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이상수 철학박사
주제 ② 화쟁, 탕평, 대동세상: 한국인의 사유 방식

두 번째 주제인 ‘화쟁, 탕평, 대동세상: 한국인의 사유 방식’을 강연하면서 이상수 박사는 한국 철학사의 가장 큰 특징이 융합이라고 말했다. 그의 은사인 연세대 신과대 유동식 교수는 기독교학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유교 경전인 대학과 중용, 불교 경전인 금강경을 읽게 했다. 그 경전들과 기독교학을 비교해보기 위해서였다.

유 교수는 한국 철학을 ‘비빔밥 사상’이라고 가르쳤다. 우리나라의 원형적인 것에 외래 이질 문화가 들어오면 융합되어 비빔밥과 같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상수 박사는 유 교수의 강의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며, 자신이 한국철학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유동식 교수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했다.

▲ 이상수 박사가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 김병준

“우리나라 철학을 보면 실제로 이런 융합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원효가 제기했던 화쟁 철학,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을 섞으려고 했던 홍대용과 최한기, 유불도와 기독교를 섞은 최제우의 동학 등 몇 가지를 봐도 융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볼 수 있죠.”

단재 신채호는 1925년 <동아일보>에 이런 만필을 썼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主義)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러나 이상수 박사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석가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석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그는 한국철학사를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철학사의 두 특징, 인간중심주의와 약소국역사

그리스∙로마 신화와 단군 신화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 신의 존재감 차이다. 그리스∙로마 신화는 ‘신’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에 나오는 신들은 인간과 정을 나누고 인간에게 많은 것을 베풀지만, 결국 경외와 공포의 대상이다. 반면, 단군 신화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다. 환인(하느님)은 인간 세계에 관심을 보이는 아들 환웅을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라(홍익인간)’며 내려 보낸다. 이때 함께 내려오는 신인 풍백, 우사, 운사 역시 농사를 짓는 인간을 도와주기 위한 존재였다. 이 박사는 단군 신화를 비롯한 인간 중심으로 쓰인 우리 설화가 철학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원효같이 훌륭한 선배가 있는데 원효에 관해선 아무런 연구가 되고 있지 않아요. 고려 시대 이미 대각국사 의천이 이런 시를 썼어요. ‘큰 업적이 있는데 오늘날 후학들은 게을러서 옆집에 공자가 살아도 누군지 모른다네.’ 이 표현이 우리나라에도 원효 같은 훌륭한 고승이 있는데 그런 건 연구를 안하고 중국 선불교만 연구한다는 거죠. 꼭 고려만 해당하진 않는 것 같아요.”

그는 중국이라는 강대국을 이웃으로 둔 것도 한국철학사에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국의 중화주의가 우리나라에 2천년이 넘게 영향을 끼쳤다며, 그 시작을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 중화사상이라고 말했다.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된 역사서 <사기>는 <본기>에서 중국 왕조의 역사, <세가>에서 제후들의 역사, <열전>에서 유명한 인물과 오랑캐로 여긴 주변국 역사를 기록했다. ‘동이’ 곧 동쪽 오랑캐로 여긴 조선은 <조선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 박사는 매우 강력한 중국과 오랜 시간을 보내며 한국은 중화사상에 큰 반감을 갖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유불도를 넘나든 통일신라 ‘최치원’

조선 중기 학자인 주세붕은 통일신라 시대 유학자인 최치원을 ‘유선’(儒仙)이라고 불렀다. 유선이란 유학자이자 신선이라는 말이다. 최치원은 유교불〮교도〮교 사상을 넘나들었다. 이 박사는 “오늘날로 치면 크리스천 보살이라는 말”이라며 전혀 성립되지 않는 ‘형용모순’이라고 했다. 그는 “최치원이 유선이라 불린 것은 어느 한쪽에 경도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뜻한다”고 덧붙였다. 최치원은 유학자이면서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 불국사, 흥륜사 등 각종 사찰의 비명을 짓기도 했는데 그 수가 20편이 넘는다. 그 외에도 최치원은 <지증대사적소탑비병서> <법장화상전> 등 불교에 관한 저서를 남겼다.

▲ 문경 봉암사에 있는 산신각. ⓒ 이상수

다른 종교에 개방적인 한국 불교

한국 불교는 융합적인 성격을 띤다. 부처를 모시는 사찰에 산신령을 모시는 ‘산신각’이라는 공간을 갖춘 점이 이를 증명한다. 삼성각, 산령각이라고도 부른다. 절에서 산신령을 모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박사는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라는 설화를 소개하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지혜라는 비구니가 불사를 하고 싶은데 돈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꿈에 신모님이 나타나서 ‘내 자리 밑을 파보면 황금 십만 냥이 나올 테니 그걸로 절을 짓되, 절 안에 산신령을 모셔서 예배를 드리라’고 조건을 달아요. 비구니가 꿈에서 깨어나서 땅을 파보니 진짜 황금이 나왔습니다. 그 황금으로 절을 지으면서 산신령을 모시게 된 거죠.”

이 박사는 절에 산신령을 모시는 공간을 만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신선 신화의 유래는 단군 신화에서 비롯됐는데, 여기에 따르면 단군이 900년을 산 뒤 구월산에 내려와 신선이 됐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산신령을 연구한 분이 산신각과 유사한 형태의 절이 동남아나 일본에도 있긴 하지만 이렇게 따로 공간을 만들어서 모신 경우는 없다고 했다”며 “이는 우리가 불교를 받아들일 때 토착신앙과 융합한 흔적”이라고 말했다. 한국 불교가 정착할 때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타협했다는 것이다.

▲ 문경 봉암사 산신각 안에 비치된 산신도. ⓒ 이상수

이 박사는 “산신각에 가면 부처님 양 옆으로 그림이 걸려 있다”며 “하나는 호랑이를 배경으로 허름한 옷을 입은 산신령이, 다른 한쪽엔 독각승 그림이 있다”고 했다. 독각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혼자서 진리를 깨우친 사람을 말한다.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을 입지 않아도 누구든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다른 신앙을 배격하지 않고 융합하며, 혼자 깨달은 이들까지도 부처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한국 불교는 매우 개방적인 편이다.

부처를 왜 다른 데서 찾는가?

“<삼국유사>에는 재미난 기록이 있어요. 경주 흥륜사 금당(대웅전)에 열 명의 성인이 모셔져 있다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이 성인들은 진흙으로 조각을 만들어서 동쪽에 다섯 명, 서쪽에 다섯 명이 있다는 거예요. 그 열 명 중에 대부분이 불교 전래 초기 승려들이에요. 이차돈, 원효 이런 사람들인데, 이들은 저잣거리에 나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같이 뒹굴었던 사람들이에요. 이들을 성인으로 모셨다는 건 부처로 인정했다는 거고, 우리 땅에서 스스로 부처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표현한 거죠.”

▲ 원효 대사 표준 영정 (이종상 화백, 1978). ⓒ 이상수

이상수 박사는 경주 흥륜사에 성인으로 모셔져 있는 승려들이 민중적인 불교를 지향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깨달음을 얻고 신라에 머물게 된다. 원효가 진리를 깨달은 과정에 관한 여러 설 중 하나는 무덤에서 잠을 자는 얘기다. 무덤인지 몰랐을 때는 편안하게 잘 잤는데 깨어나보니 무덤이었다는 것이다. 원효는 그곳에서 하루 더 잘 수밖에 없었는데 또 잘 때는 마음이 뒤숭숭해서 잠들지 못했다는 일화다. 원효는 이 경험을 통해 ‘모든 게 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당나라 유학길에서 되돌아왔다.

원효는 <금강삼매경>에서 세가지 주요 사상을 주장했다. ‘범성불이’(凡聖不二) ‘무주열반’(無住涅槃) ‘계인연’(因緣)이 그것이다. ‘범성불이’는 중생과 부처가 같다는 뜻이다. ‘범성불이’ 사상이 나오게 된 배경은 당시 신라가 골품사회였다는 것과 관련된다. 골품사회에선 신분이 낮은 사람은 재능이 있어도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원효는 ‘부처와 세상 사람이 다르지 않다’며 ‘누구나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 박사는 “’범성불이’는 신분제를 뛰어넘은 혁명적인 생각”이라고 평가했다.

‘무주열반’은 열반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열반, 곧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지만 <금강삼매경>은 이를 모두 부정한다. 열반과 깨달음, 자기의 존재 등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박사는 “한마디로 계급장 떼고 하라는 말”이라고 했다.

‘계인연’은 계율에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수행을 통해 깨달은 윤리적 가치를 실천하자는 사상이다. 즉 외부로부터 만들어진 계율을 지키려고 하는 것보다 자기의 ‘닦음’이 깊어지면 그에 걸맞는 계율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원효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쟁(和諍)사상’이라고 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교종과 선종이 서로 다투고 여러 교파로 나뉘어 싸웠는데, 원효는 불교의 가르침이 하나로 통한다고 생각했다. 원효는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에서 다른 종교의 교리에도 진리가 있다면 이는 불교와 통한다고 주장했다. 원효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서도 불교의 가르침은 우주의 섭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모든 진리를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다고 했다.

꽃은 ‘꽃’이라고 불러줘서 아름다운 게 아니다

“김춘수 시인이 <꽃>이라는 시를 썼어요. ‘내가 너를 꽃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내게 다가와서 꽃이 되었다’. 그런데 꽃이 ‘꽃’이라고 불러줘야 꽃이 되는 게 아니고, 장미가 아름답다고 찬양해야 아름다운 게 아니죠. ‘너는 내가 아름답다고 하니까 아름다운 거야’라고 한다면 이건 ‘능’이 ‘소’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거죠. 이 시는 ‘능소평등왈여’(能所平等曰如)가 이뤄지지 않은 예죠. 능소평등이 되었을 때 그게 바로 본디 모습 그대로인 ‘여’가 된다는 게 <금강삼매경>에 나오죠. 저는 이걸 매우 중요한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 원효가 금강삼매경을 처음 강의한 장소인 황룡사의 중금당 터. ⓒ 이상수

<금강삼매경>의 중요한 명제가 ‘능소평등왈여’이다. ‘능’은 감각지각의 주체, 곧 사람이다. ‘소’는 감각지각의 대상, 바깥 외물 세계라는 뜻이다. 능과 소가 평등한 것을 ‘여’라고 한다. 이 박사는 “’여’란 가장 자기다운 모습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황은 지폐에 넣을 만한 인물이 아니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억불’ 문화가 자리잡는다. 이상수 박사는 조선이 유교를 받아들인 계기가 “불교와 도교가 세상 형세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세상살이에 관심 없으면 소는 누가 키우냐”며 “유교는 세상에 현실 정치를 펴겠다는 게 기본 사상”이라고 말했다. 유교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 말고 그 속에서 실천하며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게 기본 사상이라는 것이다.

“퇴계 이황이 천원짜리 지폐에 들어 있잖아요. 근데 저는 이황이 지폐에 넣을 만한 철학자가 안 된다고 생각해요. 기대승과 ‘사단칠정논쟁’을 했다고 하는데 그 논쟁을 해서 조선이 더 좋아졌느냐? 백성들이 살기 좋아졌느냐? 조선 왕들이 제대로 정치하려고 노력했느냐? 전혀 아니거든요. 사단칠정논쟁은 전형적인 공리공담이에요. 사단칠정은 윤리를 위해서 마음을 일으키는 게 본래의 감정과 같냐 다르냐 하는 문제인데 이걸 실험으로 알아낼 수도 없고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어요. 근데 이 논쟁을 가지고 조선이 뭐, 논쟁이 살아있는 사회였다는 둥, 조선이 철학을 하는 나라였다는 건 다 뻥이죠. 그냥 공리공담일 뿐이에요.” 

이상수 박사는 퇴계가 과대평가됐다고 주장한다. 이황은 남명 조식이 벼슬을 계속 거부하자 ‘벼슬을 해도 소신이나 명예가 크게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조식이 이황에게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은 사소한 예절도 모르면서 무슨 하늘의 대단한 이치에 대해서 공리공담을 한다’며 ‘나같이 산골짜기에 있는 사람은 아무런 영향력이 없으니 퇴계 선생이 그들을 야단쳐 달라’는 답장을 보냈다. 여기서 공리공담을 하는 이들은 사단칠정논쟁을 한 이황과 기대승을 말한다. 조식은 이황에게 예절도 모르면서 어떻게 하늘의 이치에 관해 논쟁하냐고 비판한 것이다.

이게 나라냐”의 원조는 남명 조식

조식은 과거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재능 있는 사람을 천거해 벼슬에 앉히는 ‘현량과’ 전령이 왔을 때도 벼슬을 거절했다. 조식은 늘 깨어 있기 위해 옆구리에 방울을 달고 다녔다. 그리스 철학자인 디오게네스도 ‘세상에 진실한 사람이 없어서 찾으러 다닌다’며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닌 바 있다.

▲ 남명기념관에 있는 남명 조식 영정. ⓒ 이상수

조식은 파격적인 상소문으로도 유명하다. ‘을묘사직소’는 명종의 벼슬 제안을 받은 조식이 이를 거부하며 쓴 상소문인데, 여기서 조식은 대비를 ‘과부’라고 부르고 왕을 ‘고아’라고 부르면서 “과부와 고아가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데 이래서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임금이 표준이 되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다”고 했는데 이 문장이 당시 대단히 유행하게 됐다. 이상수 박사는 “우리도 얼마 전 촛불시위를 할 때 ‘이게 나라냐’고 구호를 외쳤다”고 덧붙였다. 

조식은 ‘무진봉사’라는 상소문에서 “나라가 간신배들 때문에 망하고 있다”고도 했다. 하급 공무원인 아전, 서리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생겼다는 ‘서리망국론’이다. 서리들이 백성과 왕 중간에서 농단을 해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박사는 “조식의 서리망국론은 이후 조선의 왕들이 개혁을 위해 많이 참조했다”고 말했다.

윤휴 대 송시열: 사상의 자유와 교조주의

▲ 윤휴(왼쪽)와 송시열의 초상화. Ⓒ 이상수

조선 중기 과거 시험은 주희가 유학을 집대성한 성리학에서만 문제가 나왔다. 실학자 윤휴는 ‘세상 천하의 이치를 어떻게 주희만 알고 나는 모르는가, 주희는 내버려두고 우리는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한 인물이다. 송시열은 윤휴가 맡았던 이조좌랑의 후임자가 됐는데 윤휴의 뛰어남을 익히 알고 있던 인물이다.

윤휴는 자신이 잊지 않고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려고 <중용>(中庸)의 편을 나누고 주제가 같은 것을 묶어 핵심 내용을 메모한 <중용독서기>라는 책을 통해 <중용>을 해설했다. 그는 “주희와 싸울 일도 아니고 주희가 중용을 해석했으면 윤휴도 해석 가능한 게 아니냐”라고 썼다. 교조적인 송시열은 주희와 다른 글을 썼다는 이유로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반역사건으로 끌고 갔다. 이 박사는 “윤휴는 사유의 자유를 주장한 서양의 갈릴레오 갈릴레이나 조르다노 브루노와 같은 인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만중: 다양한 관점의 에세이스트

▲ 서포 김만중 초상화. Ⓒ 이상수

김만중은 다양성을 존중한 인물이었다. 불교와 도교의 합리적인 면을 선선히 받아들이고, 맹자와 주희라도 성역 없이 비판한 인물이었다. 예를 들어 ‘좋은 약이더라도 치우침이 강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까마귀 머리도 병에 마땅하기만 하면 사람을 살려낼 수 있다’며 ‘좋은 약재도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이니 어찌 한 가지만 고집하겠는가’라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김만중의 에세이는 어떤 사상과 선입견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비평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아야 할 사상가”라며 “김만중의 자유로운 사색이 이어졌다면 한국 근대화의 풍경이 달라졌을 것”이라 했다.

근대지향적 개혁사상가: 박세당, 정약용

▲ 박세당(왼쪽)과 정약용의 초상화 Ⓒ 이상수

박세당은 <색경>(穡經)이라는 농서에서 “농사는 백성들 삶의 근본이고, 백성이 먹고 사는데 필요한 연구는 농학”이라고 말했다. 정약용은 곡산 군수로 갈 때 농민반란 지도자 이계심에게 “관청이 백성들의 실정에 밝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위해 잘 도모하여 어려운 점을 가지고 관청에 대들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계심을 체포하지 않은 일화가 있다. 군주는 백성이 세우고, 백성이 끌어내린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근대적인 정치 구상에 상당히 접근한 생각이었다.

서학과 동아시아 전통학문의 융합: 홍대용, 최한기

▲ 홍대용(왼쪽)과 최한기의 초상화. Ⓒ 이상수

근대화가 시작됐을 때 홍대용은 ‘모두가 중심이다, 각자의 나라가 중심이다, 모두가 다 바른 기준이다’라며 탈중심의 문화상대적 세계관을 제시했다. 이는 중화주의를 뒤엎는 발언이었다. 최한기는 서학과 우리 학문을 비교하며 어느 게 옳은지를 생각한 인물이었다. 인간의 경전은 하늘의 경전에 바탕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하늘의 경전은 우주 대자연의 생성문화를 의미한다. 온 나라 가운데 작게 다른 것들이 존재하지만 모두 신묘한 기운의 운행에 따라 변화해 간다는 사실을 말하며 동아시아 전통학문의 기철학과 서양 자연과학을 융합한 학문을 연구했다.

“한국철학사의 사유 중에 중요한 것들을 관통하는 생각은 한 가지 교조에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대신 여러 가지 가치체계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겁니다. 공존하는 가치를 융합해서 우리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 기준이 한 곳에 고정되지 않고 모두에게 동등한 기준을 맞출 수 있다는 사고를 해온 것이 한국 철학사의 궤적입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II]는 한홍구 홍종호 이상수 강유정 이주헌 허효정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방학 때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 박두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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