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달빛 소나타’

▲ 김계범 기자

바람이 분다. 아침저녁으로 느껴지는 찬 공기가 계절의 변화를 알려온다. 코로나19가 발생하고 벌써 계절이 세 번 바뀌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마음 한쪽이 아려 온다. 그때마다 나는 시를 읽는다. 대학 도서관에서 빌린 오래된 시집 뒷면에서 도서 대출 카드를 발견했다. 청구번호와 저자명, 서명, 그리고 아래로는 책을 빌린 이들의 소속과 이름이 적혀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들이건만 나와 같은 시집을 읽었다니 친밀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1989년을 마지막으로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다. 도서 대출 시스템이 전산화한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는 줄 알면서도 괜히 내 이름 석 자를 카드 위에 적어본다. 오래전 선배들도 나와 같은 책을 읽으며 이 계절을 지나왔다는 사실에 작은 위로를 얻는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시인이 있다. 김현승, 박인환, 최승자. 가을을 더 고독하게 만드는 시인의 시편들. 박인환의 시를 오랜만에 읽어본다. 서른 하나에 요절한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 ‘세월이 가면’은 서울 명동의 ‘경상도집’이라는 막걸리집에서 여러 예술인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쓴 시다. 술자리에서 쓴 박인환의 시는 기자이자 극작가인 이진섭이 그 자리에서 바로 곡을 써서 노래가 된다. 가수 나애심이 바로 부른 이 곡은 ‘명동의 샹송’이라 불린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어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달은 채우고 비우기를 거듭하며 계속해서 변화한다. ⓒ Pixabay 

가을은 낭만과 축제의 계절이면서 고독의 계절이다. 수확의 계절임에도 거둘 것이 없는 청년에게는 우울한 계절이기도 하다. 아직 영글지 못한 청춘에게 한 해가 저물어가는 가을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선선한 공기가 감돌면 마음에는 공허함이 밀려온다. 코로나 탓에 만남이 뜸해서인지 이번 가을은 더 쓸쓸하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까지 나왔다. 많은 이들은 마음이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다. 오랜 취업 준비 생활로 나 역시 괴로운 시간을 지나고 있다.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봐도 어느새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주변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면서 불안감을 느끼고 깊은 우울에 빠지곤 한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채워지지 않는 마음은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것만 같다.

코로나 사태로 복잡하던 첫 학기가 지나고 어느덧 두 번째 학기도 중반을 지나가고 있다. 한 학기에 두 번 개학을 맞은 건 처음이다. 온라인 개강과 대면 개강. 코로나 사태로 우여곡절 끝에 대면 강의가 시작됐다. 학교에 들어온 것이 처음이 아니었건만 어느 때보다 설렜다. 마음은 분주하고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 와중에 코로나는 나에게 공동체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했다. 이곳에서 말 그대로 뜻이 통하는 동지를 여럿 만났다. 몇 달간 원격 화상수업 뒤 만남이어서 그런지 어색함은 없었다. 금세 가까워져 벌써 친해졌다. 온라인 방식 입학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괜찮은 첫 만남의 방식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을, 이 수확의 계절에 채워지지 않는 나의 마음도 동지들과 함께하며 조금씩 여물어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 

해 질 무렵 창밖을 바라보니 하늘이 붉은 단풍처럼 곱게 물들었다. 책상 앞에 앉아 때때로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답답한 마음에 올려다본 하늘 위로 달이 밝게 빛난다. 까만 하늘에 홀로 빛나는 달 하나가 내 마음을 위로한다. 깜깜한 캠퍼스, 일과를 마치고 기숙사로 향한다. 어두운 밤길을 동지들과 함께 걷는다. 지상이 어두울수록 밤하늘의 달빛과 별빛이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이곳에 와서 알았다. 초승달에서 보름달, 어느새 그믐달. 달은 자신을 비우고 채우기를 반복하며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초승달이 모자란 듯 보여도 끝내 보름달로 환하게 어둠을 밝히듯 나도 계속 변화하고 싶다. 어제와 비슷한 듯 보여도 조금은 더 채워진, 때로는 더 비운 내가 되고 싶다. 

달은 늘 공전하면서 날마다 변화한다. 보름달이든 초승달이든 지금 이 순간 이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싶다. 오늘은 오늘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도 힘들어하는 이에게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말을 전해주고 싶다. 그는 “I love you”를 이렇게 번역했다고 한다. “오늘 달이 참 밝네요.” 단절과 고립은 온 사회를 병들게 한다. 오직 사랑만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환하게 빛나는 달은 세상을 오롯이 비추며 환하게 미소 짓는 듯하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시 ‘해변의 묘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말했다. 30여 년 전 나와 같은 시집을 읽은 이에게 친밀감을 느낀 것처럼 서로 다른 곳에 있어도 우리가 지금 이 순간 같은 달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행복한 사람이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점령한 지금, 우리는 다시 오지 않을 또 한 번의 가을을 지나고 있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이봉수)

    편집 : 김병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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