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장강명 '표백'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표백>은 이 땅에 사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굉장히 불편하게 한다. “너희들은 살 가치가 없으니 죽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에게 자살을 종용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사회는 완성되었다. 한국은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성공하면서 완성사회가 되었고, 어떤 갈등과 모순도 세계가 근본적으로 바뀔 만큼 쌓이지 못하도록 관리된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일련의 다툼도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 틀 안의 미세 수정에 불과하다.
둘째, 그러므로 젊은 세대의 삶은 의미가 없다. 이들은 세계를 바꾸기 위해 마땅히 수행할 역사적 과업도 없고,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도 없다. 기껏 알량한 욕심(권력과 돈)을 좇으며 이미 만들어진 사회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 부품, 곧 노예일 뿐이다.
셋째, 따라서 자살만이 의미를 지닌다. 완벽한 시스템에 순응하고 타협하고 무의미하게 저항하느니 차라리 죽음이라는 ‘완전한 거부’를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고 제 존재를 증명하는 게 낫다. 이것만이 진정한 저항이며 위대한 가능성의 발현이다.
주인공 세연은 이 같은 내용의 ‘자살선언’을 ‘와이두유리브닷컴’이라는 사이트에 게재하고 자살을 감행한다. 이후 그녀의 친구이자 추종자였던 젊은이들이 하나 둘 같은 방식으로 자살하고 유행처럼 사건이 번진다.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젊은이들이 극단적으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하자 세상은 시끄러워진다.
문학에서 ‘자살’은 중요한 화두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장치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뒤엉킨 인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괴테의 베르테르는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의 키릴로프는 신의 부재를 설명하기 위해 각각 자살을 고민했다. 위대한 소설로 형상화한 이들의 고뇌는 곧바로 인류에게 던지는 중차대한 질문이 되었다.
<표백>의 자살은 현재 우리 한국사회와 청년세대의 삶을 성찰하게 한다. 이미 완벽한 흰색이어서 어떤 색깔도 덧칠할 수 없는 세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 사는 ‘표백세대’의 삶은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새마을 운동의 주역이었거나 민주화의 첨병이었던 이전 세대와 달리 오늘날 젊은이들은 어떤 거대담론을 추구하고 무슨 방향으로 사회를 끌고 나가려 하는가?
비슷한 질문이 지난 2009년 한국사회를 시끄럽게 한 적이 있다. 이젠 <나꼼수>로 스타가 된 김용민 시사평론가가 사회적 책임에서 한 발 비켜간 20대를 매섭게 쏘아붙인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너희에게 데모할 것을 부추기는 게 아니다. 도리어 만류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미 너희는 뭘 해도 늦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냥 조용히 공부하고, 졸업해서, 삽 들고 안전한 삶의 길을 모색해 나가길 바랄 뿐이다.”
조용히 공부하고 졸업해서 안전하게 사는 게 유일한 목표인 젊은이들.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일침. 그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20대에게 과연 돌파구는 없는 걸까? <표백>이 구축한 두꺼운 사각 틀을 용감하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요원한 걸까? 방법은 아무래도 <표백>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데 있지 않나 싶다.
먼저, 이 세상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 현재 한국사회가 성취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완성단계가 아니라 오히려 뼈대만 앙상해 덧붙일 살이 많은 미발육 상태에 불과한 것이라면. 실제로 정치, 경제, 생활 등에서 구태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해야 할 영역이 아직도 곳곳에 넘친다. 1%를 위한 신자유주의 극대화로 피폐화한 자본주의 역시 건강한 모습으로 변모시켜야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숙제거리가 산적해 있고 이는 모두 젊은 세대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과업이다.
범위를 더 넓혀 자유민주주의, 수정자본주의 이후 사회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하고 실험해볼 수 있다. 완벽히 하얀 캔버스를 아예 푸른색으로 바꾸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사회는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고 거기 참여하는 모든 젊은이들의 삶 역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이 <표백>의 틀을 깨뜨릴 수 있는 여지다.
다음으로 삶의 의미를 과연 위대한 사회•역사적 사명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걸까?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작은 삶은 과연 무의미할까? 그렇지 않다. 실제로 <표백>의 인물들이 집단자살에서 걸어 나오는 데는 이와 같은 해법이 작용한다.
“자살 선언에 대한 내 반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중략). 잘 가꿔진 숲길을 걸을 때 거부할 수 없는 작고 소소한 기쁨을 맛본다면, 그 숲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가치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어.”
세연을 따라 죽기로 약속했지만 지키기를 포기한 휘영의 말이다. 실컷 거대담론을 얘기하다 갑자기 미시적 개인의 삶으로 회귀하는 소설의 흐름이 자연스럽진 않지만, ‘죽으라’는 도발에 대응하기에는 퍽 알맞게 느껴진다. 각 개인이 스스로 삶을 책임지고 그 속에서 소박한 의미를 느낀다면 그 자체로 된 것이 아닐까? 그만하면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
이 밖에도 <표백>의 주장에 반대하고 제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작가의 의도 또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죽으라’는 도전에 반박해 보라는 것. <동아일보>에서 십 년 간 기자로 지낸 장강명 작가는 그동안 누구보다 면밀히 사회를 관찰하고 계속해서 발견되는 복잡한 모순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무기력한 세대로 알려진 현재 젊은이들과 그 질문을 공유하게 위해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이제 질문은 독자 차례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질문’이다. 한평생 사지선다형 ‘정답’만을 강요받느라 질문하는 법을 잊어버린 우리는 이런 소설의 도발에 기꺼이 넘어가 다시 물어야 할 것을 물어야 한다.
“나는 왜 사는가?”
이 질문 하나가 어쩌면 당신이 내일 아침 목구멍으로 넘기는 밥 한 숟갈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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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도 허투루 읽을 수 없을 만큼 멋진 글을 써내고 싶은 문학청년.
세명대 저널리즘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