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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 잊으면 민주주의 흔들린다
[여론광장] 40주년 부마항쟁 기념행사
2019년 10월 11일 (금) 13:10:08 강찬구 최유진 기자 landkreuzer_@naver.com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자기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화석화 하지 말고 현실 속에서 살리면 좋겠습니다. 부마항쟁의 정신을 되살려 앞으로의 민주주의, 내일의 민주주의에 부산 마산이 중심지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중심지가 됐냐고 하면 ‘과거 부마 민주항쟁 덕분이다’, ‘역사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자연스레 나오지 않을까요? 부마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0일 저녁 7시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국무총리 소속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를 비롯한 8개 단체가 부마항쟁 40주년 기념 서울공연 ‘시와 노래, 강연 그리고 토크쇼: 다시, 민주주의!’를 열었다.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민주화 운동에) 어마어마한 시작과 끝을 장식한 건 부마와 광주인데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데서 토박이지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며 “(부마민주항쟁이) 올해 국가기념일이 됐고 40주년을 그냥 넘길 수 없어서 준비했지만 서울에서 이런 행사가 처음이라는데 감회가 새롭다”고 밝혔다.

   
▲ 40주년 부마항쟁 기념공연에서 류미야 시인이 정희성 시인을 소개한 뒤, 정 시인이 자작시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를 정희성 시인이 낭송했다. ⓒ <한홍구TV>

공연은 작곡가 겸 가수인 신재창 씨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노래로 시작됐다. 이 시는 정희성 시인의 작품으로 1979년 부마항쟁 당시 청년들에게 사랑받았다. 인문학 콘서트를 진행해온 가수 신재창이 노래 공연으로 행사의 막을 올렸다. 1부에서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부마항쟁을 말한다' 주제로 강연했다. 2부에서는 당시 노동자와 시민이 ‘나의 부마항쟁’ 주제로 현대사를 구술하는 시간을 가졌다. 각각 부산과 마산에서 당시 항쟁에 참여한 신희철 선생과 신정규 선생이 진행했다. 마지막 3부에서는 ‘부마항쟁의 미래’를 주제로 홍순권 부마항쟁진상규명위원장이 사회를 맡고 한홍구·오제연 교수를 패널로 토크콘서트를 했다. 이 행사는 유튜브 채널 <한홍구TV>에서 실시간 중계방송을 했다.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이 벌어진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7일 사이를 말한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바르샤바조약군에 맞서 국민적 봉기가 일어난 ‘프라하의 봄’에 비유했다. 이후 ‘봄’은 민주화를 상징하는 표현이 됐다. 한 교수는 “일본에는 없지만 한국에는 많은 게 민주화 운동”이라고 말했다.

부마민주항쟁은 부산과 마산(현 창원) 시민들이 유신독재에 항거해 발생한 대규모 민주화운동이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를 외치며 벌인 시위에서 시작됐다. 같은 달 18일에는 마산 경남대 학생들이 박정희 정권에 맞서 교정에서 벌인 시위가 시내로 번졌다. 학생 시위대에 합세한 시민들까지 이날 하루만 마산에서 288명이 경찰에 검거됐다.

‘유신체제 종식’ 항거한 시민들, 오늘 우리는?

공연이 끝난 뒤 한홍구 교수의 부마항쟁 역사 강연이 이어졌다. 한 교수는 대학 2학년 때 부마항쟁 발발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때를 회상하며 강연을 시작한 한 교수는 부마항쟁에 이은 10.26 사건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평행이론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10.26 이전에 있었던 1978년 12월 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보다 득표에서 앞서 여소야대 형국이 만들어졌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한테서 민심이 돌아섰다는 것을 보여준 신호로, 이런 분위기가 부마항쟁과 뒤따른 10.26 사태가 이어졌다는 것이 한 교수의 설명이다. 이는 2016년 말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있기 전 그해 4월, 예상을 깨고 2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당시 야당 더불어민주당이 여당에 승리한 것과 비슷하다.

   
▲ 부마항쟁 당시 사진. 한홍구 교수는 부산 일대에 언론사와 기자가 적지 않았는데도 사진이 4.19 때보다도 적게 남았다고 설명했다. ⓒ <한홍구TV>

처음 거리로 나온 부산대 학생들의 대오는 수가 적었다고 한다. 시민들의 참여는 부산대 학생들이 동학농민운동을 빌어 ‘폐정개혁안’을 낸 뒤부터 늘어났다. 학생들과 경찰은 서면로터리에서 처음 부딪혔는데, 경찰이 방패를 가지고 나오지 않아 쉽게 무너졌다고 한다. 학생과 시민들은 뒤이어 곳곳의 파출소로 들어갔고, 걸려있던 액자 중 태극기는 떼어 보관하고, 박 대통령 사진을 깨 버렸다.

이런 엄혹한 분위기에도 대규모로 이뤄진 부산과 마산의 저항은 ‘YH 사태’로 불리는 ‘여공’들의 신민당사 점거농성부터 불이 붙었다. 혹독한 근로조건에 시달리던 YH무역의 가발 제조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가자 당시 김영삼 총재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과 대치했고, 유신정권은 김 총재의 외신 기자회견을 빌미 삼아 그의 국회의원직을 박탈했다. 부마항쟁의 배경으로 꼽히는 ‘김영삼 제명 파동’이다. 

78년 국회의 변화가 곧바로 유신정권을 뒤집는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한 교수에 따르면 79년 전반기의 대학가는 매우 조용했다. 공안경찰이 캠퍼스에 너무 깔려, 집회를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때 캠퍼스에는 별명이 ‘학’이었던 사람이 많았는데, ‘학우여’라는 외침으로 집회의 시작을 알리자마자 사복경찰에게 연행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유신정권은 부산과 마산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공수부대가 진주하자 항쟁이 누그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부마사태 진압에 대한 의견차에서, 박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강경하고 과격한 발언에 김재규가 박 대통령 암살을 결심했으니 부마 사태는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항쟁이라는 게 한 교수의 설명이다. 한 교수는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의 비극적인 연관성도 설명했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도 부마항쟁을 직접 보러 왔고, 이때 보안사가 작성한 ‘부마지역학생소요사태교훈’이라는 문건에 기반해, 광주에 즉각적인 군 투입과 강경 진압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 당시 비상계엄 선포를 알리는 포고문과 신문 보도. ⓒ <한홍구TV>

한 교수는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 그 이전 해방 직후의 친일 청산 움직임, 그리고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직후를, 축구에서 보는 ‘발만 대면 되는 찬스’에 비유했다. 친일 청산이 성공했다면, 외환위기를 재벌개혁으로 이어 나갔다면, ‘탄핵 역풍’ 후 개혁과제를 밀어붙였으면 더 나은 세상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교수는 6·3 항쟁의 주역이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이후 행보 등 우리 현대사에서 저항운동을 했던 인물들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볼 때, 또 2016년의 촛불 시위가 서초동 촛불집회와 광화문 맞불집회로 나뉜 이때, 부마항쟁 40주년을 맞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부마항쟁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로 강의를 마쳤다.

삶에 상흔 남긴 부마항쟁, 그러나 즐겁게 뒤돌아 봐...

이어진 순서는 당시 부산과 마산에서 부마항쟁을 직접 겪은 분들의 증언을 들어보는 시간이었다.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 차성환 상임위원의 사회로, 부산에서 항쟁에 참여한 신희철 선생, 마산에서 항쟁에 참여한 신정규 선생이 당시 상황과 경험을 증언했다.

   
▲ 당시 집회 참가자들이 나와 부마항쟁을 증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차성환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 상임위원, 신희철 선생, 신정규 선생. ⓒ <한홍구TV>

“후유증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당시 심적인 고통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도 믿어주지를 않았습니다.”

신희철 선생은 부산에 있던 봉제공장의 생산 책임자였다. 수십 명 사원들과 함께 일하며 생활도 괜찮았다고 한다. 그러나 직장에서 잔업을 마치고 나오던 어느 날, 지나가던 시위대에 합류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다. 합류한 시위는 30여분 간 이어지던 중, 공수부대가 들이닥치자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도 공수부대원에게 쫓겨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어렵사리 찾은 다방으로 시위대 몇 명과 함께 몸을 피했으나, 이내 따라온 공수부대의 곤봉에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병원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았고, 입원도 했지만 이때 얻은 상처 후유증으로 그는 한쪽 눈이 좋지 않다. 치료차 휴직한 끝에 직장을 잃었고, 이후 서울에서 취직했지만 이전에 누리던 삶은 돌아오지 않았다.

“요새 부마항쟁이 기념일도 된다 하니 그때 생각에 젊어지는 기분입니다. 곧 마산에 내려가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하고 소주 한잔 할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정규 선생은 당시 마산 경상대 국제개발학과 3학년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쟁했던 마산의 역사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대학 입학 후 그는 머물던 하숙집에 쌓여 있던 30년치 신문을 읽으며 지난 역사에 의분을 느꼈고, 수출자유구역이던 마산에 내려온 전국 각지 여성 노동자들이 일본인 사업가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모습에 분노했다. 부마항쟁 발발 한 해 전부터 뜻 맞는 학우들과 시위를 준비하던 중에 부마항쟁을 맞았다.

당시 정권이 유포하던 마타도어와 달리 시위는 비교적 평화적이었다고 한다. 당시 마산경찰서장 최창림은 시위대가 사제 총기를 소지하고, 잦은 방화를 일삼는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는데, 마산 집회를 거의 다 봤다는 신 선생에 따르면 이는 사실무근이라고 한다. 마산에 있던 공화당 당사에 투석이 있었고, 경찰 버스를 다리 밑으로 밀어 떨어트리는 일은 있었지만, 총기나 방화는 없었다고 한다.  

경찰 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하던 신 선생은, 비록 이후 ‘블랙리스트’에 올라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었지만 자식들에게는 가끔 그때를 자랑스럽게 추억하곤 한다.

부산·마산·광주에서 민심이 폭발한 이유

“우리 역사에서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헌법 짓밟은 사람들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부마항쟁에서 고통받은 분들은 많지만 가해자는 제대로 정리된 적이 없습니다.”

‘부마항쟁의 미래’ 토크쇼에서 한홍구 교수는 “부마항쟁은 기대 이상 성과를 거뒀고, 광주항쟁은 시차가 짧지만 너무나 처절하게 패배했고 그 아픔을 갖고 우리가 80년대를 지나왔기 때문에 오히려 성공한 게 잊혀지는 그런 불이익이 있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그는 “(부마항쟁이) 사람들 가슴 속에 덜 남게 된 건 민주주의 항쟁으로 기억해줘야 할 부산지역이 안타깝게도 3당 합당하면서 보수 쪽으로 편입된 게 정당한 자리매김을 받지 못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에 사회자 홍순권 부마항쟁진상규명위원장은 ‘정치적 지형’ 때문에 부마항쟁의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데 관해 지역에서도 반성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답했다.

   
▲ 한홍구 교수는 토크쇼 ‘부마항쟁의 미래’에서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현실 속에서 자부심을 살려내야 한다고 말했다. ⓒ <한홍구TV>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고, 어떤 것도 저절로 이뤄지는 건 없다고 하는데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 민주주의가 그냥 된 게 아니고, 처절하고 치열한 싸움 속에서 이뤄졌다는 측면에서 부마항쟁을 비롯한 4대 민주항쟁을 하나하나 기억하는 건 역사를 기억하는 것뿐 아니라, 오늘을 기억하는 데도 중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제연 성균관대 교수는 “처음 부산대에서 시위에 앞장선 이들은 운동권으로 분류되기 어려운 분들인데 하루 전날 실패하고 다음날 이어지는 과정은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말했다. 그는 “이는 다른 4대 민주항쟁이나 최근 촛불집회도 그렇듯이 한국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건데, 이를 규명하는 매커니즘을 연구하면 앞으로 부마항쟁도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중 마음 속에 (민주화를 열망하는) 힘들이 작용하고 있었는데, 언제 어떻게 때를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한국 민중이 만들어내는 위대한 힘이 있고, 요즘은 시민이란 말 많이 쓰지만 부마항쟁 같은 경우 박정희는 ‘똘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와 농민뿐 아니라 도시 빈민 이런 분들이 정말 민주주의 주인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세우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부산과 마산이었을까? 항쟁이 일어난 데 지역적 특성과 관련 있는지 묻자, 한 교수는 “김재규가 이야기한 것처럼 전국적으로 다 준비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김영삼 대통령 출신 지역이라는 게 가장 중요하게 걸려있지 않나”라며 “80년에도 전국적으로 다 민주화 열망이 있었지만 광주에서 폭발한 건 김대중 대통령을 열망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지역적 해석’이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대중들이 참여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 위원장은 토크쇼 진행을 마무리하며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부마항쟁과 관련해 앞으로 할 일이 많다고 강조했다.

“진상규명위가 5년동안 활동하고 있지만, 아직도 충분히 자료 발굴이 안 돼서 부족합니다. 당시 언론통제가 심해서, 신문 자료도 다른 사건에 비해 대단히 부족한 상황이에요. 연구도 소홀한 편이고요. 앞으로 부마항쟁을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학술적 연구가 뒷받침 돼야 할 것 같습니다.”

올해부터 부마항쟁 발생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오는 16일 제40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을 첫 정부행사로 거행한다. 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더불어 한국 현대사의 4대 민주항쟁으로 꼽힌다. 부마항쟁을 제대로 기억한다면, ‘민주주의의 미래’도 좀 더 밝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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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홍석희 기자

[강찬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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