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백수들의 잡지 ‘월간잉여’ 최서윤 편집장

해진 후 일어나 해 뜨는 걸 보고 잠든 적이 있는가. 이 세상에서 ‘나’란 존재를 달랑 들어내도 먼지 한 톨 일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은? 기름 낀 얼굴, 떡이 진 머리, 트레이닝복 바람으로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난 잉여다’를 되뇐 경험은?

청년 실업자가 넘치는 사회, 어디서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쓸모없는 인간’ 혹은 ‘남아도는 인간’이란 의미의 ‘잉여’를 자처하는 젊은이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이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잉여들의 이야기를 쓰는 잡지’까지 등장했다. 지난해 2월 창간돼 최근까지 13호를 낸 <월간잉여>다. 이 잡지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으로, ‘잉집장’이라 불리는 최서윤(27·여)씨를 지난 27일과 지난 6월 7일 <단비뉴스>가 만났다.  

▲ 잉여의, 잉여에 의한, 잉여를 위한 잡지 <월간잉여>의 잉집장 최서윤씨. ⓒ 최서윤

탈락에 지친 기자지망생에서 ‘잉집장’으로 

최씨는 약 1년 반 전까지만 해도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던 기자지망생이었다. 서울 소재 사립대를 졸업한 뒤 토익(TOEIC)과 한국어 등 각종 공인시험을 치르고 논술과 상식공부를 하며 취업을 준비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종합편성채널 출범으로 언론사 입사 기회가 꽤 넓어졌던 시점이었는데도 줄줄이 고배를 마시자 ‘이렇게 잉여가 되나?' 하는 불안감이 커졌다. 그랬다가 ’까짓것 날 받아주지 않는다면 내가 차리지 뭐' 라는 오기가 생겼다. 그리고는 내친김에 혼자서 잡지를 만들었다. 

“많이 뽑는데도 안 되니까 실력에 대한 의심도 하게 되고, 그렇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 못하고 살아야 하냐는 오기도 생기더라고요. 새해가 되면서 그런 생각이 더 확고해졌고, 뭔가 새로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씨는 ‘잉여’가 곧 자신이기도 하고 잘 아는 이야기이니, 잉여들의 현실을 다룬 잡지가 어느 정도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매호 1000부 이내로 인쇄하는 <월간잉여>는 약 80페이지 분량으로, 독자위원 6명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사실상 최씨 혼자 제작한다. 재수생, 취업준비생 등으로 구성된 독자위원들은 비정기적으로 모여 발간된 잡지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다음 호 편집 방향 등에 대해 이메일로 조언하기도 한다.

글은 이메일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투고를 받고, 표지나 내부디자인도 대부분 최씨가 직접 하거나 독자의 재능기부를 받는다. ‘스스로 잉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투고의 길이 열려 있다. 잡지 게재 여부는 최씨가 직접 답장으로 알려주며, 원고료는 따로 없고 채택이 되면 글이 실린 <월간잉여>를 보내준다. 

▲ 스스로 잉여라는 정체성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월간잉여>에 글을 쓸 수 있다. ⓒ 최서윤

“잡지에 실리는 글들은 대부분 1인칭 시점으로, 개인의 경험이 디테일하게 들어간 것들이에요. 단순히 ‘잉여스러운’ 글보다 ‘잉여로운 삶 속에서 느낀 통찰’을 높이 평가하죠.”

최근 발행된 13호의 경우 취미로 서울의 낙서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사람의 이야기인 ‘낙서의 부탁(글 도인호)’, 지방에 머물며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모색하고 있다는 내용의 ‘지방잉여의 생활(글 여수청년)’ 등이 눈길을 끌었다.   

거창한 목표는 없다,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

<월간잉여>는 지난 4월 발간한 12호부터 격월간으로 바뀌었다. 매월 인쇄비 등 약 100만원가량의 제작비를 조달하는 게 어려워서다. 까페와 일식주점, 학원 등에서 최씨가 아르바이트를 한 돈과 외부기고료 등을 다 쏟아 부어 제작비를 대지만, 1부당 4800원에 팔리는 잡지의 유료부수가 몇백권 수준에 불과해 겨우 적자를 면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9월호와 10월호의 휴간을 결정하고 일명 ‘300잉 클럽’을 모집하기도 했다. 300명에게서 2만원씩 후원을 받으면 11월호부터 창간 1주년 호까지 발간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300잉 클럽’은 목표를 다 채우지 못하고 234명을 모집하는 선에서 마감됐다. 재정적으로 이렇게 힘겹지만 ‘유머와 휴머니즘이 결합된 잉여의 삶을 잘 담고 있다’, ‘같은 잉여로서 공감이 되고 위로를 받는다’ 등의 독자 평가는 힘이 된다고 한다.

지난해 2월 <한겨레>를 통해 <월간잉여>의 창간 소식이 알려지고, ‘20대를 대변하는 잡지’ 등으로 부각되면서 최씨는 최근 한 출판사와 단행본 계약을 맺고 올해 안에 책을 낼 계획도 갖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과도한 기대가 부담스럽다고 한다.

“잉집장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부담감이랄까. 뭔가 사회에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메시지를 던져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망하거나 그만둬서도 안 될 것 같고…. 그런 기대나 요구들이 느껴질 때 정신적으로 힘이 들어요. 저는 행복하고 건강하게 적당한 나이까지 살다 죽는 게 인생의 목표예요.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월간잉여>가 보탬이 됐으면 하지만, 성공에 대한 개인적 욕망도 별로 없고, 뭔가 20대를 대표하는 것처럼 비춰지는 건 부담스럽습니다.”

젊은 세대 몰아세우기보다 이해하는 시선 필요

최씨는 잡지를 창간할 시점에 ‘재밌고 신나는 일에만 몰두하면서 현실과 시스템에 대한 개혁의지가 없는 20대’를 비난하는 ‘20대 개새끼론’등의 사회적 비판이 한창이었던 것과 관련, ‘세대별로 자라온 환경과 경험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성세대는 사회와 개인이 같이 성장하면서 미래에 대한 기대가 가능한 시대를 살았고, 우리는 어떤 미래에 대한 기대도 가질 수 없는, 이미 성장해 있는 시대에 놓여 있으니까요. 기본적으로 삶에 대한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세대간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최씨는 <월간잉여>가 사회개혁 등 대단한 것을 지향하진 않지만 ‘많은 잉여들이 모여 일상의 소소한 생각과 깨달음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라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읽을 때 재미있고, 읽고 나면 현시창(‘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인걸 알면서도 묘하게 희망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잡지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온라인에서 모일 수 있는 커뮤니티 ‘여잉추(여기 잉여 추가요/ingchu.com)’도 만들어 대화공간을 확장했다.

▲ 잉집장은 '소외된 개인'들이 공감하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잡지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 최서윤

“지금의 잉여 문제에는 개인적인 노력과 능력의 부족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과잉된 개개인에 비해 모자란 의자수가 원인이라고 봐요. 이런 세상에서 죽지 않고 버티기 위해선 나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동료애, 서로 도울 수 있을 때는 도우면서 좌절하지 않고 즐겁게 지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최씨는 직업과 소속 없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만을 잉여라고 볼 순 없을 것 같다며, 직장을 다니지만 시스템 안에서 쳇바퀴 도는 삶을 살면서 어떤 열정도 자극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역시 스스로를 잉여라고 느끼며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월간잉여>의 존재가치는 이처럼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이 존재하지만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소외된 개인’의 삶을 알리는 데 있다는 얘기인 셈이다.

인터넷에서는 ‘잉집장’이라는 타이틀이 20대로선 쉽게 갖기 어려운 ‘스펙(조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최씨가 언론사 입사전략의 하나로 잡지를 만든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최씨는 “나는 야망을 갖고 멀리 내다보며 사는 스타일이 아니다”며 “지금보다 <월간잉여>이 조금만 더 팔려서 재정문제가 해결되면 굳이 기자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얘기들을 최씨는 도발적이지도 진취적이지도 않게, 때로는 걱정스럽고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털어 놓았다. 잉여는 잉여일 뿐, ‘오버’하지 않겠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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