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임 칼럼]

▲ 제정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교수
얼음장 같은 바람이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씨였다. 비마저 종일 내렸다. 그래도 그들은 모였다. '지금 날씨 따질 만큼 한가하냐'고 서로를 자극하면서. 비는 그쳤지만 발이 시렸던 저녁, 그렇게 수만 명이 서울 여의도공원을 채웠다. 지난 달 30일 인터넷방송 '나는 꼼수다'팀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를 내걸고 특별공연을 하는 자리였다. "한미 FTA의 스나이퍼(저격수)가 되겠다.", "이제는 니들(집권층)이 쫄 차례다.", "웃으면서 싸우자." 출연자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수만 관중은 폭소하고 환호하며 '비준 철회'를 높이 외쳤다.

전문가와 지식인은 안 보이는 사회

정치인과 언론인 넷이 모여 현실을 풍자하는 '나꼼수'는 한나라당이 한미 FTA 비준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후 '저항의 구심점' 중 하나로 부상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나꼼수 방송 등을 통해 한미 FTA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을 통해 자료와 기사들을 돌려보며 토론하고 있다. 해외사이트의 논문과 보고서까지 퍼 나르는 열성파도 있다. 광화문 집회 등에 모이는 인파의 상당수는 일부 언론의 주장처럼 '괴담'에 이끌린 철부지가 아니라 이런 '열공'을 통해 자기 삶과 FTA의 관계를 자각한 '책임 있는 시민'이다.

우리 사회의 비극은 경제전문가가 아닌 나꼼수와 거리의 시민들이 이처럼 한미 FTA에 대해 열심히 걱정하고 행동하는 반면, 전문가 혹은 지식인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한미 FTA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인사 중 해당 분야의 진짜 전문가는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우리나라의 그 많은 경제ㆍ경영학자들, 법률전문가들, 산업분석가들, 국제관계학자들은 도대체 어디서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법원 내부통신망에서 한미 FTA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김하늘 판사의 경우를 보면 다른 전문가들의 입장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자타가 인정하는 보수주의자라는 김 판사는 최근까지도 'FTA로 수출이 늘어나면 좋은 것 아니냐'고 막연히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 날치기 파동 후 자신이 한미 FTA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음을 깨닫고 토론프로그램을 꼼꼼히 분석한 결과 투자자국가소송제(ISD) 등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좀 늦었지만 솔직하고 건강한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전문가 중에도 '아직 구체적 내용을 따져보지 않아' 아무 말도 못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른다.

한미 FTA가 국민들의 삶에 얼마나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전문가들의 이런 침묵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미국과 FTA를 맺는 것이 '장미빛 미래' 대신 '악몽'을 안겨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들이 이미 보여주고 있다. 멕시코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발효 후 수출증가 등의 과실을 부유층이 독식하고, 값싼 미국산 농산물 때문에 농촌이 무너지면서 양극화와 빈곤이 더욱 심해졌다. 미국 언론들에 따르면 NAFTA이후 먹고 살 길을 찾아 밀입국하는 멕시코인들이 더 늘었고 매년 수백 명이 국경지대인 애리조나 사막 등에서 헤매다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호주와 캐나다 같은 선진국에서도 미국과의 FTA이후 보건의료의 공공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비명이 나온다.

침묵이 죄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외환위기로 국가적 치욕을 겪었던 1997년, 경제학계의 한 원로는 "우리의 지력(知力)이 부족해서 당했다"고 탄식했다. 아무런 경고도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던 지식인의 부끄러움을 토로한 것이다.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직전까지 "경제 펀더멘털(기초여건)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정부 발표를 받아썼던 주요 언론은 반성도 없이 지금 나꼼수를 '괴담'으로 몬다. 페이스북을 통해 한미 FTA 비준안 날치기를 비판했던 최은배 판사는 한 인터뷰에서 "때론 침묵이 죄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능력 있는 당신이 무관심해서 잘 몰랐다면,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그건 역사에 큰 죄가 될 수도 있다.


* 이 칼럼은 한국일보 12월 6일자 <아침을 열며>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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