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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를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다면
[인문교양특강] 이주헌 미술평론가
주제 ② 쿠사마 야요이의 예술세계
2021년 03월 10일 (수) 13:11:40 박두호 신지인 정진명 기자 dooh5@naver.com

쿠사마 야요이에게 점은 마침표가 아니다. 무한 반복되는 점은 그의 인생을 빼닮았다. 기괴하지만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점 패턴은 현대 미술가 야요이의 대표 창작물이다. 그는 점을 ‘공포의 표현’으로, 불안한 마음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예술가가 된 뒤에는 대중 공감을 끌어내는 ‘창작물’로 활용했다. 그래서 야요이에게 점 무늬는 마침표보다는 현재 진행형을 나타내는 표식에 가깝다.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예술세계’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 쿠사마 야요이는 불안신경증과 강박증을 점의 반복 패턴으로 승화해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반열에 올랐다. Ⓒ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

축적된 트라우마, 예술로 분출하다

쿠사마 야요이는 불안정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9년 일본 나가노현에서 태어난 그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웠지만 정서적으로 빈곤을 겪었다. 그의 어머니는 바람둥이 기질을 가진 아버지의 불륜을 염탐하라고 지시했다. 아버지가 어디 가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소상히 보고하는 것은 어린 야요이에게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열 살 무렵 야요이는 환청과 환각을 경험한다. 꽃무늬가 말을 걸어오고 심지어 자신을 덮칠 것이라 느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감정 표현을 억제해오던 어머니는 야요이를 더욱 몰아붙이며 분노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 이주헌 미술평론가가 지난 11월 13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예술세계’와 인생에 관해 강연했다. Ⓒ 정진명

“많은 예술가들이 어릴 때 경험을 평생의 예술적, 조형적 주제로 삼는 경우가 많아요. 어릴 때 겪는 경험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일종의 파운데이션(Foundation), 즉 기초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 작품으로 분출되어 나오는 거죠.”

이주헌 평론가는 야요이가 공포로부터 도피하는 방법으로 그림을 택했다고 말한다. 야요이는 내면의 공포를 다스리려고 자기 손으로 이미지를 재구성했다. 사물이 자신을 덮쳐 자신이 ‘소멸’할 것 같은 기분을 무수한 점의 ‘확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외부 공포는 주술적 힘으로 다스릴 수 있다. 실제로 선사시대 동굴에 그려진 소 벽화에 창을 던진 흔적이 있다. 이미지에 창과 화살을 던지면 진짜 사냥을 하러 나가서도 소들의 힘이 빠져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1939년 야요이가 그린 어머니 초상화를 보면, 온 얼굴에 구멍이 나 있다. 분노와 증오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때부터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했다고 한다.

   
▲ 1939년 야요이가 그린 어머니 초상(왼쪽)은 그림 전체가 점으로 뒤덮여 있다. 가족사진(오른쪽)에서 야요이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서있다. Ⓒ YAYOI KUSAMA

옭아맬수록 자유로이 떠나는 영혼

쿠사마 야요이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은 고등학교 선생이었다. 그 선생이 야요이 부모를 설득한 덕분에 야요이는 1948년 교토 시립미술공예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야요이는 엄격한 사제 관계와 도제식 교육을 견디지 못했다. 전통적인 법칙과 제약이 많은 일본 전통화 기법과 야요이의 미술 세계는 맞지 않았다. 1949년 작품 ‘잔몽’을 보면 붉은 해바라기가 쓰러져 마치 시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야요이는 내면의 갈등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그린 것이다.

1952년 마츠모토 공민관에서 열린 야요이의 첫 개인전에 정신과 의사 니시마루 시호가 방문했다. 그는 야요이의 그림을 보고 야요이에게 정신과적 문제가 있음을 알았다. 그제서야 정신질환을 인지하게 된 야요이는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펼칠 수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 미국에는 화가의 즉흥을 중시하며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추상표현주의가 유행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소멸과 확산을 점 무늬로 표현해온 야요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 1949년 야요이의 ‘잔몽’. 야요이가 내면의 갈등을 회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 YAYOI KUSAMA

“앤디워홀도 야요이 작품 모방했다”

이주헌 평론가는 “야요이의 ‘소프트 스컬프처’(부드러운 조각품)는 기존 예술사의 편견을 깬 획기적 조각물”이라 설명했다. 섹스에 관한 공포와 혐오를 상징하는 ‘집적 NO.1’(1962)이 대표 작품이다. 어린 야요이는 아빠를 감시하라는 엄마 지시를 따르면서 남녀 관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사랑의 아름다움을 경험하지 못한 그는 자기 작품에서 그 감정과 생각을 쏟아낸다. 이 작품을 통해 야요이는 두 가지 도전에 성공했다. 딱딱한 재료로만 조각할 수 있다는 ‘사회적 편견’과 남성과 성기에 가져왔던 ‘개인적 공포’를 극복한 것이다.

소프트 스컬프처는 야요이에게 배신의 아픔도 맛보게 했다. 예술계에서 잘 알려진 조각가 클래스 올덴버그나, 미술가 앤디 워홀이 야요이의 아이디어를 모방했다. 올덴버그는 야오이를 모방해 '부드러운 변기'(1966)를 만들었고, 앤디 워홀은 야요이의 '천개의 배'(1964)를 보고 소 벽지 작품을 만들어냈다. 남성중심주의 미술계에서 이미 인정받은 두 예술가는 야요이 대신 명성을 얻었다. 두 번 배신을 당한 야요이는 작업물을 외부인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야요이는 '거울의 방'을 루카스 사마라스에게 또 빼앗기게 됐고, 불안감에서 시작된 그의 정신병은 더 심각해진다

   
▲ 야요이가 1965년 발표한 ‘무한한 거울의 방’(왼쪽)과 루카스 사마라스가 1966년 발표한 ‘거울의 방' Ⓒ YAYOI KUSAMA
   
   
▲ ‘집적 No.1’(1962)은 섹스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표현한 작품이다(위). 1966년 클래스 올덴버그가 야요이의 작품을 모방해 만든 ‘부드러운 변기’(아래 왼쪽), 1966년 앤디 워홀이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선보인 ‘소’ 벽지(아래 오른쪽). Ⓒ YAYOI KUSAMA, 휘트니 미술관, Castelli Gallery

대통령부터 동성애까지, 예술에 성역은 없다

쿠사마 야요이는 여러 차례 작품을 뺏긴 뒤 자살을 시도한다. 다행히 죽지 않고 전화위복을 이뤄낸다.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동그란 볼들을 쌓은 '나르키소스의 정원'이 대중에게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글래스 하우스 주변에 설치되는 등 작품 초대를 받게 된다. 또, 뉴욕에서 누드 퍼포먼스로 미술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나는 당신과 잠자리를 함께해줄 용의가 있습니다. 베트남전을 끝내기만 한다면요. 평화를 위해서라면 희생할 수 있습니다.”

닉슨 대통령에게 한 발언으로 반향을 일으킨 야요이는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다. 이어 미국 최초로 동성애 결혼식을 주관하며 퍼포먼스 아트를 선보였다. 야요이는 “예술의 목표는 고통을 벗어나는 것”이라며 “동성애 결혼식 퍼포먼스를 통해 평화와 사랑을 사람들과 나누겠다”고 했다.

이외에도, 폴카 닷(중간 크기의 물방울 무늬)을 사람 몸에 그리기도 하고, 게이 사교 클럽을 여는 등 성역 없는 활동을 한다. 당시 미디어는 그의 활동에 관심을 보이지만, 도덕 규범과 사회적 윤리를 허문다는 악평을 내놓았다. 예술 본질보다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 동그란 볼이 깔려있는 글래스 하우스는 또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준다(2016). Ⓒ YAYOI KUSAMA

야요이에게 다가온 사랑

상처만 받던 야요이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알려진 조셉 코넬이다. 코넬은 야요이를 진심으로 아껴주며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상처받던 야요이는 처음으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둘은 26살의 나이 차이에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야요이가 육체 관계를 싫어해 둘은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눴지만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그들의 사랑은 1973년 조셉 코넬이 세상을 떠나면서 끝난다.

   
▲ 야요이가 유일하게 미소를 지은 것은 조셉 코넬과 함께할 때였다. Ⓒ YAYOI KUSAMA

야요이는 미국 언론에서 닉슨 대통령 다음으로 많이 보도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미디어는 야요이를 예술가가 아닌 흥미거리로 다뤘다. 악평에 시달리고 작품은 안 팔렸다. 야요이는 자유로운 미국 예술계에서 자신을 표출할 기회를 얻었지만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로 정신병이 더 심해진다. 그림의 점들이 자기를 삼킬 것 같은 환각 증세가 심해져 결국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본 언론은 야요이를 미국에서 국민적 불명예를 얻은 예술가로 보도한다. 일본 미학에 관한 잘못된 오해를 미국에 심어줬다는 평을 듣는다. 이때까지도 일본에서 야요이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드물었다. 일본에 돌아온 야요이는 1977년 세이와 정신병원에 입원해 지금까지도 여기에 산다. 병원에 살면서 근처 작업실에서 작품을 만든다.

조셉 코넬은 여러 사진을 화폭에 붙이는 콜라주로 유명한 예술가다. 야요이는 코넬을 향한 존경을 담아 자기 작품에 콜라주 기법을 활용한다. 미국에서 하던 예술을 일본에서 할 수 없으니 거부감이 크지 않은 초현실주의 예술을 시작한다. 코넬이 하던 작업 방식을 그대로 도입한다. 사진 이미지를 붙이는 콜라주 기법으로 야요이의 작품은 추상에서 벗어나 형상이 나타난다.

   
▲ 1973년 작 ‘꽃과 자화상’은 여인의 뺨에 물고기 사진, 눈썹에 벌레 사진, 배경에 나뭇잎과 나방 사진을 붙여 콜라주 기법으로 그렸다. Ⓒ YAYOI KUSAMA
   
▲ 1989년 ‘맨드라미’. 일상적인 사물을 그리면서 자기 마음을 달랜다. 작품에는 그물 속 물방울 무늬가 있어 어릴 때 경험한 환각의 경험을 변화를 겪으며 표현한다. Ⓒ YAYOI KUSAMA

호박, 새로운 전설의 시작

   
▲ 야요이를 대중에게 알린 1990년 작품 ‘호박’. Ⓒ YAYOI KUSAMA

야요이를 대중들에게 알린 호박 무늬는 1990년부터 등장한다 이주헌 평론가는 “점무늬가 호박과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야요이는 1993년 일본 대표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나가 ‘거울 방(호박)’을 선보인다. 그동안 야요이가 활용한 여러 요소들이 포함된 작품으로 세계 미술인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 (위) 거울로 방을 만들고 바깥은 점으로 표현했다. 거울로 비치니 방안에 거울 방이 물체로 보이지 않고 하나의 공간으로 보인다. (아래) 계단에 올라가 구멍 안을 들여다보면 호박들이 나온다. 거울로 호박이 끝없이 확장된다. 착시현상으로 밖에서는 반사가 돼 방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구멍 안에서는 무한한 공간이 보인다. 1991년 ‘거울 방(호박)’ Ⓒ YAYOI KUSAMA

‘거울 방(호박)’은 관객들에게 무한한 확산의 경험을 준다. 야요이가 점들의 무한한 확산으로 겪은 환각 증세를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이제는 이 점들이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겨 ‘거울 방(호박)’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이주헌 평론가는 “구멍 속에서 무한한 공간으로 퍼지는 걸 보면 온 몸에 전율이 느껴지고 소름이 끼친다”며 “이 작품을 보면 야요이가 겪은 고통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호박은 친숙한 이미지죠. 예쁘지도 않고 예쁘다고 자랑하지도 않아요. 우리에게 친근한 이미지입니다. 신데렐라도 호박 마차를 타고 가잖아요. 호박은 무언가 대단하지 않고 소박한 것인데 우리에게 소중하죠. 야요이는 2차대전 때 호박을 많이 먹었다고 해요. 호박이 목숨을 부지해준 거죠. 호박으로 작품을 만든 구체적인 이유는 말하지 않지만 호박에 자신을 투영했다고 볼 수 있죠. 호박으로 자기를 긍정하게 됩니다.”

   
▲ 1994년 ‘나오시마 호박’. 다양하게 변주된 호박의 모습 Ⓒ YAYOI KUSAMA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II]는 한홍구 홍종호 이상수 강유정 이주헌 허효정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방학 때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 이정헌 기자

[박두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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