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집 재밌는 곳] 강진 영랑생가

영랑은 왜 고향에서 시를 썼을까?

영랑은 전남 강진 시골에서 태어나 1915년 강진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상경해 서울 휘문의숙(지금의 휘문고)을 졸업한 똑똑이였다. 하지만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강진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출소하고 나서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고향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가 거처하던 영랑생가 사랑채에서 시 87편을 지었다. 그는 그의 시 속에는 남도의 방언이 살아있다. 그중 ‘오매 단풍들겄네’를 읊어보면 서정적이면서도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심취하게 된다. 가을을 맞이해 누이를 향한 따뜻하고 다정한 마음도 느낄 수 있다. 고향에 머무르며 들을 법한 정겨운 말투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오매, 단풍 들것네` (어머, 단풍이 들겠구나)
장광에 골불은 감닢 날러오아 (장독대에 매우 붉은 감잎이 날라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누나가 놀란 듯 쳐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어머, 단풍이 들겠구나)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추석을 내일모레 기다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바람이 잦아 걱정되어)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누나의 마음이 나를 봐주었으면)
`오매, 단풍 들것네` (어머, 단풍이 들겠구나)

▲ 2010년 1월, 고등학교 겨울방학 때 다녀온 강진읍 남성리 영랑생가. 영랑이 집을 떠난 뒤 주인이 바뀌면서 집 풍경이 몇 번 바뀌었지만 1985년 강진군이 사들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 이동민

<시문학> 창간의 산실

그는 자신이 살던 생가에 다른 시인들을 불러들여 ‘시회’, 곧 시를 짓기 위한 모임을 열었다. 당시 생가를 오가던 시인은 주로 <시문학> 창간을 주도한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변영로 정인보 김현구 등이었다. 고즈넉한 남도의 생가에서 그들은 담소를 나누며 자기 시를 낭송하는 시간을 가졌다. 짐짓 남도 시인들의 고향으로 일컬어지는 영랑생가에서 당대 내로라하는 시인들의 감수성 어린 시 낭송을 상상해본다. 1930년 3월, 박용철과 김영랑의 주도로 그의 생가에서 순수 문학 전문지 <시문학>이 탄생했다. 영랑의 원래 이름은 김윤식이었은데 <시문학>에 아호를 필명으로 기고하면서 나중에는 아예 김영랑으로 불렸다.

▲ 영랑생가에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이 적힌 시비. 1935년 간행된 <영랑시집>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첫 번째 시로 수록되었다. ⓒ 이동민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 흐르네 
도처오르는 아침 날빛이 (솟아오르는 아침 햇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반질반질한 은빛 물결을 이루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 도른 숨어 있는 곳 (다정한 마음이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일제 억압 속에서 찾은 내면의 평화

영랑생가 안채 뒤편에는 그가 지은 ‘동백닢에 빛나는 마음’의 시구를 적어 놓은 시비가 있다. 휘문의숙 3학년 때 독립선언서를 구두 밑창에 깔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가 독립만세운동을 꾀했지만, 일제 경찰에 발각돼 6개월간 수감됐다. <시문학> 1호에 발표된 김영랑의 시 ‘동백닢에 빛나는 마음’을 읊어보면 마음 한쪽 어딘가 순수한 내면을 통찰하려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내면의 평화를 찾고자 했던 마음이 느껴진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무언가에 억압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럴 땐 영랑을 돌아보며 그의 시를 읽어보는 건 어떨까? 짓눌려 있는 하루 속에서 마음 한편에 비어있을 법한 공허함에 그의 시적 내면 일부를 담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편집 : 조한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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