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처서’

▲ 김현주 기자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를 좋아한다. 봄은 모두가 설레는 시기라 혼자 외톨이가 된 거 같아 서글프고 가을은 수확의 시기라 나에게도 성취가 있어야 할 것 같아 좀 부담스럽다. 그래서 초여름과 초가을이 좋다. 봄이 끝나가고 초록이 우거질 무렵 선선한 저녁 공기는 적당히 들떠 있었다.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 공원 벤치에 앉아 친구와 수다를 떠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다. 약간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숨을 들이마실 때 느껴지는 청량감이 좋았다. 

오늘(23일)이 처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감돌아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 일 년에 두 번 온다는 건 생각만 해도 즐겁다. 하지만 낮에는 햇볕이 뜨거워 내가 사랑하는 계절을 느낄 수 없다. 마음이 가난한 탓도 있겠지만, 봄과 여름 사이 틈이 사라졌다. 여름답지 않은 선선한 날 프랜차이즈 카페에 갔는데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서울 날씨를 검색해보니 기온은 최고 21도, 최저 12도였다. 계절이 바뀌는 달에도 시원하거나 따뜻하거나, 둘로 나뉜 세상이다.

▲ 세상이 편해지면서 역설적으로 봄과 여름, 여름과 가을 사이의 좋은 계절을 만끽할 여유가 사라졌다. ⓒ 유재인

여름엔 더운 사람에게 맞춰 에어컨을 틀고, 겨울엔 추운 사람에게 맞춰 히터를 트는데 자연의 섭리는 누가 배려해 주는 걸까? 김종철 선생이 “동아시아에서 서구 근대 문명의 본질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혜안의 소유자”라고 부른 일본 정치인 다나카 쇼조는 “전기가 들어와서 세상이 캄캄해졌다”고 말했다. 전기가 들어와서 세상이 좋아진 것 같지만 실은 아니라는 뜻이다. 서울 사람들이 누리는 편리에는 지방 사람들의 희생이 전제되어 있고, 도시가 누리는 편리에는 농촌의 희생이, 인간이 누리는 편리에는 자연의 희생이 전제되어 있다. 강요된 희생이 짜낸 피눈물은 결국 돌고 돌아 편리를 누린 이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IPCC(정부간기후변화협의체)는 2018년 기후변화 특별보고서를 내고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이상 지구 온도가 오르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올 거라고 경고했다. 거창한 보고서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인류는 과거에 급격한 기온 변화로 생긴 재난을 겪은 경험이 있다. 지구의 평균 온도가 1도 정도 낮아져 ‘소빙하기’로 불리는 17세기, 조선시대에서는 경신대기근이 있었다. 가뭄과 폭우, 홍수가 이어졌고 메뚜기떼가 창궐하기도 했다. 전체 인구 500만 중 100만이 굶어 죽거나 병에 걸려 죽었다. 

이제 매미 소리도 지친 듯 시들해졌다. 초여름 내가 머문 제천에는 매미나방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다. 선선한 초여름 밤공기가 아쉬워 기숙사 창문을 열고 싶지만, 구멍 난 방충망 사이로 매미나방이 들어올까 봐 문을 못 열었다. 농작물에도 피해를 주고 피부병을 일으키기도 하는 매미나방이 2년 전쯤부터 성행하는 이유가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한다. 겨울이 그다지 춥지 않아 죽어야 할 해충이 살아남아 부화한 것이다. 이제 창문을 열어젖히고 초가을의 선선한 밤공기를 다시 여유롭게 들이마실 수 있을까? 아니면 세상이 더 캄캄해질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정진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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