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폭력'

▲ 박경배 기자

’날 생각해 주세요.’ 개여뀌의 꽃말이다. 이삭 모양의 꽃대에 붉은 좁쌀 같은 꽃잎들이 우수수 달린 개여뀌를 가을에는 쉽게 볼 수 있다. 너무 흔해서 사람들은 잡초려니 하고 지나친다. 소마저도 먹지 않는 개여뀌는 자생력이 뛰어나 열악한 조건에서도 잘 자란다. 홀대에도 불구하고 개여뀌는 자세히 보면 참 아름답다. 좁쌀만 한 빨간 꽃봉오리가 때가 되면 부풀어 올라 자그마한 분홍빛 꽃잎을 바람에 나부끼는 개여뀌.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스며 나오는 꽃이다.

▲ 붉은 좁쌀 같은 꽃입들이 우수수 달린 개여뀌. ⓒ Flickr

독일 철학자 막스 셸러는 <사랑과 인식>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식물이 하나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되뇌며 모든 꽃들에게는 타인의 인식이 곧 구원의 손길이라고 했다. 개화(開花)는 번식을 위한 식물의 몸부림이다. 벌과 나비, 바람 없이 세대를 거쳐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스스로 충만하다면 타인의 사랑은 필요하지 않다. 아름다운 꽃은 ‘결핍의 부산물’인 셈이다.

인간의 경우 결핍의 부산물은 식물과 달리 아름답지 않다. 2008년 2,232쌍의 아동과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진행된 연구결과에 따르면 인간의 폭력성은 성장기 정서적 결핍에 근원한다. 김붕년 서울의대 정신과 교수에 따르면 학교폭력 가해 학생의 폭력성은 어린 시절 가정폭력 피해를 보거나 경제적 또는 사회적 환경에 의한 정서적 결핍으로 충동성 조절능력이 결여되면서 생긴다. 근래 발생한 ‘부산 여중생 폭행’ 가해자들 중 일부도 충동조절장애 판정을 받아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고 밝혀졌다.

달리 보면 학교 폭력 가해자들의 폭력성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진화심리학자들은 폭력을 아무런 이유 없이 임의로 발발하는 질병이 아니라 자연선택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심리 기제의 산물로 봤다. 음식이나 짝짓기 기회와 같은 한정된 자원을 두고 같은 개체들끼리 경쟁을 벌일 때 ‘도구적 폭력’을 가함으로써 경쟁자를 물러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 청소년 폭행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관심이 필요하다. ⓒ Pixabay

잇달아 벌어지는 청소년 폭행 사건으로 소년법 개정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 말고 강릉과 전주에서도 어린 학생들이 동료한테 잔인한 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형법 9조는 만 14세 미만은 형사미성년자로서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 소년은 소년법에 따라 전과 기록이 남지 않은 보호처분만 받는다. 미성년 범죄자들의 범죄는 재범을 넘어 반복 범죄 그리고 성인 범죄자로 이어진다. 실제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에 따르면 소년 범죄자의 67%는 성인이 되어서도 범죄자가 된다.

그런데도 소년법 개정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폭력은 결핍의 부산물이다. 비난의 화살이 꽂히는 아이들 또한 심각한 상처를 받은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순한 규정이나 처벌이 아니라 그들의 처지와 시선에서 삶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꽃들처럼 타인의 인식이 그들에게는 구원의 손길이다. 결핍은 그것이 채워질 때 치유된다. 그렇지 않으면 소년범이 성인범죄자로 크는 고리를 끊을 수 없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이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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