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봄’

▲ 장환순 기자

그날따라 부지런을 떨었다. 동네 닭들이 울기 전에 눈을 떴고, 일찌감치 마당에 나가 개밥도 줬다. 시내 나가는 날이라 들뜬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버스 타는 걸 유난히 좋아한 어린 시절이었다. 한적한 시골에 사는 아이에게 시내 나들이는 큰 이벤트였다. 제과점 빵을 맛볼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장난감을 손에 쥘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침부터 불고기가 밥상에 올라 신나게 두 그릇을 해치웠다.

누나는 밥을 반쯤 남기고 지난 밤 정리하다 만 짐을 마저 쌌다. 배낭이 금세 부풀었다. 엄마는 자꾸 무언가를 더 넣으려 했고, 누나는 괜찮다며 사양해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작고 마른 누나가 커다란 배낭을 멘 모습은 낯설고 어색했다. 차 시간에 늦지 않으려 서둘러 집을 나섰다.

매화가 많이 피기로 유명한 동네였다. 그날도 카메라를 든 상춘객들이 눈에 띄었다. 봄을 만끽하는 그들 사이를 지나는 우리가 오히려 외지인 같았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누나는 정류장으로 가면서 연신 재채기를 했다.

해마다 찾아오는 계절이지만, 봄은 누구에게나 같은 풍경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모두의 봄에 꽃이 만발하는 것은 아니며, 누구나 즐겁게 봄나들이를 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어떤 이에게는 봄이 겨울보다 시린 계절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몰랐다.

▲ 겨우내 얼었던 땅이 풀리고, 꽃봉오리가 힘겹게 망울을 터뜨리는 봄.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풍경은 아닐 수 있다. ⓒ flickr

그날은 누나가 사원 기숙사에 입주하는 날이었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공부를 곧잘 했지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착한 맏딸은 혼자 생계를 책임지는 엄마에게 공부하고 싶다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스무 살, 누나의 봄날은 예상치 못한 풍경이었다.

일터가 있는 곳은 경기도 외곽 도시였다. 터미널에서 시외버스로 두 시간을 가야 한다고 했다. 소설책과 시집을 아끼던, 국어 시간을 좋아하던 여고생이 작업복을 입으러 가는 길. 꽃망울 터지는 그 좋은 봄날, 누나는 대학캠퍼스 대신 일터로 향했다.
 
불평 한마디, 아쉬운 내색 하나 없었다. 누나는 삶의 무게를 아무런 저항 없이 온전히 짊어졌다. 누나는 그 봄날을 어떤 심정으로 견뎌냈을까? 누나에게도 다른 꿈이 있었을지, 있었다면 무엇이었는지 나는 지금까지도 묻지 못했다.

터미널에서 누나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갈 때까지 엄마와 나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집으로 오는 길, 엄마는 말이 없었다. 나는 옆에서 소보로빵을 열심히 먹어댄 기억만 선명한데, 누나의 눈에 비친 그 봄날은 어떤 빛깔이었을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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