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2024 대산농촌재단 장학생 동계연수

지난달 20일 오후 6시쯤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읍 울산농업기술센터. 대다수 공무원이 퇴근한 시간이지만, 김경상(47) 도시농업과장은 어둑해진 청사 1층에 불을 밝히고 대산농촌재단 장학생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자신을 ‘농촌지도사’라고 소개한 김 과장은 ‘농업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지도사 – 김 과장의 지도사업 이야기’를 제목으로 2시간짜리 강의를 시작했다. 농업 관련 전공 대학생, 농업농촌 전문 언론인을 지망하는 대학원생과 재단 직원 등 16명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성장촉진제와 농약 안 써 ‘껍질째 먹어도 되는 배’

김경상 울산농업기술센터 도시농업과장이 대산농촌재단 장학생들에게 울산 배 ‘황금실록’의 개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지영 기자
김경상 울산농업기술센터 도시농업과장이 대산농촌재단 장학생들에게 울산 배 ‘황금실록’의 개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지영 기자

19년 차 공무원인 김 과장은 2006년부터 ‘탑푸르트 시범사업’을 추진해 ‘황금실록’이라는 브랜드를 개발했다. 제수용이나 선물용으로 유통되는 일본 유래 신고배가 성장촉진제로 크기를 키워 맛과 당도가 떨어지는 반면, 황금실록은 성장촉진제와 농약 없이 제철에 키워 달고 아삭하다고 한다. 그래서 ‘껍질째 먹어도 안전한, 작고 맛있는 배’로 홍보된다. 농업기술센터가 농가와 힘을 합쳐 생산한 황금실록이 2015년 본격 판매된 뒤 참여 농가의 소득은 3.8배 늘었고, 초기 10헥타르(ha)에 불과했던 생산면적은 지난해 79ha 이상으로 늘었다고 김 과장은 설명했다.

황금실록의 성공 뒤에는 철저한 품질관리 노력이 있었다. 김 과장은 배를 재배할 농가를 직접 찾아가 일대일 면담을 통해 섭외했다. 품질 기준을 지키지 못하거나 성장촉진제를 쓰는 등 원칙을 어긴 농가는 단호하게 제외했다. 그는 “소비자와 신뢰를 지키지 못하면 결국 농촌도 무너지게 돼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통도 맡아, 가장 품질이 좋은 농가의 배부터 우선 출하하는 등 경쟁을 도입했다. 수확 전에는 당도를 검사하고 결과를 공개하는 등 엄격한 브랜드 관리에도 힘썼다고 한다.

김 과장은 “농촌지도사로서 뿌듯하다”면서도 “울산의 황금배는 내가 없어도 계속 지속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2017년 그가 인사이동으로 다른 부서에서 일할 때, 황금실록이 위기를 맞은 일이 있다고 한다. 그는 ‘농민이 지역 농업을 이끄는 리더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2019년 생산자단체인 울산우리배연구회를 조직했다고 말했다. 현재 울산지역 60여 농가가 모여 생산된 배를 품평하며, 다양한 우리 배를 연구하고 기술을 전수하는 활동을 이어간다고 한다.

미나리가 살린 경북 청도 한재골의 농촌경제

한재골은 경북 청도군 초현리, 평양리, 음지리, 상리를 아우르는 마을 이름이다. 한재골에 들어서면 미나리를 재배하는 농가와 그 사이사이 위치한 여러 식당이 눈에 띈다. 지난달 21일 연수단이 찾아간 한재골은 제철 미나리를 맛보기 위해 찾아온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미나리와 삼겹살을 함께 파는 식당이 많은데, 고객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도 있었다. 한재골에서는 현재 130개 농가가 미나리를 재배하며, 연간 약 130억 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저 어릴 때만 해도 여기가 오지 마을이었죠. 사람들도 다 도시로 나가고 한동안은 이곳 생활이 정말 힘들었는데, 미나리를 하고부터는 많이 살만해졌고 또 마을이 부유해졌어요.”

청도한재미나리생산자연합회의 박이준(74) 회장은 한재골 토박이로, 미나리를 이곳의 명물로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한재골은 물이 차갑고 물 빠짐도 심해 논농사나 밭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미나리를 키우기엔 좋은 곳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나리에 주목하지 못했던 주민들은 살길을 찾아 마을을 많이 떠났다. 이대로면 마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박 회장은 미나리 농사의 생산성을 높이고 판로를 개척하는 일에 나섰다. 청도군의 지원을 받아 대량 재배가 가능한 시설하우스를 짓고, 지하수 개발에도 앞장섰다.

경북 청도군 청도읍 한재미나리영농조합법인 사무실에서 박이준 청도한재미나리생산자연합회장이 한재골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강민정 기자
경북 청도군 청도읍 한재미나리영농조합법인 사무실에서 박이준 청도한재미나리생산자연합회장이 한재골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강민정 기자

1992년 90평짜리 비닐하우스에서 최초로 재배를 시작했다. 철저한 무농약 농사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생산 농가가 하나둘 늘자 박 회장은 생산자 작목반을 만들어 합동 생산을 했다. 1994년엔 전국 최초로 미나리 무농약재배 품질인증을 획득했다. 2009년에는 한재미나리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해 농가끼리 생산 원칙과 품질 기준을 만들었다. 농민 회의를 거쳐 미나리 가격을 결정한 뒤 1년간 유지해 소비자 신뢰를 쌓는 것도 조합의 특징 중 하나다.

“우리 농가가 직접 미나리 가격을 정해서 판매합니다. 지금은 1킬로그램(kg)에 1만 2천 원 정도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판매하는 미나리들은 kg당 2만 원까지 갈 때도 있어요. 저희 한재 미나리가 평균적으로 싼 편인데, 그래도 중간에 가격을 올리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저희가 계속 잘 되려면 소비자들과 한 약속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입니다.”

한재 미나리는 2010년 농산물 지리적표시 제69호로 선정됐다. 이 제도는 우수한 지리적 특성을 가진 농림산물 및 가공품을 등록해 보호하는 제도다. 박 회장은 “이제는 외지에서도 미나리를 짓겠다고 사람들이 들어오고, 미나리로 여기서 또 다른 장사를 하겠다고 오는 사람들도 많이 들어온다”며 “미나리만이 아니라 마을도 같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박이준 청도한재미나리생산자연합회장과 대산농촌재단 장학생들이 청도한재미나리영농조합법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산농촌재단 제공
박이준 청도한재미나리생산자연합회장과 대산농촌재단 장학생들이 청도한재미나리영농조합법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산농촌재단 제공

토종 씨앗 지키고, 치유공간 만드는 개척자들

연수단은 지난달 21일 오후 경남 거창군 가조권역 커뮤니티센터로 이동해 박효정(40), 이진우(36) 농부와약초꾼 공동대표의 강연을 들었다. 농부와약초꾼은 무농약·친환경 약초를 재배·가공하는 브랜드로, 25세에 귀농한 농부 박 대표와 아버지 가업을 이어받은 약초꾼 이 대표가 2013년 설립했다. 이들은 우슬, 작약, 작두콩, 돼지감자 등을 해발 1000미터(m)의 재배지에서 길러 농약 유입을 막는다. 박 대표는 지속 가능을 뜻하는 ‘퍼머넌트’와 농업을 뜻하는 ‘어그리컬처’의 합성어인 퍼머컬처, 즉 지속 가능한 농법과 자연 친화적 생활방식을 추구한다. 예를 들면 밭의 멀칭(토양 표면 덮기) 재료로 비닐 대신 볏짚을 쓰는 것이다. 그는 “비닐보다 볏짚으로 멀칭했을 때 토양으로 흡수되는 탄소의 양이 더 많다”고 말했다.

박효정 농부와약초꾼 공동대표가 유기재배와 퍼머컬처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강민정 기자
박효정 농부와약초꾼 공동대표가 유기재배와 퍼머컬처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강민정 기자

박 대표는 또 “기후위기가 극심해지면서 작물들이 적응력을 잃어가는데, 개량종보다는 토종 씨앗의 적응력이 낫다”며 “생물다양성 측면에서 토종 씨앗을 지키고 확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2017년 만들어진 거창지역 토종 씨앗 모임 ‘토종살림’의 회원으로 7년째 토종 씨앗 수집과 나눔, 도감 제작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2021년에는 대산농촌재단의 연구 지원을 받아 논문 ‘지역 토종 유기종자 보급 방안’을 발표했다.

지난달 22일에는 연수단이 경남 거창군 거창읍의 이수미 팜베리 농장을 찾았다. 1만 4천 평의 밭에 복분자, 블랙베리, 아로니아, 블루베리, 산딸기를 유기농으로 재배하는 곳이었다. 유기농 산양삼 재배지, 유기농 베리 가공농장, 농가 레스토랑, 베리 열매를 직접 수확하고 음료를 만들 수 있는 교육농장도 있었다. 연간 10만 명 정도가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이 대표는 “아이들이 인조 색소에 너무 많이 노출돼 있다고 느끼던 중 선물 받은 복분자의 빛깔을 보고 ‘자연과 햇빛과 물이 만들어낸 짙은 색을 사람들이 먹을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베리 밭을 조성했다”고 말했다.

이수미 팜베리 농장의 이수미 대표가 농장 내 레스토랑에서 ‘농기업이 미래를 디자인하다’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김지영 기자
이수미 팜베리 농장의 이수미 대표가 농장 내 레스토랑에서 ‘농기업이 미래를 디자인하다’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김지영 기자

이 대표는 농촌이 “식량을 생산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이자 사람들을 치유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건강 문제로 1992년에 거창으로 귀농한 이 대표는 일찍이 농촌의 치유 기능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노인과 질병으로 아픈 사람들이 회색 콘크리트 안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자연 공간에서 시간을 좀 누리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수미 팜베리는 현재 팜스테이(펜션)를 운영 중인데, 앞으로 자연 속에서 휴식과 휴양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산농촌재단 연수생들이 이수미 팜베리 농가 레스토랑에서 블랙베리 잼, 산딸기 스무디 등을 곁들인 식단으로 식사하는 모습. 대산농촌재단 제공
대산농촌재단 연수생들이 이수미 팜베리 농가 레스토랑에서 블랙베리 잼, 산딸기 스무디 등을 곁들인 식단으로 식사하는 모습. 대산농촌재단 제공

한편 이번 연수는 대산농촌재단이 농업·농촌 장학생에게 선도농업인과 친환경 농업 사례를 현장에서 견학할 기회를 제공하는 차원에서 마련됐다. 대산농촌재단은 교보생명 설립자인 대산 신용호 선생이 1991년 만든 공익재단으로, 농업 연구 지원과 농업 인재 양성을 위한 장학 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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