌판 위에 가지런히 놓여 푸르른 생기를 머금은 채 이른 손님들을 기다린다.

“여기 처음 문 열고나서 계속 나왔지. 20년 다 됐지, 아마. 영감이랑 코딱지만하게 농사짓는 거랑, 집 앞 텃밭에서 기르는 놈들 들고 나오는 거야. 봄철에는 동네 뒷산에서 나물도 좀 캐오고. 가끔 5일장에도 가지고 나가는데 여기가 장사는 훨씬 잘 돼.”

▲ 이른 손님을 맞기 위해 새벽 일찍 전을 편 김옥란 할머니. ⓒ 엄지원

입하(立夏)가 하루 지난 6일 새벽 5시. 절기상 여름의 문턱을 넘었다고는 하지만 원주천 둔치는 쌀쌀한 기운이 감돌고, 사방은 여전히 푸르스름한 어둠에 싸여있다. 그러나 원주교와 봉평교 사이 6,250㎡ 가량의 길거리에 마련된 직거래장터에는 원주 각지에서 모인 칠팔십명 농민들이 자리를 잡고 손님맞이에 한창이다.

▲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5시 무렵 시장 풍경. ⓒ 엄지원

소비자들이 농민 얼굴 아니 원산지 걱정 없어

원주가 로컬푸드 운동의 ‘성공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농산물 공급의 단계를 줄여 농민에게는 정당한 몫을, 소비자에게는 안전한 지역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로컬푸드 운동이 주목한 것은 원주 ‘농업인 새벽시장’이다.

1994년부터 시작된 원주 새벽시장은 농민들이 새벽 4시부터 오전 9시까지 직접 생산한 농산물을 싼 가격에 판매한다. 판매는 원주 25개 면•동의 ‘새벽시장 농업인협의회’ 소속 농민들만 가능하며, 현재 430여명이 가입해 있다. 1년중 본격적으로 농산물 출하가 시작되는 4월말 개장해 김장이 끝나는 12월 중순경까지 운영하는데 연 24만명이나 되는 시민이 찾는다고 한다.

농업인협의회는 장터에서 판매되는 모든 농산품에 생산자와 원산지 표시를 의무화하고 있다. 불량 농산물은 ‘즉시 리콜제’ 등을 통해 소비자들이 믿고 살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제도적 장치보다 소비자에게 상품에 대한 신뢰를 주는 것은 시장에서 직접 만나는 생산자의 ‘얼굴’이다. 10년이 넘게 직거래장터에서 판매하고 있는 농업인 심금순(52)씨는 소비자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 원주 새벽시장에서는 의무적으로 모든 상품에 원산지 표시를 해야 한다. ⓒ 엄지원

“매일 나와서 장사를 하다 보니 손님들이 제 얼굴을 알아봐요. 오래된 단골손님도 많고요. 제가 어디서 얼마만큼 농사짓는지 다 아니깐 손님들도 진짜 여기 거냐고 물어보고 그럴 필요가 없어요. 제 얼굴보고 사가는 거죠. 물론 그만큼 책임감도 느껴요.”

새벽시장에 토박이 농민들이 많다 보니 정환국(42)씨 같은 ‘신입’ 판매 농민들은 소비자들에게 ‘얼굴’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미나리를 재배해서 가져오는데 낯선 얼굴이라 그런지, 손님들이 제 물건에 대해 의심하시기도 하더라구요. 그래도 계속 나오면서 얼굴도 익히고, 제가 키운 농산물도 열심히 홍보하면서 손님들하고 안면을 터야죠.”

▲ 직접 수확한 농산물을 판매하고 있는 농민들. ⓒ 엄지원

농민들 노력만큼 소비자들 만족은 컸다. 주말마다 아내와 함께 새벽시장을 찾는다는 최동수(41)씨는 새벽시장에 오고 나서부터 원산지 걱정을 하지 않게 됐다.

“일반 시장이나 마트에도 원산지 표시가 있지만, 왠지 믿음이 안 갔거든요. 뭔가 찝찝하고. 근데 새벽시장에서는 직접 키운 농민들이 와서 팔기 때문에 그런 걱정 안 하게 됐어요. 공산품은 몰라도 채소나 다른 농산물들은 꼭 여기서 사게 돼요.”

밭뙈기 아닌 소규모 수확으로 신선함 유지

새벽시장에는 삼사십대 주부들은 물론 오륙십대 지긋한 나이 손님들도 많았다. 새벽 4시~6시 개장 직후에는 오히려 나이 든 손님들로 북적였다. 어머니 최순복(72)씨를 모시고 나온 이성협(45)씨는 두 손 가득 야채 봉지를 들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워낙 좋아하셔서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모시고 나옵니다. 새벽 일찍 선선할 때 나와 집에서 먹을 것들을 사 가는데요. 어머니 손잡고 이리저리 둘러 보다 보면 어린 시절 생각도 나고, 종류도 여러 가지라 구경하는 재미도 있어요.”

무엇보다 소비자들이 만족하는 것은 직거래장터만의 ‘신선함’이다. 주부 박영미(53)씨가 10년 넘게 새벽시장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트에서 산 채소는 잘못하면 하루만 놔둬도 상하기 쉬운데 여기서 산 건 그런 게 없어요. 판매하기 직전에 수확해서 그런가, 며칠이 지나도 싱싱해요. 또 마트에서는 히터도 틀고 에어컨도 트는데 그런 게 채소에는 좋을 리가 없죠. 훨씬 싸고 싱싱한데, 마트에 왜 가요?”

▲ 소비자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다. ⓒ 엄지원

새벽시장에서 판매되는 농산물은 대개 그날 모두 판매된다. 농민들은 당일 필요한 만큼만 전날 수확해서 가져오니 신선함을 유지하기 쉽다. 일명 밭뙈기로 불리는 농산물 선매에서 나오는 가격 불균형 피해도 피할 수 있다. 농민과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직거래방식의 판매구조는 농산물 가격을 유통업자가 아닌 농민과 소비자가 결정할 수 있게 했다.

농민•소비자가 나눠 갖는 중간상인 이익

직거래 판매구조는 농산물 매출과 농민 소득의 증가를 낳았다. 새벽시장의 연간 총매출은 2010년 80억원, 2011년 82억원을 넘었고, 올해는 86억원 매출을 목표로 삼을 만큼 농업인들의 소득 증가에 크게 기여한다. 

농림수산식품부도 2011년 원주 새벽시장을 지역 우수사례로 선정했다. 원주 새벽시장을 모델로 전국에 새벽시장 개설을 검토하게 되면서, 시장 개설과 로컬푸드 추진 등 벤치마킹을 위해 전국 지자체에서 견학이 잇따르고 있다.

새벽 5시에 나와서 장사를 준비했다는 이이철(73)씨는 8시도 안 돼 가지고 나온 시금치를 다 팔았다. 새벽시장은 오전 9시까지 운영되는데 몇몇 농민들은 그 이전에 판매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오늘은 한 7만원어치 팔았나, 하루 평균 10만원 안팎으로 팔아요. 우리같이 농사 크게 안 짓는 사람들은 밭뙈기보다 직거래가 훨 낫죠. 매일 나와서 팔아야 하니깐 수고는 더해도 값은 더 받으니깐. 여기처럼 판로만 잘 뚫려 있으면 농민들 파는 데 고생 안 하죠.”

▲ 알타리무를 판매하는 농민 김달봉씨. ⓒ 엄지원

알타리무를 재배해 판매하는 김달봉(61)씨도 새벽시장에 나온 이후 벌이가 훨씬 나아졌다고 한다.

“직거래니깐 벌이도 훨씬 낫죠. 농판장(농산물판매장)에서 파는 가격보다 더 많이 받을 수도 있고요. 오늘 갖고 온 알타리도 한 단에 2,000원씩 파는데, 농판장가면 1,000원 정도? 그보다 못 받을 수도 있거든요. 도매상인들도 나한테 2,000원씩 떼 가니깐 못해도 2,500원, 2,800원에 팔 거예요. 그러니까 소비자들도 직거래장터에서 사는 게 훨씬 낫죠.”

김 씨 말대로 새벽시장은 농민뿐 아니라 소비자에게도 이익이다. 고추와 파프리카 모종을 사러 왔다는 김경자(55)씨는 “일반 가게에서 사면 모종 하나에 500원씩인데 여기에선 10개를 천원에 샀다”며 “새벽시장에서 사는 게 확실히 저렴해 깎아 달라고 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010년 배추 파동으로 배추 한 포기가 1만원 넘게 팔리던 때에도 새벽시장에서 팔리던 배추의 가격은 포기당 삼사천원이었다. 중간 유통단계가 없기 때문에 가격 거품이 거의 없다.

지역경제 살리는 ‘착한 소비’

작년 말, 원주에 또 하나 거대 기업형 마트가 문을 열었다. ‘지역물가 안정을 도모하며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는 지역 친화적인 매장’을 표방하며 문을 연 매장엔 매일 손님들이 북적인다. 이미 들어와있는 기업형 마트들과 골목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소규모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영향력으로 원주의 전통시장도 계속해서 위축되고 있는 형편이다. 판매처가 도매업자에게 종속되면 그만큼 농민의 권리를 지켜내기 어렵다. 오늘 처음으로 새벽시장을 방문했다는 이민우(41)씨는 농민들의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새벽시장이 더욱 활성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여기 나와서 장사하시는 분들이 다들 나이가 많고 벌이가 쉽지 않은 분들인데, 요즘 원주도 대형 마트가 들어서면서 농민들 설 자리가 더 줄어들고 있잖아요. 이런 직거래 시장이 농민들을 도울 수 있는 적합한 사례라고 생각해요. 이분들이 직접 생산한 걸 지역에서 소비하면 이거야말로 진짜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하고요.”

이날 새벽시장에서 만난 안지선(32)씨는 서울 사당에 살고 있지만, 시댁이 있는 원주에 올 때마다 새벽시장에 들른다고 전했다.

“오늘은 아는 분이 산나물을 좀 구해 달라고 해서 일부러 찾아왔어요. 서울에서도 살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산지에서 농민들 얼굴 보고 사는 기회는 흔치 않잖아요. 소비자는 싸서 좋고, 농민들도 여러모로 좋다고 하니 다른 지역에서 많이 생겼으면 좋겠네요.”

▲ 날이 밝은 뒤에도 장꾼들이 늘어서 있다. ⓒ 엄지원

‘원주푸드’와 연계해 인증시장으로 발전

새벽시장이라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원주 새벽시장 농업인협의회 신순근(55) 사무장은 “새벽시장 주변으로 허가받지 않은 타지 상인들이 천막을 펼치고 장사를 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일부 소비자들은 허가받지 않는 상인들 것도 지역 농산물로 알고 구매하기도 한다. 신 사무장은 “앞으로 구획을 더 명확히 그어서 소비자들이 인증된 먹거리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게 할 예정”이라 말했다.

원주시는 지역에서 생산된 먹을거리에 인증표시를 해주는 ‘원주푸드’사업과 연계해 새벽시장을 2014년까지 원주푸드 인증시장으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다. 농업인협의회 이성섭(45) 회장은 원주가 로컬푸드 운동의 전국적인 역할 모델로 인정받길 바란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94년 처음 시장이 만들어질 때는 지역의 갈 곳 없는 소농들이 무허가로 판매하는 형태였지만, 지금은 시청 지원도 받고 시민들 사랑도 받는 시장으로 성장했습니다. 앞으로 바라는 것은 농민이 땀 흘려 일한 대가를 충분히 받을 수 있고, 소비자에게는 질 좋은 먹거리를 제공하는 로컬푸드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겁니다. 쉽지 않지만, 가야 될 길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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