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진재연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국장

미끈하게 치솟은 유리건물들 사이로 촬영 장비를 실은 트럭과 중계 차량이 오가는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역 일대 방송가. ‘온에어(방송 중)’를 알리는 조명처럼 불빛이 명멸하는 이 거리 한 편에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2018년 1월 24일, 한 청년의 생일에 맞춰 문을 연 이곳은 방송업계 비정규직 노동자 등의 권익을 지키는 전초기지다. 20여년간 사회단체와 노동조합 등에서 일했던 진재연 사무국장(42)이 살림을 맡고 있다. 지난 6월 9일 이 센터 사무실에서 그를 인터뷰하고 25일 상암동 에스플렉스센터에서 열린 ‘이한빛 피디(PD) 3주기 추모제’에서 다시 만났다.

“방송국 안의 비정규직 문제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문제였는데, 이한빛 PD가 죽음으로써 이 세상에 드러냈어요. 이 젊은이가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생각해봤고, 생의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있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같이 해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비정규직 쥐어짜는 정규직’ 죽음으로 거부한 청년

▲ 서울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실에서 지난 6월 9일 <단비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는 진재연 사무국장. ⓒ 정소희

씨제이이앤엠(CJ ENM) 산하 방송채널 중 하나인 티브이엔(tvN)의 예능국 신참이었던 이한빛 PD는 자신이 참여한 드라마 <혼술남녀>가 자체 최고 시청률(5%)을 기록하고 종영한 다음날인 2016년 10월 25일 숨진 채 발견됐다. 입사 9개월 만이었다. 유서에는 드라마 스태프에게 ‘20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관리자 역할에 대한 죄책감이 담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배우들은 종종 ‘드라마가 시작되면 밥도 못 먹고 잠도 자기 힘들다’는 인터뷰를 한다. ‘쪽대본’ ‘생방송 드라마’ 같은 업계 용어를 시청자들까지 알 만큼 촬영 현장은 ‘시간과의 전쟁터’로 유명하다. 계약직 스태프들(제작진)은 촬영 기간 중 하루 20시간씩 휴식 없이 일하다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흥행실패로 제작비가 회수되지 않으면 임금을 떼이기도 한다.

고 이한빛 PD가 참여했던 작품은 ‘반 사전제작’으로 기획된 드라마였다. 사전제작은 드라마 현장의 노동 강도를 낮추고 작품의 질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시스템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첫 회 방영을 약 열흘 앞두고 제작진이 모두 교체됐다. 신입 조연출인 이한빛 PD는 ‘사전제작에 참여한 스태프들에게서 선금의 절반을 회수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대다수 스태프는 프리랜서라 1년 내내 일이 없었고, 받은 돈을 이미 전세보증금이나 빚 갚는 데 써 버린 상황이었다. 갑자기 일이 끊기고 쓴 돈을 토해내야 하는 스태프들도, 그걸 독촉해야 하는 이 PD도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비극 막자’ 사회단체들 의기투합

▲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역 부근 방송사 거리. 빌딩 숲의 휘황한 조명이 화려해 보이지만, 창문 너머엔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들의 한숨이 있다. ⓒ 성상민

진 국장에 따르면 고 이한빛 PD의 카카오톡 대화기록에는 학창 시절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연대투쟁도 했던 그가 이 문제로 고민한 흔적과 상사의 폭언, 부당한 지시 등이 남아있었다. 그의 죽음이 보도되면서 35개 사회단체가 모여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 대책위’를 꾸렸다. 장시간·고강도 노동, 갑질, 권위적 조직문화 등 방송가의 오래된 문제들에 대한 제보가 이어졌다. ‘개인 문제’라며 책임을 회피하던 회사도 제작환경 개선을 약속했다. 유가족은 회사에서 받은 위로금을 출연해 법인형태로 한빛센터를 만들었다.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실 벽면에 이한빛 PD의 생전 활동이 정리돼있다. 그는 대학시절 비정규직 연대 투쟁에 참여하고 학생자치를 고민한 청년이었다. ⓒ 정소희

‘500억 대작 드라마’ 스태프는 주 150시간 노동

“지금까지는 한빛센터의 존재를 알리는데 힘썼어요. 이제부터는 현장 노동자 모임에 집중하려고 해요. 현장에 계신 분들이 제보를 해 주시긴 하지만 센터와 꾸준하게 관계 맺으며 현장얘기를 하긴 어렵거든요. 초반에는 전화를 해서 (부당노동행위를) 제보해 주시는데, 다시 전화하면 그런 적 없다고 얘기하는 분들도 있어요. 현장에서 조금이라도 자기가 드러나는 걸 어려워하는데, 이게 바로 우리 현실인거죠.”

진 국장은 한빛센터가 지난 2일 열었던 ‘영상작업 미술팀 및 후반작업 노동자 집담회’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녹음팀, 조명팀, 미술팀, 분장팀, 컴퓨터그래픽(CG)팀 등 드라마 스태프는 대부분 프리랜서나 도급계약이다. 평균 5개월 정도 프로젝트 형태로 모여 촬영하고 헤어진다. 이들은 일이 끊길까봐 부조리함을 참거나, 관행이라는 이유로 장시간노동 등을 견디고 있었다.

센터는 현장 노동자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기 위해 무료 음료 등을 제공하는 ‘커피차’를 끌고 드라마 촬영 현장 등을 방문하기도 한다. 제작비 540억원이 투입돼 올 상반기 기대작으로 꼽혔던 한 드라마는 일주일에 150시간, 하루 평균 21시간을 일했다는 스태프의 제보가 들어왔다. 그들의 출근과 퇴근시간 간격은 고작 3-4시간이었다.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제작 현장의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센터를 알리고 사기를 북돋기 위해 음료를 무료 제공하는 ‘커피차’ 방문사업을 벌이고 있다.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 드라마는 고 이한빛 PD가 일했던 CJ ENM의 자회사가 만들었다. 이 드라마의 연출자는 노동조건이 문제가 되자 후반작업을 이유로 지난 5월 제작발표회에 불참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는 외침

대책위는 한빛센터 설립 전 개최한 문화제와 토론회 등에서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러나 현실에선 그 사실이 계속 외면됐다. 2017년 12월 tvN 드라마 <화유기> 촬영 현장에서 천장에 샹들리에(조명)를 달다 추락한 노동자는 하반신이 마비됐다. 지난해 여름에는 SBS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촬영스태프가 폭염 속 과로사로 의심되는 죽음을 맞았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은 두 시즌에 걸쳐 미술 스태프와 소품 담당 스태프가 뇌사와 교통사고로 숨졌다.

▲ 계약직 스태프들이 잇달아 사고를 당한 드라마들. 왼쪽부터 <화유기>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킹덤>. ⓒ 각 방송사 홈페이지

“소위 디졸브(dissolve) 노동이라고 하잖아요. 편집 기법에서 화면이 겹치는 건데, 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없을 정도로 일하는 게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고 있어요. 그걸 바꾸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말 사람이 죽을 정도의 노동인 것 같아요.”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는 표준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 노동자가 많아 다쳐도 산업재해보상을 받기 어렵다. 지난 7월부터 종업원 300인 이상 방송 사업장은 주52시간 노동제를 지켜야 하지만 스태프를 하루 단위로 고용하는 ‘일급제’를 도입해 오히려 노동시간을 늘린 곳도 있다고 한다. 진 국장은 “그래도 어느 정도 노동시간이 줄어든 효과는 있고, 한빛센터나 노동조합이 문제제기하니까 예전처럼 막 하지는 못하고 약간 눈치는 보는 수준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진 국장은 “방송노동 현장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첫 걸음은 근로계약 체결”이라고 강조했다. 드라마 현장의 모든 노동자가 표준근로계약서를 쓰는 것, 그리고 모든 개개인이 노동자성을 인정받아 제작사나 방송사와 계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 지상파 방송3사와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꾸려온 ‘드라마 제작현장 개선 4자 협의체’가 지난 6월 ‘드라마 제작환경 가이드라인 기본합의’를 체결했다. 도급 계약, 턴키 계약 등의 이름으로 스태프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지 않던 편법 대신, 계약 내용이 명시된 표준근로계약서를 사용하자고 합의했다. 그러나 아직 실무협의는 지지부진하고, 제작사들은 현장 실태조사가 미비하다는 이유로 표준근로계약서 체결을 미루고 있다.

노동착취로 만든 작품, 완성도 높겠나

“근로계약을 지키는 건 당연히 (작품) 완성도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스탭들이 디졸브 상태에서 찍는 것과 컨디션 좋은 상태에서 찍는 건 정말 다르겠죠. 현장에서도 근로계약 지키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찍는 것이 작품의 완성도와 관계있다는 인식이 퍼져야 한다고 봐요. 예술노동이라는 이유로 노동자 인권이나 현장 환경은 신경 쓰지 않던 관행과 문화를 바꾸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진 국장은 방송사들이 주요 뉴스에서 ‘표준근로계약을 맺고 영화를 제작한 봉준호 감독’을 크게 보도했지만 정작 자사 드라마에 대해서는 근로계약을 외면하거나 열악한 노동실태를 보도하지 않는 이중성을 보인다고 꼬집었다. 그는 “방송민주화 논의가 사장 및 간부 교체의 문제 뿐 아니라 방송국 내부의 노동 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까지 확장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과거 사회진보연대, 금속노조 한국지엠(GM)지부 등에서 일했던 진 국장은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도 방송가의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드라마하면 한류를 떠올리잖아요. 방송을 통해 화려한 빛을 보지만 그 뒤에 가려진 그림자가 얼마나 깊은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안전불감증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모습도 이한빛 PD의 사회적 죽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빛센터의 활동이 작은 변화의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25일 이한빛 3주기 추모제 ‘다시는’에 모인 사람들

▲ 25일 서울 상암동 에스플렉스센터에서 열린 ‘이한빛 PD 3주기 추모제, 다시는’에서 이 PD의 친구인 조연민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변호사가 고인과의 인연을 회고하고 있다. ⓒ 정소희

한편 25일 오후 7시 30분부터 서울 상암동 에스플렉스센터에서는 ‘이한빛 PD 3주기 추모제, 다시는’이 열렸다. 유가족, 친지, 노동계 인사 등 참석자 230여명은 고인을 추억하고 추모하면서 다시는 이런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고 이한빛 PD의 대학 친구인 조연민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한빛에 대한 기억이 일부만 남고 나머지는 여백으로 사라지는 것 같아 일상에서 한빛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려고 한다”며 “한빛이 유서에 남긴 것처럼 방송노동자들이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아도 되는 일터를 만들기 위해 연대하겠다”고 밝혔다. 고인의 어머니 김혜영(61)씨는 “다시는 한빛처럼 안타까운 희생자가 나오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죽는 날까지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편집 : 박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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