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 추천 좋은 기사] 2023년 퓰리처상 국내보도 부문 수상작 – 낙태에 맞서 싸우는 미국

지난해 6월 24일, 미국에서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이 뒤집혔다.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권을 헌법상 보호해야 할 기본권으로 인정한 역사적인 판결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이다.  이 판결로 미국은 49년 동안 연방 차원에서 임신 후 24주까지 여성의 낙태할 권리를 보장해왔다. 그런데 이 판결이 폐기되면서 모든 주가 낙태의 합법 여부를 개별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됐다. 이로 인해 낙태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주들이 늘어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의 캐롤라인 키치너(Caroline Kitchener) 기자는 새로운 법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취재했다. 불법적으로 낙태한 여성, 원치 않게 임신한 여성, 낙태약을 공급하는 비밀조직 등 새로운 판결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6편의 내러티브 기사와 1편의 데이터 기사에 담았다. 이 보도는 올해 퓰리처상 국내보도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2023 퓰리처심사위원회는 “삶의 복잡한 결과를 포착한 흔들림 없는 보도”라고 평가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텍사스주에서 낙태 금지법이 발효된 후 쌍둥이를 출산한 10대 여성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이 기사를 비롯한 낙태 관련 연속 보도는 2023년 퓰리처상 국내보도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워싱턴포스트 갈무리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텍사스주에서 낙태 금지법이 발효된 후 쌍둥이를 출산한 10대 여성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이 기사를 비롯한 낙태 관련 연속 보도는 2023년 퓰리처상 국내보도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워싱턴포스트 갈무리

낙태 금지법에 얽힌 맥락과 의미를 담은 보도

미국에서 낙태 문제는 매우 논쟁적인 사안이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후보들의 낙태 정책이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언론은 양측의 좁혀지지 않는 논쟁을 보도한다. 다만 대다수 미국 언론도 낙태 문제를 다룰 때 주로 법률과 법원 사건을 중심으로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의 키치너 기자는 낙태에 관해 더 인간적인 이야기를 할 여지가 있다고 느꼈다. 그가 품은 의문은 단순했다. ‘새로운 법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어떤 변화를 겪고 있을까?’

키치너 기자는 새로운 법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다. 낙태 금지법이 발효되면서 쌍둥이를 출산한 10대 여성,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히면서 폐쇄된 낙태 클리닉의 소유주, 낙태가 금지된 주에서 원치 않게 임신한 임산부, 낙태를 반대하기 위해 조직된 위기임신센터의 대표 등을 인터뷰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심층 취재한 결과를 담아, 작년 6월부터 12월까지 6편의 내러티브 기사와 1편의 데이터 기사로 보도했다.

회색지대를 담은 내러티브 기사

워싱턴포스트는 낙태가 불법인 지역에 낙태 알약을 공급하는 비밀 네트워크도 보도했다. 키치너 기자는 이 비밀 네트워크와 직접 관련된 16명을 인터뷰하고 미국 4개 도시와 멕시코 현장을 취재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 갈무리
워싱턴포스트는 낙태가 불법인 지역에 낙태 알약을 공급하는 비밀 네트워크도 보도했다. 키치너 기자는 이 비밀 네트워크와 직접 관련된 16명을 인터뷰하고 미국 4개 도시와 멕시코 현장을 취재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 갈무리

키치너 기자는 6편의 기사에서 내러티브(narrative) 방식을 사용했다. 내러티브는 ‘이야기하다’(narrate)라는 단어의 유래처럼 사건이나 인물의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듯이 설명하는 글이다. 내러티브 저널리즘은 이야기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소설과 비슷하지만, 오직 사실로만 구성된다는 점에서 소설과 다르다. 키치너 기자는 기사에서 낙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여러 인물의 서사를 통해 낙태 문제를 둘러싼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의미와 맥락을 전달한다.

그는 특정 인물의 일상생활을 동행하고 가족과 주변인까지 취재해, 한 사건이 개인과 그를 둘러싼 공동체에 미치는 변화를 폭넓게 파악했다. 그리고 각각의 사람들로부터 수집한 사실의 조각을 모아 당시의 상황을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그렇게 완성된 기사에는 시시각각 바뀌는 상황과 개인의 복합적인 감정 변화까지 담겼다.

새로운 법의 영향을 추적하다

키치너 기자가 만난 사람 중에는 쌍둥이를 출산한 10대 소녀도 있었다. 텍사스주가 낙태를 금지하면서 낙태가 합법인 주를 방문해 수술받을 금전적·시간적 여유가 없는 여성들이 예정 없는 출산을 했다. 10대 여성인 브룩 알렉산더도 마찬가지였다. 키치너 기자는 브룩 알렉산더와 그의 남편, 가족 등 주변인들을 인터뷰해 알렉산더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뒤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브룩 알렉산더는 텍사스주의 낙태 금지법이 발효되기 48시간 전에 임신 사실을 알았다. 집에서 차로 13시간 거리에 있는 낙태 클리닉에 방문했지만, 자신이 방문한 곳이 낙태에 반대하기 위해 설립된 조직이 운영한다는 점은 모르고 있었다. 결국 브룩 알렉산더는 낙태를 거부당해 쌍둥이를 출산했다. 

키치너 기자는 낙태 금지법의 영향을 받은 여성들을 취재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작년 10월에는 낙태가 금지된 주에 낙태 알약을 공급하는 비밀 네트워크를 취재해 보도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이후 법적·의학적 위험을 감수하고 무료로 낙태약을 공급하는 비밀 네트워크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16명을 인터뷰하고 미국 4개 도시와 멕시코의 현장을 방문해 낙태약을 제공하는 활동을 취재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폐기되면서 낙태 반대 조직은 시설 확장 계획을 세웠지만, 낙태 클리닉은 갑작스레 폐쇄됐다. 키치너 기자는 새로운 판결로 상반된 영향을 받은 두 조직의 대표를 인터뷰했다. 낙태에 반대하기 위해 설립된 텍사스주의 코스탈 벤드(Coastal Bend) 임신센터의 대표는 정부 자금을 지원받아 센터를 확장하기로 했다. 반면 여성들의 낙태 수술을 돕는 낙태 클리닉의 대표는 갑자기 시설이 폐쇄되면서 수백 마일을 운전해 찾아온 환자들을 돌려보내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데이터로 본 미국 전역의 변화

6편의 내러티브 기사를 통해 법률이 개인의 삶에 일으킨 변화를 세세하게 살펴봤다면, 1편의 데이터 기사에는 미국 전역의 상황을 담았다. 이 기사에서는 지도와 표를 통해 개별 주의 낙태 방침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지난해 6월 처음 보도된 이 데이터 기사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됐고, 현재는 지난 9월 상황까지 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한 낙태 관련 데이터 기사 제목에 ‘낙태가 합법이거나, 금지되었거나, 위협을 받고 있는 주’라고 적혀있다. 미국 전체 51개 주 가운데 절반 수준인 26개 주가 낙태를 금지하거나 제한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갈무리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한 낙태 관련 데이터 기사 제목에 ‘낙태가 합법이거나, 금지되었거나, 위협을 받고 있는 주’라고 적혀있다. 미국 전체 51개 주 가운데 절반 수준인 26개 주가 낙태를 금지하거나 제한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갈무리

취재팀은 주별 낙태 합법 여부를 표시한 미국 지도를 기사 맨 위에 싣고, 바로 아래에는 표를 배치해 낙태에 관한 각 주의 입장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지도와 표를 통해, 낙태를 제한하는 주는 임신 몇 주까지 합법인지, 아예 금지하는 주는 어떤 경우에 예외적으로 허용하는지 알 수 있다.

데이터를 살펴보면, 미국에서 낙태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주는 전체 51개 주 가운데 절반 수준인 26개 주다. 15~44세인 미국 여성 3명 중 1명이 낙태가 금지되거나 제한된 주에 살고 있는 셈이다. 취재팀은 낙태 금지법을 고려하고 있는 주의 현황을 따로 편집하여, ‘2023년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주’라는 제목으로 기사 하단에 배치했다. 플로리다주, 남캐롤라이나주, 북캐롤라이나주, 유타주 등 9개 주에서 낙태 금지법을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이슈에 특화된 전문 기자

키치너 기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역사와 젠더를 전공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저널리즘 수업에서 캠퍼스 내 성폭행 문제에 관해 기사를 작성했는데, 이 글이 <가디언>(The Guardian)에 게재되면서 저널리스트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2019년 1월 워싱턴포스트에 합류하면서 여성과 젠더를 전문으로 다루는 특별보도팀 ‘더 릴리’(The Lily)에서 활동했고, 이후 일반 뉴스를 다루는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특히 2021년부터 낙태 문제에 천착해 120편이 넘는 관련 기사를 보도했다. 최근 2년간 낙태 문제가 아닌 다른 이슈는 거의 다루지 않은 셈이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후속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낙태 금지법을 새로 채택한 주를 방문해, 낙태에 관한 최신 상황을 심층적이고 포괄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홈페이지에 게시된 캐롤라인 키치너 기자의 프로필 상단에 ‘낙태와 여성의 건강을 취재하는 기자’라고 적혀있다. 소개글 첫 문장에도 ‘캐롤라인 키치너는 워싱턴 포스트에서 낙태를 취재하는 국내 기자입니다’라고 적혀있다. 워싱턴포스트 갈무리
워싱턴포스트 홈페이지에 게시된 캐롤라인 키치너 기자의 프로필 상단에 ‘낙태와 여성의 건강을 취재하는 기자’라고 적혀있다. 소개글 첫 문장에도 ‘캐롤라인 키치너는 워싱턴 포스트에서 낙태를 취재하는 국내 기자입니다’라고 적혀있다. 워싱턴포스트 갈무리

영미 언론에서는 특정 기자가 한 사안을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 매번 다른 사안을 다루는 ‘일반 기자’(general assignment reporter)와 달리, ‘전문 기자’(special reporter)는 특정 이슈나 의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따라서 영미 언론에서 전문 기자가 되는 길은 그 이슈와 관련된 사실을 더 많이, 더 빨리 밝혀내는 것이다. 키치너 기자가 낙태권 문제에 천착해 2년 넘게 관련 사안을 보도하는 것이 영미 언론에서 아주 특이한 사례는 아니다.

그는 지난 6월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의 동문 주간지 <Princeton Alumni Weekly>와 인터뷰에서 “(낙태권) 문제는 주로 양측의 감정이 극도로 고조된 흑백 전투로 정의되기 때문에, 이 기사를 통해 이 문제의 회색지대와 뉘앙스를 파악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2023 퓰리처상(국내보도 부문)을 수상한 <워싱턴포스트>의 '낙태와 맞서 싸우는 미국' 연속보도는 여기를 눌러 읽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기사들이 있다. 저널리즘의 이상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기사다. 언론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도 여전히 언론에 희망이 있음을 증명하는 기사이기도 하다. 기자는 그런 기사를 꿈꾸고, 독자는 그런 기사를 기다린다. <단비뉴스>는 2000년대 이후 국내외 주요 기자상 수상작을 중심으로 기자와 독자에게 두루 도움이 될 만한 좋은 기사를 골라 소개한다. (편집자주)

관련기사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