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연민’

▲ 이청초 기자

매년 봄이면 ‘벚꽃’ 나들이 인파로 붐비는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공원. 그곳에서 지난달 16일 저녁 열릴 예정이었던 조그만 모임이 취소됐다. 꽃피는 봄도 맞이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송파 세 모녀에게 지역 주민들이 49재를 올리기로 돼있었으나 너무나 끔찍한 세월호 침몰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49재는 망자가 다음 세상에 좋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의식이지만, 이승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나 가슴 아린 사람들이 그저 연민의 감정을 삭이는 의식일 따름인데 그것마저 치르지 못한 것이다.

지난 2월 자살한 세 모녀는 나에게도 이웃이었기에 더 충격적이었다. 바로 옆에서 소리 없이 발버둥치며 살았을 그들을 떠올리니 안타까우면서도 주변에 무심했던 나를 돌아보게 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그들을 향한 ‘연민’이었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현실에 분노하면서도 그 이상 노력하지는 못했다.

독일 철학자 니체도 이런 연민을 경계했다. 그는 “신은 죽었다, 연민으로”라고 외쳤을 만큼 연민이야말로 고통을 더욱 증대시킬 뿐이라고 했다. 들뢰즈도 <니체와 철학>을 통해 “연민은 영(zero)에 가까운 삶에 대한 관용”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행동 없는 ‘연민’은 고통받는 자에게 이를 이겨낼 힘을 약하게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송파 세 모녀 사건’이 국민적 연민을 불러일으켰고 그 연민이 정치권의 기초생활보장법 개편으로 이어지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가 내세운 기초생활보장과 관련 공무원 채용 확대도 분명 복지 사각지대를 찾아내고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말과 정책이 ‘연민’으로 보이는 이유는 완전히 동력을 잃은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 때문이다. 복지체계를 개편하겠다는 정책이 당장의 복지 사각지대를 찾아낼 수 있을지라도 또 다른 양태의 복지사각지대는 곳곳에 널려 있다. 소득과 재산이 없는데도 10년 된 봉고차가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 수급대상에서 탈락한 2009년 ‘봉고차 모녀 사건’은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이라는 더 비극적 형태로 재현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떨쳐버리는 길은 절대빈곤층을 빈곤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규제완화를 뼈대로 하는 박근혜 정부의 경제혁신3개년계획은 ‘연민’만으로 서민을 바라보면서 계층상승의 사다리마저 걷어차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박근혜 정부는 규제개혁토론회에서 몇몇 서민과 중소기업주들을 불러놓고 국민적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규제개혁에는 중소상인 등 서민들의 ‘손톱 밑 가시’를 빼주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규제의 비용과 편익을 비교하면서 신중하게 규제를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의료 부문 규제완화를 예로 들면 경제활성화에 기여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대기업의 의료산업 독점과 병원비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해야 했던 송파 세 모녀 중 첫째 딸의 사례만 보아도 비참한 결과는 쉽게 내다볼 수 있었다.

또 복지재정 확충을 위해 내수경기 활성화를 외칠 수야 있겠지만 현재 나온 정책을 보면 대부분 대기업에 혜택이 집중되는 것들이다. 이명박 정부가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풀면서 ‘낙수효과’를 장담했지만 실효가 없다는 게 입증됐다. 선박 분야 규제완화는 세월호 침몰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경제민주화’는 두 바퀴를 달아야 온전하게 굴러갈 수 있다. 재벌개혁 등 시장에 공정한 규칙을 적용하는 것과 사회안전망을 촘촘하게 하는 등 양극화에 제동을 거는 일이다. 이 두 바퀴는 한 축으로 연결돼 있어 어느 하나만으로는 잘 굴러갈 수 없다.

대책 없는 연민은 니체가 말한 것처럼 고통을 증대시킬 뿐이다. 세월호 침몰에서도 그저 연민의 대상이었던 못 사는 사람들과 그 아들딸들이 많이 희생됐다. 이번에도 연민만이 부각되다가 끝난다면 대참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환경∙안전∙토지주택 관련 정책은 규제를 더 강화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정책기조를 여전히 규제완화에 두고 있으니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연민을 넘어선 측은지심(惻隱之心)일 터이다. 측은지심은 인(仁)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인(仁)은 남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남에게 어질게 행동하는 것이다. 공자는 인(仁)을 정치이념으로 삼고 이것을 덕(德)의 기초로 확산시켜 실천하면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연민이 국민적 측은지심으로 고양되어 "이번에는 바꾸고야 말겠다"는 실천의지로 결집되기를 고대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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