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독립열전] ④ 평생을 독립투쟁에 바쳤건만

독립투사 김원봉은 왜 북으로 가야했나?

<앵커>

(임지윤) 최유진 기자! 사진 속 장면이 무슨 내용인지 아시나요?

(최유진) 네. 지난 12일 대학생들이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실에서 끌려나가는 모습입니다.

(임지윤) 과거 군사 독재 시절에나 볼 수 있던 장면이 왜 펼쳐진 건지 설명해 주시죠.

(최유진) 대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면서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현재”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광복 뒤 친일파의 범죄를 조사하던 반민특위가 국론을 분열시켰다는 식의 시대착오적 발언을 한 나경원 의원에 대한 항의였죠.

(임지윤) 나경원 의원이 국가보훈처에 훈장을 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요즘 더욱 조명되는 독립운동가가 있죠?

(최유진) 네. 항일 무장투쟁단체 의열단을 만든 약산 김원봉입니다. 임지윤 기자! 백범 김구 선생 60만원, 약산 김원봉 100만원. 이게 무슨 뜻인지 혹시 아시나요?

(임지윤) 모든 것을 바쳐 평생 독립운동하신 분들이니 재산이 있을 리는 없고. 글쎄요. 무슨 의미인가요?

(최유진) 네. 침략 제국주의 일본이 두 분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기 위해 내건 현상금 액수입니다.

(임지윤) 그렇군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상징과도 같은 김구 선생보다 더 많은 현상금이 걸렸던 약산 김원봉. 이를 해석하면 우리 독립운동사에 그만큼 큰 업적을 남겼다는 것이군요.

(최유진) 네. TV 독립열전 시리즈. 이번에는 김원봉을 두 차례로 나눠 보도하는데요. 먼저 김원봉이 걸어온 독립투쟁의 삶과 광복 뒤 왜 북한으로 가야 했는지를 김원봉의 고향 밀양에서 김유경 기자가 짚어봅니다.

<리포트>

# 영화와 문학작품 속 김원봉 묘사

2015년 1200만명의 관객을 모은 영화 ‘암살’. 배우 조승우가 김원봉 역을 맡아 신출귀몰한 무장독립단체 장으로 빼어난 활약을 펼칩니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밀정’. 배우 이병헌이 김원봉 역으로 특별출연해 김원봉의 의열단 항일투쟁활동을 전해줍니다.

한국의 연기파 미남배우들이 열연했던 김원봉. 신비 속에 가린 김원봉을 1930년대 중국에서 인터뷰한 여기자가 있죠. 미국의 님 웨일즈. 그녀는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라는 책에서 김원봉을 다음같이 묘사합니다. “그는 고전적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몰랐다 …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 여인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여인들은 그를 멀리서 동경했다 … 미남으로 로맨틱한 용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영화 속 조승우나 이병헌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경남 밀양시 김원봉 생가터, 의열기념관

이곳은 약산 김원봉이 1898년 태어난 생가텁니다. 당시 서재필 중심으로 독립협회를 만들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조국의 자주독립과 근대화, 민주화를 추진해 나가던 역사적 격변기에 태어납니다. 방치되던 생가터는 지금 의열기념관이 들어섰습니다.

김원봉이 독립운동을 위해 10대 때 일찍 고향을 떠난 탓에 밀양에는 김원봉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밀양시는 이곳 생가터에 지난해 3월7일 ‘의열기념관’을 세웠습니다. 김원봉의 독립투쟁 여정은 물론 의열단의 활약상, 우리 독립투쟁사를 소개 전시하는데요. 지난 1년간 1만2천명이 넘는 시민들이 탐방하며 김원봉의 넋을 기렸습니다.

인터뷰) 경남 밀양시 주민 최은경씨

"(김원봉 선생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어요?) 네. 학교 사회 시간에 배우는데 김구보다 (현상금) 돈 더 많이 받았다... 김구보다 안 유명하다고... 그런데 그 이유가 북한 가서라고 그렇게 들었어요."

# 의열단 결성 무장 항일투쟁의 선봉

밀양 초등학교와 서울의 중앙학교에 다닌 김원봉은 1916년 19살에 중국으로 망명합니다. 3년 뒤, 3.1운동은 남경 금릉대학을 다니던 22살 열혈 청년 김원봉의 삶을 바꿔놓습니다. 그해 11월 신흥무관학교 출신 13명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조직 의열단을 만든 겁니다. 의열단을 통한 가열찬 독립투쟁에 일제는 백범 김구보다 높은 현상금을 걸었고요.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됐던 일제가 남긴 기록은 김원봉의 위상을 잘 말해줍니다. “… 겉보기에 우유부단하지만 지극히 사납고 치밀하다. 오안부적(傲岸不敵) 즉, 대적할 자가 없을 만큼의 기백과 신출귀몰하는 특기도 가졌다”

# 조선의용대와 임시정부 광복군 활동

김원봉의 육성과 실물이 등장하는 유일한 동영상입니다. 1938년 무장 군대조직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독립운동 동참을 권하는 내용인데요. 김원봉은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해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합니다. 일제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던 김원봉의 삶은 엉뚱하게 해방 조국에서 뒤바뀝니다.

# 독립군 고문하던 악질 경찰에 고문당하는 비극

이곳은 서울 중부경찰섭니다. 김원봉이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광복 뒤 1947년 치욕적인 고문을 당했던 수도경찰청 자립니다. 노덕술은 일제시대 악랄한 고문으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는데요. 일제에도 잡히지 않았던 김원봉이 경찰이 된 일제 부역자에게 고문당하며 느낀 참담함은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억울해 사흘 밤낮을 울었다는 그는 과거 중국인 비서에게 이런 편지를 씁니다. “북한은 가고 싶지않지만, 남한 정세가 매우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니 살수가 없어 시골로 간다” 친일파들이 다시 활개를 치는 남한. 독립운동가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하는 암울한 현실. 이 부분에 대한 역사학자 김삼웅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일제 강점기 김원봉과 의열단이 없었다면 우리 독립운동사는 대단히 빈약했을 수밖에 없다. 김원봉이 차지하는 역할이 대단히 크다. 김원봉이 북한으로 가지 않았으면 여운형이나 김구 다음에 암살당했을 것이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 중)

목숨 내놓고 평생을 무장 독립투쟁에 바친 약산 김원봉이 1948년 왜 북으로 가야 했는지. 좌우 이념논쟁을 떠나 우리사회가 적어도 한 독립운동가의 고뇌를 보듬어줄 만큼 최소한의 양심과 정의를 갖추었는지 되묻습니다. 단비뉴스 김유경입니다.

(영상취재 : 김유경, 윤종훈 / 편집 : 김유경, 최유진 / 앵커 : 최유진, 임지윤)


편집 : 김현균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