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늘어도 식당 드물고 회식에서 선택권 무시
한국인 남성 대장암 발병률, 아시아 1위. 햄 반찬에 고기 육수를 사용한 찌개, 고기가 단골 메뉴인 회식까지. 스테이크를 먹는 외국 식단보다도 직•간접 고기섭취량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도 건강을 위해, 그리고 동물을 위해 채식을 하자는 운동이 잔잔히 번지고 있다.

채식전문식당과 채식동호회가 생겨나고, 연예인이 채식선언을 하는가 하면 채식급식도 탄생할 정도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 채식인구는 전체의 1~2% 정도. 그러나 채식을 하기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이 우리나라다.
채식은 어떤 음식을 거부하느냐에 따라 몇 단계로 나뉜다. 붉은 살코기를 먹지 않는 폴로, 닭고기를 포함한 육류는 먹지 않고 생선 등 해산물까지 먹는 페스코, 모든 육류와 해산물은 먹지 않지만 달걀과 우유를 먹는 락토-오보, 락토-오보에서 달걀을 거부하면 락토, 그리고 모든 육류와 달걀, 우유까지 먹지 않는 비건으로 분류된다.
채식인은 보통 집에서 식단을 구성해 먹거나 도시락을 가지고 다닌다. 대부분 음식점에서 고기를 이용한 메뉴를 판매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음식에 육수나 젓갈, 다시다 등 눈에는 보이지 않는 육류 첨가물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집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할 수 있는 채식인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기숙사에 살고 있는 학생이나 회식이 잦은 직장인은 식단과 메뉴에 사실상 선택권이 없다. 그러기에 대부분 채식을 포기하거나 가끔 고기를 먹는 ‘채식지향자’ 수준에 머물게 된다.
‘보이지 않는 고기’와도 싸워야 하는 기숙사생
채식하기 가장 힘든 곳은 기숙사다. 식단을 선택할 수 없고 일률적으로 기숙사비와 식비를 함께 걷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메뉴에 순응해야 한다. 학교 기숙사에서 살고 있는 고등학생 이승현(17) 양은 환경과 동물 복지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채식을 3년째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침, 점심, 저녁 시간이 정해져 있고 영양사가 짠 식단에 맞춰 나오는 급식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영양사에게 채식인임을 밝혀도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 먹으라’는 말뿐이다. 심지어 채식에 대해 전혀 모르는 분들도 있다.


다시다나 다진 고기가 들어간 음식은 피하기 힘들다. 많은 학생식당이 음식 맛을 내기 위해 다시다를 이용한다. 하지만 다시다의 주 성분은 가루로 만든 고기다. 충북의 한 대학 기숙사 식당 직원은 “국뿐만 아니라 일반 반찬에도 소량의 다시다를 넣어 맛을 낸다”고 밝혔다. 김치나 채소볶음 같은 대표적인 채식 메뉴에도 보이지 않는 고기가 들어있을 수 있다. 채식동호회 인터넷 카페 ‘한울벗’에 남긴 글에서 아이디 ‘vegemaru’는 이런 점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채식은 단순히 '야채만 골라먹는 편식'이 아님을 이해 못하는 게 가장 힘듭니다. 대부분 채식인들은 유전자변형농산물(GMO)과 ‘5백(白)식품’으로 불리는 화학조미료, 정제소금, 정제설탕, 밀가루, 흰쌀밥 등을 피하는데, 고기는 눈에 보이는 것이니 골라내고 먹는다 해도 우리나라 식당에서 5백식품이나 계란, 우유 등은 들어가도 눈으로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고, 이에 대한 안내도 잘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채식인은 신념이 깨지더라도 묻지 않고 먹거나, 일일이 눈치보면서 물어봐야 하니 아예 밖에서 잘 안 먹게 돼요. 우리가 먹는 음식에 무엇이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먹을 수밖에 없다는 걸 피부로 절실히 느낍니다.”
잦은 회식에 끊었던 고기도 다시 먹게 된 직장인
주위 눈치도 채식을 하는 큰 방해요소다. 기자인 허 아무개(28•여)씨는 아토피를 고치기 위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교 1학년 때까지 7년간 채식 생활을 했다. 고기와 해산물, 우유, 달걀까지 먹지 않는 비건 채식을 했지만 인턴으로 직장에 다니고 나서 채식을 포기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같은 반 친구들이 제가 아토피 때문에 채식하는 것을 알고 한 번 물어보면 적어도 같이 지내는 1년은 묻지 않았는데 사회 생활은 다르더라고요. 건강 이유도 대보고, 그냥 싫어한다고 둘러대기도 해보고, 환경 같은 거시적인 이유도 대보고 여러 가지 이유를 대보다가 그냥 포기했어요. 이것은 근본적으로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 탓도 크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은 남들도 당연히 먹는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채식주의자=보통과 다른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이 싫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지금까지 한 번 포기한 채식 생활로 돌아갈 수 없었다. 회식을 하면 꼭 한 번은 고기 메뉴를 먹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직업 특성상 사람을 많이 만나고 다니다 보면 메뉴 선택권이 제한되거나 아예 없을 때가 많다. 소신껏 채식 생활을 하고 싶어도 주위에서 핀잔이 날아오기 일쑤다.
허씨는 교환학생으로 1년간 머물렀던 독일을 ‘채식의 천국’이라 불렀다. 학생의 3분의 1가량이 채식주의자고 학생식당에는 채식 메뉴가 항상 준비돼 있었다. 허씨는 채소와 과일 고유의 맛과 향을 음미하던 채식 시절이 그립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동물이 고기 취급을 받으며 좁디 좁은 우리에서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커가는 데 대한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고기가 나와도 작정하고 먹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채소 반찬을 더 많이 먹는 소극적인 채식을 하고 있다.
“소수 의견 무시하는 한국사회의 폭력”
대학생인 류지헌(22)씨는 체중 감량과 건강한 몸을 위해 채식을 시작했다가 동물 사육의 윤리적 문제까지 고민하게 됐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을 느끼고, 전보다 더 영양 섭취의 밸런스를 생각하면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밖에도 소화기능이 좋아졌고, 아토피 같은 피부병도 사라지는 등 채식의 이점은 무궁무진하다고 설명할 정도로 채식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불편은 역시 외식생활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교환학생으로 1년간 머문 캐나다는 거의 모든 식당이 최소한 락토-오보 메뉴를 가지고 있고 비건 메뉴를 제공하는 식당도 많아 어디서든 채식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견과류 알레르기 학생을 위해 견과류를 제거한 ‘넛 프리’ 메뉴도 있었고, 밀가루 음식 등에 반응하는 글루텐 알레르기 학생을 위해 만든 ‘글루텐 프리’ 메뉴 등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채식식당을 찾는 것보다 아예 외식을 하지 않는 게 더 편할 정도로 채식 가능 식당이 너무 적어 불편합니다.”
채식의 이로운 점을 직접 느껴본 지헌씨는 채식을 포기하는 대신 외식을 끊었다. 현재 휴학 상태이기 때문에 집에서 음식을 해먹을 수 있지만 복학 후 학교생활이 걱정이다. 서울에는 채식 식당이 100여 곳 있지만, 일부 메뉴만 채식 메뉴로 제공하는 곳이 대다수다. 채식전문 체인점인 ‘러빙헛’과 사찰음식점을 포함해 비건 식당은 16곳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유동인구가 많은 대학가나 인사동에 몰려있다. 한때 채식 열풍과 함께 채식전문식당이 곳곳에 문을 열었지만 유동인구가 적은 곳은 경영난으로 대부분 폐업했다.
대부분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고 사는 시대에 이런저런 제약과 주위의 시선 때문에 자신이 선택한 채식 생활도 맘껏 누리지 못하는 건 ‘아이러니’다. 류지헌씨 같은 채식주의자들에게는 이런 현실이 안타깝다. 그는 “개인의 특성을 무시하고 다수의 의견에 따르라는 한국 사회의 태도는 폭력적”이라며 “소수집단을 존중하는 태도가 확산되고 있듯이 채식주의자들도 그런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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