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비평] 평범한 개인이 만드는 사악한 사회구조

지난달 17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압에 나섰던 한 공수부대원은 자기가 희생자 박병현 씨를 사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희생자 유족을 만나 사죄했다. 가해자가 유족에게 직접 사죄 의사를 밝힌 것은 처음이다. 그는 조사위에서 당시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고, 유족에게는 지난 40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학살을 거리낌 없이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 1965년 인도네시아 학살을 주도한 사람이다. 학살은 군부 총사령관인 수하르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공산주의자’를 숙청한다는 명목이었다. 군부는 65년부터 66년까지 자국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희생자는 250만~300만으로 추산된다. 학살 전면에는 준군사시설인 ‘판차실라 청년단’과 지역 조직폭력배였던 ‘프레만’이 있었다. 장사하는 중국인, 군부 독재를 반대하는 정치인, 그냥 공산주의자로 ‘여겨지는’ 농민이 학살 대상이었다. 

▲ 2014년 개봉한 <액트오브킬링>(The Act of killing)은 1965년 인도네시아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조슈아 오펜하이머와 신혜수, 그리고 익명의 인도네시아 감독이 공동연출했다. 이 영화는 제86회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 후보작에, BBC 선정 21세기 최고의 영화 14위에 오른 바 있다. © <액트오브킬링>

65년 인도네시아 학살 가해자는 그 과정에서 부와 권력을 얻었다. 이 영화는 가해자가 시나리오를 짜고 촬영을 맡아 제작하는 과정을 영화화한 '영화 속의 영화' 제작기이다. 영화는 그들이 왜 학살을 자랑스러워하는지 그 이유를 추적한다. 

학살자가 제작하는 영화

‘안와르 콩고’는 영화 주인공이다. 그는 65년 인도네시아 학살을 주도하며 매일 수십 명을 죽였다.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한 그는 서부영화에 감명을 받아 전선으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고안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 정부와 판차실라 청년단에서 영웅 대접을 받아 각종 행사에 귀빈으로 참석한다. 그에게 죄책감은 보이지 않는다. 해맑게 웃으며 제작진에게 자신이 어떻게 사람을 죽였는지 설명한다. 이해되지 않는 그의 도덕 관념을 알아보려고 다큐멘터리 제작진은 그에게 학살 당시를 재연하는 영화를 제작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학살 동지와 함께 때로는 가해자가 되고 때로는 피해자가 돼 영화를 제작한다.  

왜 학살 사건을 영화로 제작하는 걸까?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을 '눈에 보이게' 시각화하기 위해서다. 안와르는 영화를 촬영하며 학살 당시를 재연한다. 한 집안을 습격하고, 세트장으로 만든 한 마을에 불을 지르고, 전선으로 희생자 배역의 목을 조르고, 부모 앞에서 아이를 죽이는 폭력적인 순간을 담는다. 기억의 시각화를 통해 그 당시 기억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관객은 학살 당시 살기 어린 사회 모습을 목격한다.

▲ 안와르는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로서도 배역에 몰입한다. 이 장면은 희생자로 살해당하는 장면이다. 안와르는 이 장면을 찍으며 감정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 <액트오브킬링>

감독이 학살자에게 영화 제작을 시킨 더 중요한 의도는 학살자 스스로 학살 행위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는 총체적인 작업이다. 감독은 필연적으로 몰입과 객관화의 과정을 반복한다. 안와르도 영화제작을 하며 몰입과 객관화의 과정을 반복한다. 자신이 벌인 학살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피해자 역할에도 몰입한다. 배우가 없어서 학살자가 피해자 배역까지 맡았는데, 그들은 배역이라는 생각도 잊을 정도로 감정에 빠져든다. 

안와르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자신이 한 일에 결국 후회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자위하지만, 점점 과거를 마주하기 힘들어한다. 영화 초반에 ‘피의 사무실’에 들러 웃으면서 학살 내용을 이야기하던 안와르가 막바지에는 같은 장소에서 구토까지 한다. 입으로는 자기 과거를 정당화하려 하다가도 학살 도구를 보자 이상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는 영화 만들기를 통해 본인이 애써 인식하려 하지 않았던 과거를 자꾸 상기하게 된다. 

왜 가해자를 촬영할까? 

중대 범죄를 폭로하는 다큐멘터리는 대개 희생자가 증언하는 형식을 취한다. 희생자를 다뤄야 범죄에 관한 실체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 감독도 처음에는 희생자와 그 가족의 증언으로 이 학살 사건에 접근하려 했다. 하지만 희생자들은 화면에 나오기를 꺼렸다. 학살을 이끈 주동자들이 지금도 인도네시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학살 희생자 유족 수리오노는 가해자 이야기를 들으며 분노를 삭힌다. 가해자인 아디는 공산주의자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자신이 죽였다는 것을 시인한다. 하지만 본인 이미지 관리를 위해 영화에서 그런 이야기는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액트오브킬링>

학살 가해자는 스크린에 등장해도 문제가 없지만, 희생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희생자와 가해자의 이런 위상이 드러난다. 희생자 유가족인 수리오노가 학살을 자행한 프레만에게 어릴 적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다. 수리오노는 조심스럽게 말하는데 프레만은 이런 그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자기 이미지 관리를 위해 진실을 숨겨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가 가해자를 전면에 드러낸 이유다. 

▲ 다큐멘터리 제작에는 수많은 익명의 사람이 참여했다.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희생자, 전문가들이다. © <액트오브킬링>

영화는 엔딩 크레딧을 통해 수많은 '익명의 존재'를 드러낸다. 감독은 익명 속에 희생자 유가족, 전문가가 있다고 했다. 가해자 이야기를 전면에 드러내면서도 감독이 사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 흔적이다. 영화는 가해자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익명으로 객관을 담보한다. 감독의 시선은 익명의 시선이다. 감독은 희생자의 목소리를 카메라 촬영과 편집 기법을 활용해 드러낸다.      

감정적 거리 두기

프레만은 화교 상인을 찾아가 ‘좋은 말로 할 때 돈을 내놓으라’고 한다. 겁에 질린 상인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돈을 내놓는다. 신문사 사장이라는 동조자는 ‘국가 활동을 선전해야 한다’며 자신과 함께 사진을 찍은 역대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부통령의 사진을 보여준다. 판차실라 간부는 ‘땅이 필요하다고 하면 돈도 받지 않고 준다’고 말한다. 2만 평이 넘는 그 땅을 자신이 키우는 새에게 줬다고 증언한다.

오펜하이머 감독은 학살자를 싸늘하게 바라본다. 이 시선이 카메라 앵글을 통해 영화 전체에 깔린다. 향수 시퀀스는 안와르와 그의 동료 헤르만이 영화 촬영을 위해 기차를 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안와르는 “나는 크리스챤 디올을 꼭 뿌리고 다니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나를 (선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며 헤르만에게 향수 사용을 권한다. 향수는 안와르에게 깔끔함과 번듯함, 멋짐의 상징이다. 그런데 감독은 그 시퀀스의 끝에 빨간 옷을 입고 자신이 빨간색에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안와르의 모습을 배치한다. 감출 수 없는 학살자의 피 냄새, 감독은 그 냄새를 영상으로 담았다. 

▲ 오펜하이머 감독은 학살자들과 감정적 거리를 유지하려고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위 모습은 다큐멘터리 초반의 폭포 장면인데, 감독의 디렉션 음성이 덧씌워졌다. © <액트오브킬링>

관객이 학살자의 감정에 이입되지 않도록 감독은 영화 내내 여러 장치를 사용한다. 가령, 아름다운 폭포를 바라보는 인물 영상에 “컷” “더 밝게 웃어라” 같은 제작자의 디렉션 오디오를 삽입한다. 영상의 아름다움과 웃음이 연출된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면서 등장인물을 조롱하는 것이다. 이 폭포 장면은 학살 내용을 다 보여준 뒤 마지막에 또 한 번 등장한다. 피해자가 안와르에게 메달을 걸어주며 "나를 죽여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때는 디렉션 음성을 넣지 않았다. 이런 대비는 관객이 느낄 역겨움을 극대화한다. 

샷의 사이즈도 감정이입을 막도록 활용된다. 보통 클로즈업은 감정이입을 원할 때 사용한다. 다큐멘터리는 학살자들이 자기 범죄를 설명할 때 웨스트샷이나 풀샷 중심으로 거리감을 주고, 희생자가 등장하거나 학살자가 죄를 뉘우치는 말을 할 때만 클로즈업을 사용한다. 그러나 학살자의 진심이 담긴 참회가 아닐 때는 아예 거리감 있는 풀샷을 배치해 어설픈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잘못의 도피처가 되는 통찰

이 영화를 보고 많은 비평가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생각난다고 했다. 특별히 악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이 생각 없이 국가 이념에 순응해 악을 자행한다는 개념이다. 아렌트는 우리 주변 상황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사유해 악을 차단해야 한다고 했다. 현대에 와서 이 개념은 구조에 포획돼 악을 행하는 개인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처럼 사용된다. 개인보다는 구조가 악의 근원이라는 식이다. 

▲ 갑자기 나오는 철도 건널목 장면은 감독이 강하게 메시지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 화면에는 “교통법규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을 지켜줍니다”라는 안내 음성이 나오는데, 법을 무시하는 영화 속 학살자의 무법성을 드러내려는 감독의 의도다. © <액트오브킬링>

이 영화는 국가와 사회 구조가 개인의 행동을 악으로 유도한다는 식으로 오용되는 ‘악의 평범성’ 개념을 거부한다. 영화는 개인 인터뷰, 집단의 행동, 제도적 상징을 차례대로 배치해 학살 구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화교한테 돈을 빼앗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이 시퀀스는 죽음 아니면 돈을 강요했다는 안와르의 인터뷰 장면부터 행사 준비를 위해 판차실라가 중국인을 착취하는 장면, 부통령이 참석한 판차실라의 행사 장면 그리고 ‘교통법규가 안전을 지켜준다’라는 철도 건널목 장면으로 구성된다. 이런 구성은 개인이 악의 구조를 만든다는 점을 드러낸다.

감독은 그들이 학살을 행할 때 국가 이념에 수동적으로 순응했다는 전제를 깬다. 사유가 없었다는 전제도 깬다. 학살자는 국영방송에 나와 자기가 찍은 학살 미화 영화를 홍보한다. 자신이 14살짜리 여아를 겁탈한 일, 동네 산책이라도 나온 듯 노래를 부르며 눈에 보이는 사람을 죽인 일을 자랑한다. 학살자는 육체적 쾌락을 위해, 이익을 위해 군부보다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학살을 했다. 개인의 이익 추구가 학살이라는 거악을 만든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한다. 


편집 : 김정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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