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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인은 왜 정체성을 중시했나
보수신문 사설 봐야 균형 잡힌다면 ‘한겨레’ 독자는 뭔가
무리한 구별짓기 ‘진주녀’ 기사, 호칭에 대한 성찰 있어야
2013년 05월 31일 (금) 02:20:04 이봉수 hibongsoo@hotmail.com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한겨레>가 창간 25돌을 계기로 지면을 대폭 개편했다. ‘빠른 뉴스’와 ‘느린 뉴스’로 나눠, ‘느린 뉴스’에 요일별로 긴 읽을거리들을 몰아준 것은 우선 양적으로 독자 만족도를 높이리라 기대된다. 또 ‘빠른 뉴스’에서 심층보도를 늘리고, ‘느린 뉴스’에서 시간 여유를 갖고 취재해 이야기 형태로 기사를 내보내는 것은 정성스럽고 질적으로도 격상된 느낌을 준다.

‘전쟁과 평화’ ‘협동과 공유의 시대’ ‘막 오른 공유가치(CSV) 창출 시대’ 등 <한겨레>다운 창간기획도 꽤 많았다. 그러나 ‘사설 속으로’는 전혀 <한겨레>답지 않은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시민편집인실에도 이 기획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독자 전화가 걸려왔다. <중앙일보>와 공동기획으로 ‘사설 속으로’를 시작한다는 20일치 1면 ‘알림’에는 ‘다른 시각을 지닌 두 신문사의 사설을 깊이 살피면, (중략) 바르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겨레>만 보아온 독자는 비뚤어지고 균형 잃은 시각을 가졌다는 말인가? ‘정론지’를 자처해온 신문이 자포자기한 건가?

이 기획은 ‘알림’에서 천명하였듯이 <중앙일보>를 ‘건강한 토론문화를 뿌리내리기 위한’ 동반자로 보고 있는데, <중앙>을 합리적 보수로 보는 시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중앙>은 남북 문제 등에는 <조선> <동아>보다 전향적이지만,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는 어디보다도 열렬했다. 1995년에는 ‘세계화’ 담론을 주도해 오늘의 참담한 사회경제상을 초래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2002년에는 ‘시이오(CEO)대통령론’을 치고 나와 결과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언젠가 젊은층이 <중앙일보>를 가장 진보적인 신문으로 생각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온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진보를 ‘새로운 것’, ‘세련된 것’과 혼동하는 일부 젊은층의 세태가 반영됐다고 본다. <중앙>은 베를리너판을 도입하는 등 확실히 세련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자본은 늘 새롭고 세련된 모습으로 다가와 대중을 유혹하고 자신의 영역과 몸집을 불려나간다.

<한겨레>가 ‘알림’에서 ‘청소년에게 균형 잡힌 시각을 길러주기 위한 뜻있는 일을 시작합니다’라고 했는데, <한겨레> 청소년 독자에게 <중앙>식 보수이념을 전파하는 게 왜 ‘뜻있는 일’인지 이해할 수 없다. <중앙>은 2003년에도 황석영·이문열 대담을 5회나 연재하는 등 보수성을 희석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반면 <한겨레>가 진보성을 더 희석시킨다면 얻을 게 무엇인가?

이번 기획은 진보언론의 ‘균형강박증이 빚은 일탈’이라 말하고 싶다. 진보언론은 진보의 가치를 진리로서 수호하고 전파함으로써 보수언론이 기울여놓은 운동장을 바로잡으려 애써야지, 지면에서 보수·진보의 균형을 맞추려 한다면 그것은 중도언론일 뿐 진보언론이 아니다.

<한겨레>는 2011년 5월부터 한겨레경제연구소·자유기업원 공동으로 1년간의 장기 토론회를 기획한 적이 있다. 연구소는 그럴 수 있겠지만, 그것을 지면에 대대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는지 의문이다. 보수의 이념을 전파하는 매체는 압도적으로 많고, <한겨레> 독자들도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대개 알고 있었을 터이다.

   

세계언론사를 보면 색깔을 잃고 망한 신문은 많아도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신문은 퇴출된 게 드물다. 영국 노동자신문 <데일리 헤럴드>의 비극은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그 신문은 한때 200만부를 발행했으나 논조를 우경화하다가 끝내 루퍼트 머독에게 인수되고 말았다. 그 신문의 후신이 바로 영국 언론과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다는 황색지 <더 선>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 사람들이었다. 상형문자 자체가 사물의 본질이나 조직의 존재 목적, 곧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었으니 서기들은 문자로 표현할 지시물의 본질을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여자’를 뜻하는 말에는 ‘물이 가득한 샘’을 그려 넣었다. 생명의 원천인 샘과 자궁, 그리고 여성성을 상징한 것이다.

특히 아이 이름은 그의 신분과 인품 등 정체성이 잘 드러나게 지었다. 죄인에게 가장 무서운 형벌은 원래 이름을 박탈하고 다른 호칭을 붙여 정체성을 바꿔버리는 것이었다. 람세스 3세 암살 음모자들에게는 ‘빛이 증오하는 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태양숭배족에게는 가혹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창간기획으로 실린 ‘20대 진주녀’ 관련 기사들(13일)에 대해서도 호칭과 관련해 ‘여성 비하적 표현’이라는 항의전화가 시민편집인실로 걸려왔다. 또 인문학 강연회 등에 열중한다고 해서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여자’로 규정짓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반응도 있었다. 사실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죽어가고 있는데 사회의 인문학 강좌에 20대 여성이 몰리는 데는 상류층을 향하는 ‘구별짓기’의 욕망이 일부 서려있음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순한글 신문인 <한겨레>는 우리 말글 바로 쓰기에 상당한 기여를 해왔지만, 무리한 조어를 남발한 사례도 많다. ‘국과수’ 같은 말은 관료들의 약어를 그대로 옮겨 의미전달에 지장을 주고 있다. 여기서 ‘국립’은 큰 의미가 없으니 ‘과학수사연구원’으로 쓰거나 ‘과학수사연’ 등으로 줄여 쓰고, 기사에서 ‘국과수’를 반복하는 것보다는 ‘이 연구원’ 등으로 지칭하면 되지 않을까? 24일치 3판, 5판 8면에는 ‘여가부의 탁상행정’이라는 제목까지 등장했다. ‘여성가족부’를 그렇게 지칭한 건데, 과거 ‘보건복지부’를 ‘보복부’라고 줄여 쓴 수준이다.

이름에는 작명하는 쪽의 불순한 의도가 끼어들 때도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란 말은 미국 언론이 즐겨 썼는데 이름 자체에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유럽 권위지들은 ‘이라크 전쟁’이라 불렀는데 우리 언론들은 대개 미국식 용어를 무심코 써왔다. <한겨레>가 지난 23일부터 ‘조세피난처’ 대신 ‘조세회피처’로 쓰기로 결정한 것은 용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진보언론에 대한 여망이 혹시 다른 데로 쏠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맞은 창간 25돌에 <한겨레>가 다음 사반세기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대형 기획이 없었던 점은 허전했다. 대신 들어간 ‘사설 속으로’ 등 정체불명의 기사들이 허전함을 증폭시켰음은 물론이다.


* 이 기사는 <한겨레>와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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