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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울수록 기억해야 할 역사 현장
[지역∙농업이슈] 순천왜성으로 떠난 다크투어
2016년 05월 08일 (일) 18:50:45 박진우 기자 danbi2990@gmail.com

지난달 1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의 [지역∙농촌문제세미나] 참가자들이 전라남도 순천의 왜성을 찾았다. 목적은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의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블랙스팟(Black Spot)’, ‘사거관광(Thanatourism)’이라고도 불리는 ‘다크투어리즘’은 죽음∙재난 관련 장소 또는 전쟁이나 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방문해 회상하고 반성하기 위한 관광이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9.11 테러가 발생한 미국의 그라운드제로가 대표적 예다. 400만 명 이상 희생자를 낳은 아우슈비츠에는 매년 100만 명 넘게 방문하고 그라운드제로에도 9.11테러기념관과 광장이 꾸며져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순천의 인적 드문 변두리에 지어진 왜성은 어떤 아픔을 간직하고 있을까?

   
▲ 하늘에서 내려다본 순천 왜성. 왼쪽 가장 높은 축대에 천수각이 서 있었다. 이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에는 바다에 접해 있었으나 지금은 주변이 매립된 상태이다. ⓒ <한겨레> 최상원 기자

남해안으로 몰린 고니시군의 최후거점

1592년(선조25) 4월, 1차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8천 명의 왜군, 7백여 척의 병선이 부산포에 쳐들어왔다. 당시 조선은 지휘관이 병역을 면제해주고 대가를 받는 풍조가 만연했고 군적도 겉치레로만 유지돼 군사력이 크게 뒤떨어진 상태였다. 일본군은 무서운 속도로 북진했다. 같은 해 5월 한양이 점령당하고 6월에는 선조가 국경지대인 의주까지 피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9차례에 걸쳐 침략한 일본군의 병력은 20만에 이르렀다.

다행히 수군은 우세였다. 일본군은 애초 남해와 서해를 돌아 육군에게 물자를 조달하면서 물길로 북상하려 했는데 작전에 차질이 생겼다. 이순신 함대가 장악한 해상권과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은 불리했던 전세를 역전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 해안에서 성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조선군. 식별을 위한 태극 깃발이 보인다. ⓒ 정왜기공도권

1593년 음력 8월, 이순신의 활약과 명나라군의 개입에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은 강화를 제의했다. 조선과 달리 더 이상 피해를 원하지 않았던 명나라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조선의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줄 것 등 일본의 비현실적인 요구로 강화가 결렬됐다. 이에 1597년 14만의 일본군이 다시 침입했다. 일본군의 거짓 정보와 아군의 모함에 이순신이 파직당하자 원균이 이끄는 수군은 대패했다. 그러나 복직한 이순신의 함대 13척은 울돌목에서 일본 수군 130여 척을 격파했다.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한 일본 육군은 보급선이 끊겨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다. 보급로가 차단되고 조명연합군의 공세에 밀린 일본군은 한반도 남쪽에 고립됐다.

   
▲ 여러 겹으로 축조된 순천왜성의 성벽. ⓒ 박진우

조선군을 막기 위해 조선인이 쌓은 왜성

주둔이 길어질 거라 판단한 왜장들은 수비를 위한 성을 쌓기 시작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 왜성,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 왜성,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 왜성 등 8개의 왜성을 쌓기 위해 조선 백성들이 강제로 동원됐다. 여러 겹의 벽으로 축조된 왜성을 함락하기 위해 조명연합군은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을 편성하고 수군이 이를 받치는 형태의 사로 병진 작전을 펼쳤다. 사방에서 순천 왜성, 사천 왜성, 울산 왜성을 동시에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 순천 왜성에서 벌어진 조명연합군과 왜군의 전투. ⓒ 정왜기공도권

육상 전투는 쉽게 끝나지 않았지만 수상 보급로가 막힌 일본군은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설상가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 조정은 일본군의 퇴각을 명령했다. 이순신의 수군은 ‘진린’ 지휘 하의 명나라 수군과 함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11 월 노량에서 일본 전선 3백여 척과 해전을 벌였다. 일본의 함선 2백여 척을 격침하고 최후의 승리를 거뒀지만 이순신은 왜병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만약 왜성을 쌓기 전에 육군이 승리했다면, 명나라 제독 ‘유정’이 순천 왜성에 숨어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을 거절했다면 노량해전은 벌어지지 않고 이순신은 죽지 않았을지 모른다.

일본의 전통적 성곽 축조법 적용

정유재란 말기 ‘고니시 유키나가’에 의해 3개월 만에 지어진 순천 왜성은 일본의 전통적인 성곽 축조 방식이 그대로 적용됐다. 정치적 지배 거점의 역할이 아닌 전시 상황에서 방어에 중점을 두기 위해 평성이 아닌 산성으로 지어졌으며 병력 이동과 물자 보급이 원활하도록 바다에 인접하여 축조된 것이 특징이다. 왜성의 구조는 성벽과 호구(성문), 성벽 내•외부에 조성된 굴(해자)과 목책, 성벽 안쪽의 마당인 곡륜과 건물지로 구분된다.

   
▲ 방어에 용이하도록 성벽 안쪽에 설치된 계단. ⓒ 박진우

천수각

천수각은 일본의 전통적인 성 건축물에서 가장 크고 높은 누각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2~5층이며 천수각 아래를 천수대가 받치고 있다. 순천 왜성에는 현재 천수대만 남아 있다. 그러나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황실의 종군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을 보면 천수각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천수 위에 ‘오층망해루’라는 글씨가 쓰여있어 5층 높이의 천수각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 명나라 황실 종군화가가 묘사한 순천 왜성의 천수각. ⓒ 정왜기공도권

붕괴를 막기 위해 안쪽으로 기울여 쌓은 성벽

조선의 읍성과 진성은 대부분 성벽을 수직에 가깝게 쌓고 평면 형태가 직선 또는 곡선이다. 반면 왜성의 성벽은 수직이 아닌 사선으로 기울여 쌓으며, 평면 형태도 직선 또는 곡선이 아닌 굴절된 형태를 이룬다. 성벽의 경사 각도는 60~70°를 이루며, 굴절부는 일본 성곽 용어로 ‘횡시(橫矢)’라 하여 전투 시 방어 또는 공격의 용이성을 고려하여 여러 형태로 축조된다. 일본에서는 돌로 쌓은 성벽을 ‘석원(石垣)’ 이라고 부르는데, 경사면을 따라 조성된 성벽은 ‘수석원(竪石垣)’이라 하여 구분한다. 수석원은 왜성에서 확인되는 특징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일본성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임진왜란 이후 축성된 일본성에서 일부 확인되고 있어 전쟁 당시 왜성을 쌓았던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 왜성은 사선으로 기울여 쌓아 올려 안정감이 있다. ⓒ 박진우

왜성에도 우리나라 성곽의 해자와 같은 시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일본에서는 해자와 같은 시설을 ‘굴(堀)’이라 하여 그 형태와 축조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한다. 내부 채움 물질, 설치 방향, 단면 형태를 기준으로 분류하는데, 채움 물질로는 물로 채우는 수굴(水堀), 진흙으로 채우는 니전굴(泥田堀), 아무것도 채우지 않는 공굴(空堀)로 나뉘고 설치 방향에 따라서는 횡굴(橫堀), 수굴(竪堀), 무굴(畝堀)로 나뉜다.

순천 왜성에는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굴을 조성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현재는 율촌산업단지 조성을 위해 매립되면서 그 흔적이 얼마 남지 않았다.

   
▲ 굴(해자)의 일부는 매립되어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일부는 연못으로 남아있다. ⓒ 박진우

방치해선 안 될 역사적 의미

순천 왜성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고적으로 지정됐지만 광복 후 우리 정부는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으로 여겨 방치한 감이 없지 않다. 정부는 62년 사적 제49호로 지정할 때 승주 신성리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96년에는 일제강점기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 과정을 거쳐, 97년 사적에서 해제했다. 다시 98년에야 전남도가 도기념물 제171호(순천 왜성)로 지정했다. 순천시는 2015년 순천 왜성 보수사업을 위해 2억원의 예산을 편성했으며 2016년 4월 현재 용역업체를 통해 일부 성벽을 보수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 천수대에 오르고 있는 관광객. ⓒ 박진우

정유재란의 막바지인 1598년 9월부터 두 달간 육∙해상에서 전개된 왜교성 전투는 동북아 3국(한•중•일)이 맞붙은 유일한 육•해상 전투다. 이는 각종 문헌과 그림으로도 기록이 남겨져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크다. 또한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과 일본의 토목건축 양식이 미묘하게 변화하여 토목건축사로서 의의 또한 값지다. 비록 일본군을 위해 지어졌지만 임진왜란에서 이룬 뼈아픈 승리가 새겨진 문화유산을 소중히 보존해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대산농촌재단과 함께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이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편집 : 강민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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