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강민 기자
역사적으로 부패기관 꼬리표를 떼지 못한 국가정보원은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줄달음 선택’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국정원은 국가 안보라는 본연의 기능보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봉사해온 경향이 크다. 원래 국가 최고정보기관의 역할은 대내외 고급 정보를 수집해 대통령이 가장 합리적인 정책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그간 우리나라 정보기관들의 ‘선택’은 그런 교과서적 사명과 거리가 멀었다. 군부독재 시절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지식인을 붙잡아 고문하는 등 정권 반대세력을 억압하는 데 앞장섰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진전된 이후에도 정치인이나 각계 요인, 민간단체, 언론사 등 개인과 기관을 감시하고 여론을 집권세력에 유리하게 조작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최근 논란이 된 국정원의 ‘댓글조작’ 등 대선개입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자의적 공개는 특정 정파를 위해 불법행위를 서슴지 않는 국정원의 고질병이 이명박 정부 이후 본격적으로 재발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정원의 이 같은 ‘줄달음 선택’은 순전히 그 조직 자체의 책임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국정원이 나쁜 형질을 선택하고 유전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최고 정책결정권자, 즉 대통령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이 국정원에 어떤 정보를 요구하고 무슨 역할을 기대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선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촛불시위의 배후자를 왜 못 찾느냐’며 김성호 국정원장을 해임하고 서울시장 시절부터 측근으로 두었던 원세훈 씨를 그 자리에 앉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국정원의 고유 업무보다 대통령의 심기에 맞춘 정보활동을 하라는 명령과도 같았을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 등 전문가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국정원장과 대통령의 독대 폐지’ 등 정보기관의 탈정치화를 위해 기울였던 노력이 이 전 대통령 이후 물거품이 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야가 국내 정보 수집기능 폐지를 포함한 다양한 국정원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대통령의 진정한 의지가 담기지 않는 한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국정원 스스로 개혁하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주문은, 문제의 형질을 유전케 한 선택자가 ‘이제는 알아서 100년 전의 유전자를 찾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대통령이 국정원의 ‘제자리 찾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이제라도 국정원이 본연의 소명을 다할 수 있도록 제도와 관행을 철저히 수술해야 한다. 국정원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정하고 이것이 제대로 실천될 수 있도록 법과 예산, 인사를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대통령이 자신과 집권여당의 정파적 이익을 위한 정보수집과 공작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야당 등 반대세력의 비판과 정치공세가 거셀 때, 정보기관을 사적으로 활용하고픈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궁극적 임무는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며, 선열들이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다. 대통령이 지휘하는 모든 국가기관 역시 이런 목적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국정원이 ‘나쁜 진화’를 중단하고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명령권자인 대통령이 비상한 의지와 결단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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