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민족주의’와 ‘젠더’

▲ 이신의 PD

①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을 방문해, 전시에 강제 연행된 남성과 ‘위안부’를 강요당한 여성의 경험을 듣는 행사가 있었는데, 거기서 건장한 체격의 한 일본 젊은이가 갑자기 일어나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며 소리 내 울어버렸단다. (임우경, 연세대 중문학)

② 김윤식(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은 1920~30년대 서정시에서 여성적인 것이 민족의식 형성 과정의 문학적 상징으로 등장하는 현상을 지적하고, 이를 ‘피메일(female) 콤플렉스’라 명명했다. 그는 한국 근대 서정시가 현실을 거부할 때 여성적 자아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으며, 현실 거부ㆍ환상ㆍ과거지향ㆍ탈속ㆍ도피ㆍ그리움 등으로 귀착할 때 여성적 자아가 등장하는데, 여성적인 것은 절박한 상황과 어두운 현실에 항거하는 효과적 수단이라는 것이다. 특히 식민지라는 위기 상황에서 민족을 이념화하는 수단으로 한국 근대 서정시가 여성 이미지(모성, 님, 누이, 아니마)를 등장시켰다는 점을 김윤식이 지적함으로써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서지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위안부 문제를 사죄하는 일본 젊은이 모습은 당연한 것일까? 용서를 빌며 울어버렸다는 그는 잘못을 저지른 일본 군국주의와 자신을 동일시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행동을 하는 일본 여성에 관한 보고는 왜 없을까?

위안부 문제를 국가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엄밀히 말한다면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결합한 내셔널리즘에 가깝다. 한반도에서 내셔널리즘은 뿌리가 깊다. 고려라는 민족국가는 천년 가까이 한반도 전역에 안정된 질서를 유지한 기반이었다. 이 민족국가의 존재가 민족문화의 발전을 뒷받침했다. 무엇보다 15세기 초 한글 창제는 민족을 향한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한민족이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민족문화는 근대에 들어와 갑자기 ‘발명된 전통’이 아니고, 이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은 ‘상상된 공동체’가 아니다. 오래된 전통 속에 형성된 실존적 공동체다.

▲ 민족의 의미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던 한민족의 민족의식은 일본 내셔널리즘의 침략으로 강렬한 근대 내셔널리즘의 형태를 받아들이게 된다. ⓒ google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처럼 민족의 의미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던 한민족의 민족의식은 일본 내셔널리즘의 침략으로 강렬한 근대 내셔널리즘의 형태를 받아들이게 된다. 근대 내셔널리즘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경쟁' 지향성이다. 근대 이전 사람들은 인근의 다른 민족을 '우리와 다른 사람들'로 인식하면 됐지, 꼭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로 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근대 내셔널리스트는 다른 민족을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나 열등한 존재로 규정해야 직성이 풀린다. '우승열패'의 근대적 인간관이 민족의식에도 적용된 것이다.

이는 젠더 역할에도 강요된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기는 가부장제가 강간을 남성의 재산권 침해로 받아들이듯, 민족 담론은 위안부 문제를 대개 민족 사이의 유린으로 받아들인다. 이 민족 담론에서 ‘국민’의 전형으로 삼는 모델이 ‘남성 주체’임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피해자인 여성 개인의 상처와 고통은 민족의 처녀성 침탈이라는 상징으로 치환된다. 한국 지식인은 한국 근대시의 서정성을 ‘피메일 콤플렉스’로 명명하면서 실존적 여성 젠더보다 민족 순결을 강조했다. 가해자 쪽에서도 내셔널리즘 담론에서 여성 젠더는 배제된다.

민족 담론에서 실존적 여성 젠더는 이처럼 괄호 속 존재로 숨겨진다. 여성 가해자도 피해자도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남성주의적 민족주의 담론은 다시 여성과 여성의 순결에 규범을 부과하고 여성을 가부장적 질서에 귀속시키는 효과를 얻는다.

오늘날 세계의 정세 변화에 비추어볼 때, 근대 내셔널리즘의 경쟁적-독선적 세계관을 벗어날 필요는 분명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내셔널리즘이 아니라면 위안부 문제를 국가가 해결해야 할 의무는 없다. 이렇듯 현실 사회는 하나의 이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자본주의에도 사회주의적 복지가 적용되고, 개인주의에도 공동체적 의무가 부여된다. 어떤 이론도 완전하지 않으므로 공존은 가능하다. 어려운 문제지만, 근대 내셔널리즘의 거품을 빼면서 자연스러운 수준의 민족주의를 살려내는 것이 세계적 변화 앞에 마주친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조현아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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