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풍속문화사] ㊳ 고인돌 유골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말을 요즘도 심심찮게 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같은 부류가 많은 곳으로 가야 그만큼 제 대접 받는다는 의미다. 한라산 기슭의 이국정인 정취 속 목장에서 뛰노는 말들은 언제부터 제주를 상징하는 걸까? 고려시대 1270년 고려를 정복해 속국으로 삼은 몽골이 일본 침략을 위해 말을 들여와 기르기 시작한 것이 뿌리다. 물론 우리민족 역사에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나 고구려 무용총의 기마 수렵도가 이를 잘 말해준다. 평양지역에서 출토되는 고조선 시대 마차 유물은 말의 유입연대를 더 올려준다. 우리말 ‘말’은 중국에서 ‘마(馬)’라고 발음하고 쓴다. 비슷하다. 말의 원산지가 중국일까? 아니다. 말을 처음 사육하기 시작한 것은 B.C4천년 경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 초원지대다. 어금니가 닳은 말뼈가 다수 출토되는데, 이는 재갈을 물린 사육의 결과다. 카자흐스탄 북동부는 몽골, 중국,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는 알타이 산맥지대다. 이곳을 통해 중국으로 말과 마차가 전파된 시점은 언제일까?

▲ 기마 수렵도. 고구려 무용총.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전시실. ⓒ 김문환
▲ 카자흐스탄 초원의 말. ⓒ 김문환

‘말’로 보는 문명교류와 흔적

중국 북경 교외 유리하의 서주 연도유지 박물관이나 하남성 은허 유적지 박물관은 중국으로 말이 끄는 마차가 유입된 시점을 상(商)나라(일명 은나라) 초기 B.C16세기라는 설명을 들려준다. 비슷한 시기 인도는 물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등으로도 전파됐다. 중국인들이 말을 ‘마(馬)’라고 부르는 이유는 알타이인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알타이 지역에서는 지금도 말을 우리처럼 ‘말’이라고 발음한다. ‘말’대신 ‘버스’라는 새로운 운송수단이 서양에서 들어와 ‘버스’라는 이름 그대로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불리듯 B.C16세기에도 그랬다. 문화와 문명은 그렇게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 세월이 흘러도 흔적으로 남는다. 고인돌이 몽골초원에서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유입되듯 말이다.

▲ 말이 끌던 마차. B.C8세기. 유리하 서주연도유지 박물관. ⓒ 김문환
▲ 말이 끌던 마차. B.C16-B.C11세기. 하남성 은허 박물관. ⓒ 김문환

우리 한국어는 몽골어, 터키어, 만주어, 일본어와 함께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궁금해진다. 고인돌이나 운송수단 ‘말’, 그 ‘말’을 가리키는 언어 ‘말’이 국제특송으로 배달된 게 아니라면 사람과 함께 들어왔을 텐데... 어떤 사람들이 유럽에서 중앙아시아와 몽골초원을 거쳐 한반도로 고인돌 문화를 전해주었을까? 전파의 주역들이 고인돌만 전한 채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눌러 살았다면 흔적을 남겼을 게 분명하다.

정선 아우라지 고인돌... 서양인 추정 유골 출토

강원도 정선군으로 발길을 옮긴다. 정선 아리랑의 고장, 한강의 최상류 아우라지로 가보자. 나무를 베 한강에 띄워 한양으로 보내던 정선 아리랑의 고장 아우라지에서 2006년 4기의 고인돌이 발굴됐다. 조사를 끝낸 정선군은 2020년까지 복원을 마치고 일반에 공개할 방침이다. 이제 아우라지에서는 남한강의 절경에 고인돌 선사문화도 덤으로 챙겨본다. 한반도에 4만 5천 여기나 되는 흔한 고인돌 가운데 하나인 정선 아우라지 고인돌이 관심을 끄는 이유가 뜻밖이다. 고인돌 4기 가운데 2호 고인돌에서 완벽한 형태로 출토된 대퇴골의 DNA를 서울대학교 해부학 교실 신동훈 교수팀이 분석한 결과 백인 형질로 나왔다.

▲ 아우라지 고인돌 출토 백인 추정 유골사진. ⓒ 정선군청

정선 아우라지 고인돌... 한때 인도인 설

아우라지 유골에 대해 한양대 김병모 명예교수는 “개인적으로는 이 인골의 주인공이 인도에서 벼농사 전래 경로를 따라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을 것으로 본다”고 말한 것으로 2006년 12월 6일자 서울신문은 보도한다. 김교수가 “우리말 가운데 400여개 어휘는 인도토착어인 드라비다어에서 유래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쌀은 살(Sal), 풀은 풀(Pul), 벼는 비야(Biya), 메뚜기는 메티(Metti), 농기구인 가래는 가라이(Kalai) 등이 그것으로 벼농사 기술과 함께 소개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는 게 서울신문 보도내용이다. 이는 조금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우선 드라비다족이 백인인지 불분명하다. 인도 땅으로 우리가 아는 인도유러피언 어족의 백인이 진입한 것은 B.C17-B.C16세기다. 말을 타고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언어가 산스크리트어다. 오늘날 영어를 비롯한 서양언어와 같은 뿌리다.

또 하나, 최근의 연구는 벼농사가 북인도 아셈 지방보다 중국 남부 주강 유역이나 양자강 유역에서 B.C4천년대 처음 시작됐다는 결과를 내놓는다. 울산과학 기술원(UNIST) 박종화 교수는 2017년 DNA 분석을 통해 한민족의 남방계 주역은 1만여년 전 유입됐는데, 오늘날 베트남과 대만 고산족이 우리와 가장 닮았다고 발표했다. 물론 그때는 벼농사를 짓기 전이다. 이후 인도나 중국 남방에서 누군가 벼농사를 갖고 한반도로 이주해 왔을 것이지만, 드라비다족에게 농사문화를 배웠을 산스크리트어 구사 백인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정선 아우라지 백인 추정 유골 연대인 B.C970년경은 몽골초원에서 한반도로 고인돌이 전파되던 시기다. 이점에 주목해 백인의 유입경로를 북방에서 찾는 연구가 적절해 보인다. 그와 관련해 하나의 사례를 더 보자.

제천 황석리 고인돌 백인 유골

궁금증을 안고 국립 청주박물관으로 무대를 옮긴다. 1962년 제천 청풍면 황석리에서 발굴된 고인돌 18기의 유물을 이곳에 전시중이다. 청풍면 황석리는 1985년 충주댐이 완공되면서 물에 잠겼다. 지금은 수중도시가 돼 찾을 수 없다. 황석리 13호 고인돌에서 완벽한 형태의 유골이 나왔는데, 경향신문 2003년 6월 30일자 기사를 보자. 당시 유골을 분석한 서울대 의대 나세진 박사팀이 “인골의 신장이 1m74 정도로 두개골과 쇄골 등 모든 부위에서 현대 한국인보다 크며 두개골이 단두형인 현대 한국인과 달라 흥미롭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174cm. 요즘 대한민국 남성 평균키로 봐도 크다. 더 관심을 모으는 대목은 두개골이 장두형, 즉 백인이라는 점이다.

같은 날자 경향신문은 “황석리 인골의 왼쪽 이마가 볼록하고 코가 높으며 얼굴이 길고, 결론적으로 알타이 지방에서 내려온 서양인의 형질을 포함한 사람일 것”이라는 얼굴 전문가 조용진 한서대 교수의 연구결과를 전한다. 인도기원설의 김병모 교수와 달리 알타이 기원설을 제시해 눈길을 끈다.

▲ 제천 황석리 고인돌 유골 사진. ⓒ 국립청주박물관

평창 하리 고인돌 여성 키가 160cm 장신

국립 강원대학교 박물관으로 가보자. 평창군 하리에서 출토된 고인돌 유골을 원형대로 복원해 놨다. 유골의 주인공은 여인인데, 갈비뼈 옆에 세형동검 한 자루가 부러진 채 놓였다. 세형동검은 청동기 시대 권력자나 제사장의 석곽묘나 고인돌에 부장하는 유물이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여성제사장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에서 보는 여성 제사장 무덤이 한반도에서도 존재했다는 유력한 증거다.

▲ 평창 하리 고인돌. 강원대 박물관. ⓒ 김문환

이 여성 제사장 추정 유골의 콧날이 오똑하고, 두개골은 장두형으로 백인 유형에 가깝다. 무엇보다 키가 160.5cm다. 여성으로서 지금도 중간이상 키다. 남부지방 가야 무덤에서 출토되는 성인여성 키가 145cm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당시 한반도에 살던 평균적인 한국인이 아니라는 추정에 힘이 실린다. 정선, 제천, 평창은 충북과 강원도 산간지역으로 서로 통하지 않는 교통의 오지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남한강을 이용하면 서로 가깝고 접근하기 쉽다.

▲ 평창 하리 고인돌 유골 얼굴 모습. 코가 오똑하고 장두형 백인과 비슷하다. 강원대 박물관. ⓒ 김문환

알타이의 백인 미라... 스키타이 혹은 월지족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 에르미타쥬 박물관으로 가보자. 알타이 산맥 북단 알타이 공화국 파지리크 고분에서 출토된 B.C4세기-B.C3세기 미라가 탐방객을 맞는다. 이집트식 미라는 잘 건조된 채 2천년 넘는 세월을 부패하지 않고 남았다. 미라의 생김새를 보자. 키가 크고 콧날이 오똑한 백인이다. 알타이 산맥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황인종 지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박물관에는 기마민족의 원류 스키타이라고 적어 놓았다. 인접한 중국 역사학계는 페르시아 출신 월지족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중요한 점은 백인이라는 거다.

▲ 몽골초원 흉노무덤 출토 직물 속에 등장하는 백인. 몽골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 김문환

흥미로운 대목은 알타이 지역 고대 무덤뿐 아니라 인접한 몽골초원에서 출토되는 고대 유골의 대부분이 백인이란 점이다. 몽골초원에 황인종이 산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짧다. 1천년도 채 되지 않는다. 12세기 징기스칸의 몽골족이 진입하기 전 8세기-11세기 몽골초원의 주역은 위구르다. 오늘날 중국 서부 신장 위구르 자치 지역으로 영토가 축소된 위구르 족은 백인이다. 위구르 이전 6세기-7세기 몽골초원의 주역은 돌궐족, 오늘날 터키인, 백인인 투르크다. 투르크에 앞선 훈(흉노)는 지금 그 후손이 존재하지 않아 백인여부를 정확히 알 길은 없다. 하지만, 백인용모를 유물에 남겨 놓는다. 고인돌의 전파 경로에 있던 알타이 지역과 몽골초원 거주자가 대부분 백인이었다는 점. 알타이어족인 한민족의 뿌리와 관련해서 국내 고인돌 출토 백인 추정 유골에 대한 정밀한 연구가 아쉽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로 좀 더 완벽한 DNA 분석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후속연구가 학계의 과제로 남는다.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

 편집 : 권영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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