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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박사’ 메르켈의 탈원전 리더십
[제정임 칼럼]
2021년 11월 23일 (화) 12:21:02 제정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jaesay@gmail.com
   
▲ 제정임 원장

독일의 10대 중에는 ‘남자도 총리를 할 수 있나요?’라고 묻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농담 같지만,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무려 16년을 집권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새 내각이 구성되면 물러날 메르켈 총리는 남성 중심적인 독일 정치를 바꾼 여성이라는 점 외에 통일 전 동독 출신이며 물리학자라는 독특한 배경도 갖고 있다. 

케이티 마튼이 쓴 전기 <총리>(The Chancellor: 국내에선 ‘메르켈 리더십’으로 번역 출간)에 따르면 갓난아기 때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서독 함부르크에서 동독 템플린으로 이주한 그는 정보기관 슈타지가 활개 치는 감시 사회에 질려 가치중립적인 과학을 선택했다. 그는 물리학 박사로서 연구원 생활을 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정당인이 됐다. 그리고 통일 독일의 지도자 헬무트 콜에게 발탁돼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각료 생활을 시작했다.

2005년 총리가 된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 유럽 재정위기, 난민 위기 등을 수습했고, ‘유럽의 병자’였던 독일 경제를 ‘유럽의 엔진’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비결은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를 작은 조각들로 분해한 후 하나씩 해법을 찾는’ 과학자의 접근법이었다. ‘신중히 결정하고, 흔들림 없이 추진하는’ 리더십이 극적으로 발휘된 순간의 하나가 2011년 6월 ‘탈원전 선언’이다.

“핵에너지에 내재된 위험은 완벽히 통제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실수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합니다. 실수가 생긴다면, 그 피해는 너무나 치명적이고 영구적입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핵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2022년 원전 완전 퇴출’을 명시한 법안을 의회에 내면서 메르켈 총리는 이렇게 연설했다. 바로 전해인 2010년, 보수연정 지도자로서 이전 진보정부가 수립한 탈원전 정책에 제동을 걸고 원전 수명을 연장했던 그였기에 놀라운 전환이었다. 마튼에 따르면 메르켈은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고 방사성 물질이 퍼져 나가자 ‘아이패드 속 뉴스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심했다. 그는 노후 원전 8기의 가동을 즉각 중단한 데 이어 ‘안전한 에너지공급을 위한 윤리위원회’를 소집했다. <위험사회>의 울리히 벡을 포함한 학자와 성직자, 경제인 등 17명으로 구성된 윤리위원회는 8주 동안 100번이 넘는 회의와 11시간 TV 생방송 토론을 했다. 대책 없는 핵폐기물 문제까지 감안, ‘원전은 안전할 때 폐쇄해야 한다’는 결론을 메르켈은 즉각 수용했다.

   
▲ 2011년, 메르켈 총리는 2022년까지 독일 내 원전을 단계적으로 모두 폐쇄하겠다고 말했다. ⓒ <KBS>

탈원전 계획은 흔들림 없이 추진됐다. 2010년 전기생산량의 22%였던 원전 비중은 2020년 11%로 줄었다. 독일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2038년 석탄발전소 퇴출’도 추진 중인데, 석탄·갈탄의 발전 비중 역시 같은 기간 41%에서 23%로 떨어졌다. 원전과 석탄의 공백은 이 기간에 17%에서 44%로 늘어난 재생에너지가 메웠다. 놀라운 일은 이런 탈원전·탈석탄을 추진하면서도 독일 경제가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 일간지 <한델스블라트>에 따르면 메르켈 집권 16년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이탈리아는 8.6% 줄었고 프랑스는 6% 증가에 그쳤지만, 독일은 18.3%나 늘었다.

그런데도 국내 찬핵 전문가들과 일부 언론은 ‘탈원전 때문에 독일 경제가 엉망이 됐다’ ‘원전을 줄이느라 석탄을 더 태우고 있다’는 등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 재생에너지 보조금 때문에 독일인들이 비싼 전기료를 문다고 강조하면서, 많은 독일 가구가 태양광·풍력 전기로 돈을 번다는 사실은 감춘다. 이런 보도 속에 탈원전 반대 여론은 커지고, “후쿠시마에서 방사능 유출이 없었다”고 한 대선 후보는 당당히 ‘원전 재추진’을 외친다.

우리나라는 좁은 땅에 세계에서 가장 빽빽하게 원전이 들어서 있다. 주요 원전 30㎞ 내에 수백만명이 산다. 대형 사고가 터지면 그냥 ‘끝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리학 박사 메르켈은 모든 정보를 종합한 뒤 “핵에너지에 내재된 위험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국내 원전의 불량 부품, 부실 공사 등의 전력은 그 ‘위험’이 매우 가까울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독일은 탈원전·탈석탄과 경제적 번영이 함께 갈 수 있음을 보여줬다. 우리가 따라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원전의 진실과 대안을 알리기 위해 언론이, 지식인이, 정치가 제 몫을 해야 할 시간이다.


*이 글은 <한겨레> 11월 23일자에 실린 [제정임 칼럼]을 신문사의 허락 하에 전재한 것입니다.

편집: 신현우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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