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능력주의’

▲ 이성현 PD

충남 논산시 부적면 감곡초등학교는 전교생이 60명이 안 됐다. 내 동급생은 8명. 산자락과 강에서 뛰어놀며 감수성을 키웠다. 잠자리와 뱀을 잡고,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걸 관찰했다. 수학여행을 따로 가지 않고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고기를 구워 먹었다. 온종일 학교를 누비다, 운동장 미끄럼틀에 누워 바라본 비취색 하늘을 잊지 못한다.

작은 학교에서 나는 글짓기, 상상화 그리기, 고무 동력기 날리기 대회 등 상을 휩쓸었다. 공부도 전학년 1등이었다. 한 반에 8명이 고작이었지만 일등은 일등이니 선생들 사랑을 독차지했다. 어머니는 애들과 잘 지내라며 잔뜩 간식을 싸줬다. 저녁까지 무사히 잘 놀고 있으면 어머니가 일을 마치고 날 데리러 왔다. 어머니는 이 학교 6학년 담임선생이었다. 

병설 유치원부터 함께한 친구, 준호가 있었다. 까만 피부와 삐쩍 마른 몸에 꾀죄죄한 옷차림이었지만, 준호는 해맑은 미소를 가졌다. 준호는 언제나 제일 먼저 학교에 와 있었다. 공부도 운동도 못 해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았지만, 끝까지 학교에 남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그러다 집에 갈 때가 되면 준호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터벅터벅 돌아갔다. 준호의 꿈은 학교에 평생 사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넌 공부도 못 하고 멍청해서 안 된다’고 놀렸지만, 준호는 ‘그럼 학교 아저씨 할 거라며’ 히죽 웃었다. 

▲ 어린 시절 산자락과 강에서 뛰어놀며 감수성을 키웠다. 가장 친했던 친구 준호와 잠자리와 뱀을 잡고,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걸 관찰했다. © 이성현

학교는 준호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어머니와 함께 준호네 집에 가정방문을 한 적이 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함께 밥을 먹었지만, 반찬은 없었다. 준호가 왜 학교 급식을 두번씩 먹는지 알게 됐다. 건더기를 다 건져 먹은 빨간 김칫국물만 숟가락으로 떠먹을 뿐이었다. 저녁 시간이 지나서야 준호 할머니가 시장에 갔다 돌아왔다. ‘준호 어미는 도망가고, 아비는 매일 술만 먹고 들어옵니다…’

다음 날 나는 학교에서 아무 생각없이 준호네 이야기를 해버렸고, 준호는 ‘땅그지, 엄마 없는 아이’로 놀림을 받았다. 준호가 내게 불같이 화를 냈다 “엄마가 선생님이라고 잘난 척하지 마!” 처음 보는 준호의 모습이었다. 한바탕 치고 받고 한동안 말조차 하지 않는 사이가 됐다. 어머니는 나를 피아노학원, 태권도학원에 보내기 시작했고, 준호는 외톨이가 됐다. 도시 학교로 전학 가기까지 사과한 기억이 없어, 더 미안하고 그리울 뿐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준호의 마음을 조금 알게 됐다. 입시와 군대 그리고 다시 취업 준비를 하며, 숨 가쁘게 달려야 했다.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큰 도시, 더 큰 세상에 나가자, 나는 우수한 학생이 아니었다. 방황하며 경쟁구조에서 ‘발악’을 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그 체계에 흡수되어 갔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자본주의에 매몰된 인간은 무력감과 고독을 느끼고, 강력한 권위자에 편승하게 된다고 했다.

불안이 쌓이자 타고난 환경을 나의 능력으로 믿기 시작했다. 잘난 사람들에게 몸을 굽힐지언정 약자를 구분 짓는 걸 포기하지 못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내가 정규직일 때는 이뤄지면 안 됐다. 농촌에서 살며 받은 지금까지 혜택은 무시하고 지역할당제에 불만을 토했다. 지금까지 해온 게 있기 때문에, 나보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잘되는 걸 배 아파했다. 

“능력주의 사회는 자기가 누리는 특권이 자기 능력으로 노력해서 이뤄낸 것으로 생각하며, 가난한 패자들은 노력하지 않고 게을러서 생긴 결과라고 생각한다.” 마이클 샌델의 말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인생의 전성기를 보낸 건, 선생이던 어머니 영향이 컸다. 담임선생들과 출퇴근을 함께 했고, 글짓기대회, 그림대회 등은 미리 알고 준비할 수 있었다. 좋은 환경 덕분에 특권을 독차지했다. 

존 롤스는 자신의 지위, 권력, 인종, 가치관이 모두 베일에 싸여 있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고 가장 정의로운 합의를 이룬다는 무지의 베일을 설명했다. 준호는 나에게 무지의 베일을 씌워 나를 돌아보게 하는 존재다. 매번 떨어지는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해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준호가 떠오른다. 사회관계망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다. 그의 소식이 궁금하다. 평생 학교에서 살고 싶어 하던 준호는 그토록 원하던 꿈에 얼마나 다가섰을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김계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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