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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노동운동, 시민항쟁 밀알이 되다
[강연] ‘인천5∙3민주화운동’ 갤러리 콘서트
2020년 01월 19일 (일) 18:02:12 윤종훈 기자 yoonjh2377@gmail.com

18일 오후 인천 연수구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석남홀에서 ‘인천5∙3민주화운동의 시작과 끝’이라는 주제로 강연이 열렸다. 2월 16일까지 열리는 ‘노동자의 삶, 굴뚝에서 핀 잿빛 꽃’ 전시회와 연계해 이우재 인문학서당 온고재 대표가 마지막 갤러리 콘서트 강연자로 나섰다. 이전 콘서트에서는 인천에서 노동운동의 맥을 이어온 이총각(동일방직), 정대현(이천전기), 장현자(반도상사), 박남수(코리아스파이서), 이종근(현대제철) 씨 등 전직 노동자들과 이종화(키친아트), 손원영(두산인프라코어) 씨 등 현직 노동자들이 강연을 했다.

법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천5∙3민주화운동

인천5∙3민주화운동은 1986년 5월 3일 인천 주안역 앞 시민회관 사거리 일대에서 벌어진 민주항쟁이다. 당시 제1야당이던 신한민주당의 ‘헌법개정추진 인천∙경기지부결성대회’에 만여 명이 넘는 시민, 학생, 노동자들이 모여 ‘전두환 정권 타도’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당시 현장에 129명이 구속되고 60여 명이 지명수배되는 등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사건으로 기록됐다.

이우재 대표는 “인천5∙3민주화운동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정의하지 않아 공식 명칭은 아니지만 이 땅에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뤄냈는지 아는 사람들은 ‘5∙3사태’라고 말하지 않고 민주항쟁 또는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 인천5∙3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인천시민회관 앞 사거리 일대 시위 장면. ⓒ OBS경인TV

2∙12총선, 민주주의 열망 일으켜

이 대표는 인천5∙3민주화운동이 벌어진 배경을 1985년 2∙12총선으로 봤다. 1981년 제5공화국 체제가 들어선 이후 첫 국회의원 선거였다. 이 대표는 “80년 5월 이후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거나 시위를 벌이면 총 맞아 죽고, 고문당하고, 감옥 들어가는 걸 각오해야 했다”며 “국민들 속은 부글부글 끓으면서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이 점점 더 거세졌다”고 시대상을 짚었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시대 야당 정치인 상당수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김대중과 김영삼이었다. 이 대표는 “총선 두 달 전인 85년 12월 ‘우리는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고 생색내면서 독재를 이어가고자 이 둘을 뺀 나머지 정치인들을 대거 풀어줬다”며 “하지만 86년 1월 김대중과 김영삼을 주축으로 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중심이 돼 신한민주당을 창당하면서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직선제에 촛불시위도 하지만…

“신한민주당 제1공약이 대통령 직선제입니다. 지금은 당연히 직선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는 5~6천 명 선거인단을 추려서 이 사람들이 대통령을 뽑았어요. 총선을 거치면서 제1야당으로 부상한 신민당이 직선제 개헌을 놓고 당시 집권당인 민정당과 격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했죠.”

   
▲ 이우재 인문학서당 온고재 대표는 인천5∙3민주화운동이 87년 6월항쟁의 디딤돌이 됐다고 말했다. ⓒ 윤종훈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민주주의를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웠던 국민들은 2∙12총선 이후 자신 있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이 대표는 “4∙19혁명도, 유신시절 학생들 데모도 결국 학생들만으로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가장 중요하게 떠오른 집단이 노동자 계층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불의에 잠시 고개 돌리고 졸업하면 사회에서 인정받는 계급’이었지만, 노동자들은 전두환 독재 치하에 가장 밑바닥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는 “노동자가 운동권 이력 때문에 회사에서 잘리면 다른 곳에 복직도 안 시켜주니 전두환 정권 스스로 노동자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고 말했다. 이때 많은 학생이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소위 ‘위장취업’하면서 노동현장에 진출하는데 1985년 대우자동차 파업을 이끌었던 송경평 씨와 같은 해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했던 심상정 정의당 당 대표 등이 있었다.

전두환에 저항한 노동자들의 정치 투쟁

특히 85년 6월 24일 구로동맹파업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으로, 노동자들 투쟁이 단순히 회사 내 임금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 등에 그치지 않고 정치 투쟁으로 발전했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이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이 결성되고, 대학생 조직 내에서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가 생겨났다. 정권의 탄압은 갈수록 심해지고 한국전쟁 이후 북한과 단절되면서 민주화 이후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여러 분파들로 나뉘었다.

   
▲ 85년 6월 서울 구로공단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구속자 석방과 노동악법 철폐를 외치며 농성한 구로동맹파업 현장 사진. ⓒ 구로동맹파업20주년기념사업추진위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한다는 건 통일됐지만, 무엇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방법론을 놓고 운동권이 ‘갈래갈래’ 나뉘었어요. 대표적인 게 ‘개헌에 관한 입장’입니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과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연)은 신민당과 함께 가되 신민당이 전두환과 타협하지 못하도록 견인하는 ‘민주헌법쟁취론’을 주장했다. 반면에 서울노동운동연합∙인천지역노동자연맹(서인노련)은 삼민헌법론을 주장하면서 신민당이 노동자, 농민을 대변할 수 없는 집단이므로 연대 대상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이 대표는 “민중∙민주∙민족을 뜻하는 삼민에서 핵심은 노동자, 농민을 대표하는 민중인데, 압도적 다수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노동자가 중심이 돼서 변혁된 사회를 만들자는 게 삼민헌법론의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 신민당 개헌추진대회 저지 시위를 벌이고 있는 인천5∙3민주화운동 시위 장면. ⓒ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신민당은 86년 3월 개헌추진위원회 시도지부 결성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대규모 대중집회를 열고 세몰이를 하면서 전두환 정권을 압박하려는 목적이었다”며 “특히 3월 30일 열린 광주 결성대회에는 30만이 넘는 시민이 참가해 민주화를 향한 열기를 보였다”고 말했다. 이때 민주화운동 최고 단체인 민통련은 광주 결성대회의 열기와 국가권력이 공식 정당행사를 막을 수 없는 점을 고려해 ‘신민당의 결성대회에 모든 역량을 투입하여 결합한다’고 선언하면서 군부독재 타도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당시 운동권은 노동자 계급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니 신민당은 민주화운동 진영을 대하는 태도가 이중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했다. 86년 3월 17일 신민당은 민통련과 함께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민국련)를 결성하면서 공동전선을 구축하게 된다. 이 대표는 “민통련 의장을 맡은 문익환 목사와 부의장 백기완 선생은 민주화운동이 급진화하는 걸 상당히 우려했다”고 말했다.

신민당의 이중적 태도와 운동권의 과격화

86년 4월 28일 서울대학생 김세진과 이재호는 전방입소훈련교육을 ‘미국의 용병교육’이라 보고 투쟁하다 신림동 사거리에서 분신자살을 해 학생운동 분위기가 격화했다. 이틀 뒤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청와대에서 전두환과 만나 ‘국회에서 헌법 개정을 비롯한 정치 일정을 합의하면 임기 내 개헌이라도 반대하지 않겠다’고 합의하면서 민주화 운동권 사이에서 ‘보수대야합’이라는 의심을 사게 된다. 이민우는 회담 자리에서 ‘소수이겠지만 좌익 학생들을 단호히 다스려야 하며 민주화운동에 이런 사람들이 끼어서는 안 된다’며 분신자살한 김세진과 이재호를 좌익으로 몰고 학생운동 탄압을 묵인하겠다는 뜻을 표명하게 된다.

이 대표는 “가뜩이나 신민당이 어떻게 가나 불안해하고, 운동권은 광주의 영향으로 급진화하고 과격해지는데 이민우의 발언이 불을 지른 격”이라며 “민주화 운동권은 각 분파끼리 전체적인 통일 계열을 형성하지 못하면서 5월 3일 인천 집회에 참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 5∙3민주항쟁 기념집회 때 동인천역 대한서림 앞에서 경찰과 대치한 시위대. ⓒ 손원영

“아마 5월 3일 자료 영상을 보면 민정당사가 불타고, 길바닥에 깨진 보도블록이나 화염 조각이 보일 겁니다. 경찰이 학생 패는 건 안 나오고, 시위대가 경찰 패는 것만 나오고… 원래 신민당 대회를 하기로 했으니 경찰이 막을 수 없었는데 신민당이 입장을 포기하고부터는 전두환 정권 논리로는 ‘불법시위’니까 의도적으로 시위대를 방치했다가 ‘좌경용공세력에 의한 체제 전복 기도 사건’이라고 몰면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 거죠.”

5∙3민주항쟁이 ‘잘못된 투쟁’?

국민 대중이 함께하지 못한 인천5∙3민주화운동은 한계가 뚜렷했다. 이 대표는 “군사정권에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에 운동 형식이 과격해졌고, 이념적으로 급진화하면서 대중이 함께하기 쉽지 않았다”며 “투철한 자기희생 정신과 철저한 이론 무장을 요구하게 만든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좌절이 근본 배경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대표는 인천5∙3민주화운동 이후 운동권의 자기반성이 있었기에 87년 6월항쟁에서 국민 대중과 함께하는 투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지 말고 운동가일수록 원숙한 사람이 되자는 품성론,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조금 느슨하게 싸우면서 국민 대중과 함께하자는 대동단결론이 대세가 되면서 대오각성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나는 민주헌법, 너는 삼민헌법’ 이런 작은 것보다 민주주의를 획득해야 하는 게 더 큰 요구라는 거죠. 너와 나의 작은 차이는 잠시 접어두고 보다 큰 요구, 여기에 집중하자. 이런 반성이 광범위하게 일어나요. 이게 실현된 게 87년 6월 항쟁입니다. 이런 내부 반성이 없었다면 6월 항쟁도 아마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인천5∙3민주화운동이 6월 항쟁의 디딤돌이 된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5∙3사태가 아니에요. 5∙3민주화운동이죠.”

이번 행사는 50여 명의 청중이 참석한 가운데 포크가수 허영택 씨가 민중가요 ‘상록수’ ‘영원한 노동자’ ‘그날이 오면’ ‘그리움’을 열창하며 기타 공연을 하는 등 1시간 동안 진행됐다.

   
▲ 콘서트가 끝난 뒤 이우재 대표, 이총각 동일방직 전 노조지부장, 송경평 씨 등 청중들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 윤종훈

편집 : 박두호 기자

[윤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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