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문산책] 탄핵

▲ 박상연 기자

궁금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나무숲’이. 좀처럼 국민이나 관료와 소통하지 않지만, 세 끼 중 두 끼를 혼자 하며 여론을 챙기는 날이 많다던 대통령은 답답하지 않을까. 직무를 잘 수행하는지, 혹시 실수하는 건 없는지 주변 이야기를 듣고 싶을 만도 한데 그는 지조를 지켰다. 많은 이들이 그 지조를 나무랐다. 남의 생각을 듣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라며 그의 불통을 꾸짖었다. 걱정됐다, 내 나라가. 왕관의 불통은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의 무게를 견뎌낼 수 없다는 증거 아닌가. 준비되지 않은 자의 무력함을 달래줄 익명의 소통 무대, ‘대나무숲’에 대한 확신도 생겼다.

박근혜의 왕관은 사실 종잇조각이었다. ‘청와대 입성 후 가족과의 교류마저 끊고 지낸 외로운’ 대통령에게 ‘오랜 인연’ 최순실이 ‘대나무숲’이 됐다. 독재 철권의 아버지,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죽음의 어머니, 정략적으로 접근한 사이비 교주까지, 박근혜 대통령 청춘에 드리웠던 그림자를 품을수록 ‘대나무숲’은 더욱 무성해졌다. 빽빽한 숲의 암흑 속에서 박 대통령과 최순실의 위치가 바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때때로 대통령은 최순실의 손발이 되고, 최순실은 대통령의 왕관을 썼다. 언론사 손에 들어간 태블릿PC에서, 검찰이 압수한 문고리 3인방의 핸드폰에서 숲속 범죄가 하나둘 밝혀졌다. 정치검찰마저도 최순실을 기소하며 대통령을 공모자로 피의자 수사 대상에 올렸다.

검찰이 박 대통령을 피의자로 지목했지만, 검찰을 불신하는 시선은 여전하다. 피의자 최순실이 귀국한 뒤 하루 동안 자유롭게 풀어줘 증거인멸과 재산 빼돌리기 시간을 벌어준 검찰의 배려가 기소 순간에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숱한 취재기자들의 질문에서 나오듯 최순실에게 뇌물혐의를 적용하지도 않았다. 형량이 많고, 재산 몰수가 가능한 뇌물 혐의를 비껴간 검찰 수사. 대나무 숲의 진실을 파헤칠 공은 이제 국회에서 통과된 특검 몫으로 넘어갔다. 특검은 2주 연속 100만 촛불 집회를 벌이며 퇴진을 외치는 민심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수사는 이제 서막을 올렸을 뿐이다.

▲ 지난 19일, 광화문 광장에 모여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시민들. ⓒ 박기완

19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당시 재판부에 제출할 항소이유서를 직접 썼다. 그는 항소이유서에서 “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존귀”하다며 읽는 이의 심금을 울렸다. 0.7평 남짓한 독방, 5·16 쿠데타 이후 불통의 군사정권 속에서 숱한 민주투사들이 외쳤던 민주주의를 오늘날 다시 새겨본다. 구성원 모두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는 존귀한 국가. 76,000여 평의 청와대에 살면서도 5천만 국민의 일상을 방해하고, 계급의식과 박탈감, 무원칙으로 국가를 덧칠한 대통령, 단 한 번이라도 국민과의 소통을 보고 싶다. 부디 하루빨리 버거운 왕관을 벗어달라는 국민 열망과의 소통.


세명대 저널리즘 스쿨은 1학기에 [서양문명과 미디어 리터러시], 2학기에 [문명교류와 한국문화]의 인문교양 수업을 개설합니다. 매시간 하나의 역사주제에 대해 김문환 교수가 문명사 강의를 펼칩니다. 수강생은 수업을 듣고 한편의 에세이를 써냅니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에다 다양한 생각을 곁들여 풀어내는 글입니다. 이 가운데 한편을 골라 지도교수 첨삭 과정을 거쳐 단비뉴스에 <역사인문산책>이란 기획으로 싣습니다. 이 코너에는 매주 금요일 오후 진행되는 [김문환 교수 튜토리얼] 튜티 학생들의 인문 소재 글 한 편도 첨삭 과정을 포함해 실립니다. (편집자)

편집 : 송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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