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강민 기자

▲김강민기자
인류는 조물주의 정교한 설계에 따라 늘 바람직한 쪽으로 발전해온 걸까?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한다. 그는 ‘눈먼 시계공이 수만 번 실패하다 우연히 시계를 고치는 것처럼’ 요행수와도 같은 선택에 의해 인류의 진화가 결정된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특히 잘못된 선택으로 나쁜 형질이 유전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른바 ‘줄달음 선택(Runaway Selection) 이론'이다. 어느 부족에서 여성들이 배가 나온 남성을 좋아하기 시작하면 100년 후에는 해당 집단의 남성들 대다수가 그런 외모를 갖는다는 얘기다. 다수의 이성이 어떤 외모를 선호하느냐에 따라, 실용성도 생물학적 가치도 없는 형질이 유전될 수 있다는 게 줄달음 선택설의 요지다. 좋은 형질이 '달아나 버린다(run away)'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부패기관 꼬리표를 떼지 못한 국가정보원은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줄달음 선택’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국정원은 국가 안보라는 본연의 기능보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봉사해온 경향이 크다. 원래 국가 최고정보기관의 역할은 대내외 고급 정보를 수집해 대통령이 가장 합리적인 정책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그간 우리나라 정보기관들의 ‘선택’은 그런 교과서적 사명과 거리가 멀었다. 군부독재 시절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지식인을 붙잡아 고문하는 등 정권 반대세력을 억압하는 데 앞장섰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진전된 이후에도 정치인이나 각계 요인, 민간단체, 언론사 등 개인과 기관을 감시하고 여론을 집권세력에 유리하게 조작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최근 논란이 된 국정원의 ‘댓글조작’ 등 대선개입과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자의적 공개는 특정 정파를 위해 불법행위를 서슴지 않는 국정원의 고질병이 이명박 정부 이후 본격적으로 재발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 지난 6월 20일 오후1시 서울 삼청동 진선갤러리 앞에서 안도현 시인이 국정원 대선 개입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박근혜 대통령의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하는 성명을 읽고 있다. ⓒ 이성제

그렇다면 국정원의 이 같은 ‘줄달음 선택’은 순전히 그 조직 자체의 책임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국정원이 나쁜 형질을 선택하고 유전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최고 정책결정권자, 즉 대통령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이 국정원에 어떤 정보를 요구하고 무슨 역할을 기대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선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전 대통령은 ‘촛불시위의 배후자를 왜 못 찾느냐’며 김성호 국정원장을 해임하고 서울시장 시절부터 측근으로 두었던 원세훈 씨를 그 자리에 앉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국정원의 고유 업무보다 대통령의 심기에 맞춘 정보활동을 하라는 명령과도 같았을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 등 전문가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국정원장과 대통령의 독대 폐지’ 등 정보기관의 탈정치화를 위해 기울였던 노력이 이 전 대통령 이후 물거품이 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야가 국내 정보 수집기능 폐지를 포함한 다양한 국정원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대통령의 진정한 의지가 담기지 않는 한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국정원 스스로 개혁하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주문은, 문제의 형질을 유전케 한 선택자가 ‘이제는 알아서 100년 전의 유전자를 찾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대통령이 국정원의 ‘제자리 찾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이제라도 국정원이 본연의 소명을 다할 수 있도록 제도와 관행을 철저히 수술해야 한다. 국정원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정하고 이것이 제대로 실천될 수 있도록 법과 예산, 인사를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대통령이 자신과 집권여당의 정파적 이익을 위한 정보수집과 공작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야당 등 반대세력의 비판과 정치공세가 거셀 때, 정보기관을 사적으로 활용하고픈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궁극적 임무는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며, 선열들이 피 흘려 쟁취한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다. 대통령이 지휘하는 모든 국가기관 역시 이런 목적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국정원이 ‘나쁜 진화’를 중단하고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명령권자인 대통령이 비상한 의지와 결단을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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