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로그인 회원가입
2019.8.26 월
> 뉴스 > 단비TV > TV 독립열전
     
100주년 눈앞 봉오동 전투 주역 최운산
[TV 독립열전] ⑬ 만주 무장독립투쟁사
2019년 07월 15일 (월) 18:46:08 윤종훈 기자 yoonjh2377@gmail.com

100주년 눈앞 봉오동 전투 주역 최운산

<앵커>

우리 독립운동사에 찬란히 빛나는 승전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기억하실 텐데요. 청나라, 러시아와 전쟁해 승리를 거둔 막강 일본 육군을 물리친 전투죠. 그 주역을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숨은 인물이 있습니다. 만주 무장독립투쟁사에 빼 놓을수 없는 최운산 장군입니다. 전 재산을 바쳐 봉오동,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은 물론 6번의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죠. 이제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 봉오동 전투의 숨은 주역 최운산 장군과 그 형제들 활약상을 윤종훈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다음 달 개봉될 영화 <봉오동 전투>.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맞붙어 승리한 전투를 그렸습니다. 3·1운동이란 거국적 투쟁이 불타오른 뒤 거둔 무장투쟁 첫 승리의 역사를 다룹니다. 원신연 감독의 제작일기에 봉오동 전투의 역사적 의미가 잘 묻어납니다. 억압과 탄압이 아닌 저항의 역사, 승리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영홥니다.

# 지난달 14일 제4회 최운산 장군 학술세미나 열려

지난 14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 ‘봉오동 전투 및 청산리 전투 시기 만주독립군의 전투 환경’이란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세미나에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해 발표를 진행했습니다. 만주 독립운동사에 큰 공을 세웠으나 역사에 묻혀있던 최운산 장군을 조명하는 자립니다.

인터뷰)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최운산 장군과 관련된 세미나를 국회에서 열 수 있게 돼 기쁘게 생각하고요. 석주 이상룡 선생님도 우리 대부분 국민들은 알지 못했지만 이젠 최재형 의사도 최운산 장군도 이렇게 알려지고 있는 것은 우리 간도와 만주에서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일했던 많은 분들의 역사가 이제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오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봉오동 전투 총사령관 최진동, 참모장 최운산

이곳은 봉오동 전투가 벌어졌던 중국 북간도 지역입니다. 역사 교과서들은 봉오동 전투를 이끈 총사령관이 홍범도 장군이라고 서술합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은 연대장이고 그 위에 참모장이 최운산 장군입니다. 총사령관은 최운산 장군의 큰 형 최진동 장군이고요.

인터뷰) 최성주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 최운산 장군 손녀
“총사령관이 홍범도라는 게 교과서에도 있잖아요. 그게 제일 믿을 수 있는 진실처럼 오랫동안 전해진 거죠. 홍범도 장군은 연대장이었고 총사령관은 최진동 장군이었고 최운산 장군이 전체를 운영한 참모장이었다. 이런 얘기를 하기 시작한 게 몇 년 안 되잖아요, 2~3년 밖에 안 됐으니까. 처음에 만주독립운동사를 전공한 반병률 교수님을 찾아가서 우리 집안에서 들려오는 얘기만 가지고 할 수 없으니까 일제문서나 신문이나 자료를 찾아서 갔을 때 깜짝 놀라신 거죠. 그러면서 ‘선생님, 이건 교과서가 바뀌어야 되는 얘기예요’ 그러시더라고요 처음에. 그러면서 ‘이렇게 개인이 다니시지 말고 기념사업회 설립해서 학술적으로 접근해야 해요.’”

인터뷰) 신주백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홍범도를 중심으로 한 봉오동 전투에 대한 인식 내지는 북간도 지역 독립군들의 지형에 대한 재인식이 이뤄지지 않고는 쉽지 않은 재해석, 새로운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봉오동 전투가 있었던 6월 이후 7월, 8월 독립군들의 움직임을 제대로 설명하면 청산리 전투 역사에 대한 설명은 좀 더 풍부하고 새로워지지 않을까… 국민회와 홍범도와 봉오동 골짜기에 있었던 최 씨 삼형제의 군무도독부가 결합해서 만든 것이 대한북로독군부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대규모 토지 팔아 5만원 마련…군장비 매입

최운산은 북간도의 봉오동 골짜기에 신한촌과 독립군 기지를 건설합니다. 무장 독립군대를 양성해 국내 진공의 기회를 노리기 위해섭니다. 1912년 1개 중대 병력으로 시작해 1919년 670여 명의 대한군무도독부를 창설합니다. 재정은 목장과 콩기름 공장 등을 운영하던 최운산의 몫이었습니다. 1920년 1월 최운산은 대규모 토지를 5만원에 팔아 대한북로독군부를 완전 무장시킵니다. 대한북로독군부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리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인터뷰) 최성주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 최운산 장군 손녀
“최운산 장군 재산이 그런 걸 감당할 만큼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됐던 것이지만 그랬더라도 그 재산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함께 하고 많은 독립의지들이 함께 모여서 그걸 이뤄냈고 그래서 봉오동 전투라는 일본 정규군하고 붙었던 전쟁이거든요. 대규모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고 그 정도로 준비가 됐던… 독립군들이 왜 다 봉오동으로 왔겠냐고. 거기 가면 뭔가 해결되니까 오지. 봉오동 주변에 모여든 이유가 오면 군자금이 해결되고 무기가 해결되니까. 제일 중요한 게 무기잖아요, 어디서나 전쟁하는데. 그래서 봉오동 전투가 생긴 것도 독립군이 자꾸 봉오동으로 모여들기 때문에. 밀정보고서가 많이 들어가요. 우리 독립군들이 그 자리에 계속 있는 게 아니고 국경수비대 습격전, 헌병대 습격전 이런 걸 해서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하니까. ‘독립군을 토벌해야겠다’고 (일본군이) 쳐들어온 게 봉오동 전투예요.”

# 만주 독립군 살림 책임진 김성녀 여사

가려진 최운산 장군의 활약상을 알린 사람은 부인 김성녀 여삽니다. 김성녀 여사는 남편 최운산 장군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해 진정서를 냅니다. 여기에 대포 10여 문, 기관총 수십 정, 수류탄 수천 개, 장총 천여 정, 권총 수백 정, 실탄 수만 발 등의 군장비를 최운산 장군의 사재로 갖췄다고 기록합니다.

인터뷰) 이계형 국민대박물관 특임교수
“최운산의 미망인 김성녀 선생이 썼던 진정서가 있고. 64년, 69년 12월, 75년 2월, 77년 3월 모두 네 번에 걸쳐서 보훈신청을 했는데 77년 3월에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됩니다. 77년에는 박정희 정권 당시 이 시기에 원호처라고 하는 독립부서가 만들어지면서 많은 사람이 한 105명이 포상돼요. 여기에 (최운산이) 포함돼서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 미망인 김성녀 선생님께서 토로하신 부분이 이 진정서예요. ‘왜 내 남편은 독립운동을 했는데 좀 더 인정해주지 않느냐…’”

인터뷰) 최성주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 최운산 장군 손녀
“그리고 또 저희 할머니.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역사를 찾으면서 제가 제일 새롭게 이해한 부분이에요. (가려진 부분이…) 가려졌다기보다 생각을 못 했던 부분이죠. 할머니의 협력, 할머니의 함께함, 어떻게 보면 함께 이끌어 간 공동의 역사라고 생각하는데… 공동체 의식이라기보다 부부간의 공감?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그렇게 도와줄 수 없어요. 할머니 삶을 인정해야 하고 여성독립군으로 이분을 불러드려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 독립운동 위해 8개 이름 쓰며 변장

최운산 장군은 일본군의 눈을 속이며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8개의 이름을 사용합니다. 어릴 때는 최명길, 중국 장작림 군벌에 있을 땐 최풍, 간도 제1의 거부로서 경제활동을 할 땐 최만익, 무장투쟁을 할 땐 최문무·최빈·최운산, 러시아에서 무기를 밀매할 때는 최고려, 중국 장사꾼으로 위장해 첩보활동을 할 땐 최복이란 이름을 쓰며 투쟁을 이어갑니다.

인터뷰) 최성주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 최운산 장군 손녀
“비밀리에 움직였어야 했고. 잡히고 나면 다른 이름으로 변장하고. 늘 변장하고 다녔다고. (변장이라고 하면 이름을 감춘다거나…) 모습도. 평소 다니실 때 중국 상인의 모습으로 변장해서 다니신다던지. 군대에서는 군인 복장을 하셨지만 초기에 제대로 된 군의 모습을 갖췄을 때 얘기고 후반에는 거의 숨어서 밀림 같은 삼림이라고 그러는데 삼림에 가서 비밀리에 독립군들을 양성하고 훈련하고 운영하셨기 때문에 그때는 군복을 입고 다닌 게 아니고 거의 중국 사람들 복장, 중국 상인들의 모습으로 이동하면서 지내셨던 거죠.”

인터뷰) 이계형 국민대박물관 특임교수
“(2008년) 최문무라는 분의 애국장, 그러니까 최운산은 (1990년) 애족장을 받았는데 제가 생각할 때 같은 사람인데 (최문무가) 한 등급 높게 받았어요. 최운산과 최문무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를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최운산 같은 경우 독립운동하다 보면 실제 본인을 위장하기 위해서 여러 이름을 쓰지 않습니까?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다 검색하더라도 최운산 관련해선 나오지 않습니다. 최운산의 자녀분이 썼던 보훈록에 신청서에 다행스럽게 이명의 이전에 썼던 ‘만익’이라고 하는 이름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이명이 있는데 그 이름이 ‘문무’다. 굉장히 귀중한 자료가 서술돼있어요. 그래서 최운산이 최문무다,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이 부분을 정리했습니다.”

# 일생동안 여섯 차례 옥고…1945년 7월 5일 순국

최운산은 무장 투쟁 이후 1920년대와 30년대 여러 차례 투옥과 고문을 당합니다. 그러다, 광복을 한 달 여 앞둔 1945년 7월 5일 평양에서 사망합니다.

인터뷰) 최성주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 최운산 장군 손녀
“마지막에 감옥 가신 게 1939년에 10개월 투옥당하신 거. 감옥에 가시면 나올 때는 수레에 실려 나오신대요. 고문당하고 그러니까. (투옥을 어디서?) 연변이죠. 1923년, 24년에 잡힌 건 그쪽에서 잡혔지만, 청진감옥에 가서 항소 항소한 것이 나온 게 1924년이거든요. 그때는 3년. 1920년대는 3년 감옥에 가셨던 걸 들었는데 최문무라는 이름으로 잡혔던 거고. 그 이외에도 30년대 많이 잡혀갔던 것 같아요. 39년에 잡혀가서 10개월간 고문당하고 그랬던 것이 39년에는 50대 중반 나이였거든요. 고문당하고 했던 것이 무술인이기 때문에 늘 잘 극복하시고 회복하셨다고 얘기는 들었는데 그때 그것이 약간 문제가 생겼던 것 같아요.”

# 내년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 맞이해

이 사진은 봉오동 전투 때 독립군이 판 ‘참호’입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 걸었던 선열의 얼이 스민 흔적입니다. 이제 내년이면 봉오동 전투 100주년입니다. 일본 정규군과 전투해 첫 승리를 일군 대한민국 국군역사에서 의미 깊은 햅니다. 최운산 장군은 물론 봉오동과 청산리, 만주에서 산화한 이들의 활약상을 기록해 후세에 전하는 뜻 깊은 해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인터뷰) 최성주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 최운산 장군 손녀
“당시 독립군들이 팠던 참호가 (봉오동에) 그대로 있어요. 물론 백 년 낙엽이 쌓여서 참호가 가득 차 있어서 낙엽이 흙으로 돼 있고 치워내면서 보는데 그 자리에 서면 역사가 나한테 말을 걸어와요. 굉장히 감동적이에요. 여기서 독립군들이 몸을 숨기고 저기 지나가는 일본군을 보고 있었겠구나. 그 사람들이 그때는 목숨 걸고 그 자리에 있었잖아요. 그런 긴장감 그게 느껴져요, 그 자리에 가면.”

단비뉴스 윤종훈입니다.

(영상취재, 편집 : 윤종훈 / 앵커 : 최유진)


편집 : 박지영 기자

[윤종훈 기자]
단비뉴스 전략기획팀, 기획탐사팀, 환경부 윤종훈입니다.
정보를 캐내는 꾼이 되겠습니다.
     관련기사
· ‘우리말 지키기’도 목숨 건 ‘독립 투쟁’
· 전 재산 바친 6형제 독립투쟁, 5명 순국
· “공맹은 시렁에 뒀다 국권 찾은 뒤 읽는다”
· 임시정부 100년... 삼균주의는 어디로?
· 김원봉의 부인 넘어 불꽃같은 항일투쟁
윤종훈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단비뉴스(http://www.danbi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의견나누기(0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Follow danbi_news on Twitter

단비뉴스소개기사제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27136)충청북도 제천시 세명로 65(신월동 579) 세명대학교 저널리즘스쿨대학원 413호|Tel 043)649-1557
인터넷신문등록번호: 충북 아 00192|발행인: 이봉수|편집인: 김문환|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문환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환
Copyright 2009 단비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nbi@danbi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