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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0년 끝날 전쟁에 뛰어든 다윗
[씨네토크] 듀폰에 맞선 변호사 이야기 ‘다크 워터스’
2020년 05월 14일 (목) 19:15:09 최유진 기자 gksmf2333@gmail.com

대형 마트 프라이팬 매대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섰다. 저렴한 행사상품 때문이다. “진짜 싸다” “코팅 좋아 보여” 몇 마디가 오간 뒤 다른 제품과 비교해보지도 않고 장바구니에 담는다. 그들에게 신중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PFOA free’ ‘과불화화합물 미검출’ 같은 표현이 광고에 담겼는지 확인해야 한다. 합리적인 가격을 내세워 ‘과불화옥탄산(PFOA, 또는 C-8)’이 우리 일상에 침투하고 있다. 인류와 지구의 안녕을 해치는 독성물질이다. 이를 물리치기 위한 전쟁에 뛰어든 사람이 미국 태프트 로펌 변호사 롭 빌럿이다. 

   
▲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변호사 롭 빌럿.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파커스버그에 있는 독성 화학물질 피해자 테넌트 소유 땅에 서있다. ⓒ <뉴욕타임스 매거진>

열망이 모여 탄생한 ‘영화’

“영화 같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영화에는 각본이 있다. 상상에서 나온 비현실적 요소들이 담긴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영화 같다”고 하진 않는다. 예상하지 못한, 기적 같은 일이 현실에서 펼쳐질 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영화 <다크 워터스>는 정말 영화 같다. 주인공부터 다른 배우들까지 ‘나라면’ 하기 힘들 것 같은 일을 해내기 때문이다. 부당한 현실에 저항하며 이상을 이뤄가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이 가진 열망은 기적 같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 작품은 2016년 1월 6일 자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특집기사 ‘듀폰에 최악의 악몽이 된 변호사’를 바탕으로 했다. 실제 1998년 변호사 롭 빌럿(마크 러팔로 분)은 젖소 190마리를 잃은 농부 윌버 테넌트를 만났다. 당시 롭은 화학기업을 변호하는 대형 로펌의 파트너였다. 테넌트는 거대 화학기업 듀폰이 유출한 화학물질 때문에 소들이 죽는다고 주장했다. 환경부는 듀폰이 폐기한 화학물질에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롭은 농부가 한 말이나 보내온 비디오 자료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고향이기도 한 웨스트버지니아로 갔다. 직접 병든 소들을 보고서 테넌트 소송을 맡았다. 

영화에서 롭은 듀폰이 보내온, 150만 쪽에 이르는 자료를 검토한다. 소송 제기를 방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보낸 엄청난 자료다. 이를 하나하나 검토해 그는 마법의 소재 ‘테프론’으로 둔갑시킨 화학물질 PFOA가 주민들의 중증 질병과 여직원 기형아 출산에 연관돼 있다는 근거를 찾아낸다. 듀폰을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자 비협조적 대응은 물론, 동료 변호사들의 우려와 마을 주민의 비난까지 쏟아진다. 지역 신문도 1면에 듀폰 고소를 비난하는 기사를 싣는다. 자본으로 지역사회를 장악한 듀폰이었다. 복지시설은 물론, 주민 일자리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활기 잃은 마을과 원망 가득한 사람들을 마주해야 하는 롭은 참담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열망이 꺼지지 않았다. 

   
▲ 마크 러팔로가 테넌트 소송을 맡은 롭 빌럿 역을 연기한다. ⓒ 이수C&E

듀폰은 자신들이 저지른 식수원 오염과 주민 질병 사이에 연관성이 밝혀져야 배상하겠다고 한다. 이에 롭은 2005년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한 역학조사 승인을 끌어낸다. 그러나 조사에 9년여 시간이 걸리자, 가까운 동료나 가족과도 거리가 멀어진다. 2012년에야 주민 6만9천명 혈액 샘플을 조사한 결과가 나온다. 식수원 오염으로 신장암, 고환암, 갑상선 질환, 자가전증, 고콜레스테롤, 궤양성 대장염 등 중증 질병이 발생한 사실이 밝혀진다. 

진실은 우연이 계속되어 별안간 나타나는 선물이 아님을 일깨운다. 누군가 자기 삶을 다 바쳐야 겨우 드러나는 것이다. 결과가 나오자, 듀폰은 바로 피해 보상 합의를 거부한다. 남은 방법은 소송밖에 없다. 롭의 투쟁은 계속된다. 가해자는 세계 1위라는 타이틀을 달고, 수십 조 원 연 매출을 올리는 거대기업이다. 피해자들은 죽은 듯이 지내야 했다. 그 와중에 테넌트도 숨졌다. 

2015년 법정에 선 롭에게, 판사는 “앞으로 도합 3,535건의 재판을 진행해야 하니 운이 좋다면 2890년에나 이 사건이 끝나겠다”라고 말한다. 이어 엔딩 자막이 나온다. ‘그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 이 세상에 아직도 PFOA가 존재하고, 인류의 99%가 이미 중독됐다.’ 이는 단순한 자막 한 줄이 아니다. 삶을 다 바쳐 힘겨운 싸움을 지속하게 하는 엄청난 불의다.  

미국 법정은 2017년 듀폰을 상대로 한 집단 소송 3,535건 중 일부에 6억7100만 달러 배상을 선고했다. 농부 윌버 테넌트가 처음 문제를 제기한 지 20년 만이고, <뉴욕타임스 매거진> 기사가 나온 지 한 해 만이다. 이후에도 롭 빌럿 변호사는 '3M'과 '케무어스'에 소송을 제기하며 싸우고 있다. 

   
▲ 영화 까메오로 등장한 버키 베일리는 실제 PFOA 피해자다. ⓒ Participant&Killer Films

이 영화에는 실제 PFOA 피해자 버키 베일리가 까메오로 출연했다. 그의 어머니는 듀폰 공장에서 일하며 독성물질에 노출돼 선천성 장애아를 낳았다. 집단소송 원고측 대표인 달린 키거와 조 키거 부부도 직접 영화 속에서 증언을 했다. 롭 빌럿과 사라 빌럿 부부는 출연은 물론, 제작 현장에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 마크 러팔로가 영화 시사회에서 변호사 롭 빌럿(왼쪽)과 찍은 사진을 개인 SNS에 게시했다. ⓒ Markruffalo 인스타그램

주연을 맡은 마크 러팔로는 영화와 현실 세계를 오가는 슈퍼히어로다. 그는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헐크’로 유명하다. 악당을 만나면 무섭게 돌변하는 헐크처럼, 불의에 맞서 강력하게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이다. 석유 시추 반대, 기후 변화 대응, 차별 정책 반대 등의 의견을 SNS에 올리고, ‘100% 재생에너지 캠페인’을 벌이기도 한다. 영화 <다크 워터스>는 ‘에코 헐크’로 불리는 마크 러팔로의 열정과 소신이 담긴 작품이다. 그는 토드 헤인즈 감독에게 자신이 생각한 각본을 보내는 열정을 보였다. 2019년 11월 미 하원 과학위원회에서 PFOA 규제 필요성을 증언하기도 했다. 러팔로는 이 영화를 통해 “환경 혁명을 이끌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피해자들 고통은 ‘현재진행형’

개인이 거대 권력에 맞서고 영웅으로 등극하는 서사는 익숙하다, ‘다윗과 골리앗’ 신화가 그렇듯이. 그러나 영화 <다크 워터스>는 승리에 취하지 않는다. 끊이지 않는 권력의 악행 속에서 다윗이 겪는 현실적 고뇌를 그려낸다. 주인공의 무기력한 일상과 불안에 떠는 몸짓을 카메라에 담는다. ‘옳은 일인 줄 알지만, 과연 나라면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관객 스스로 되뇌게 만든다. 상처투성이인 승리를 마냥 기뻐할 수 있는지 의문까지 들게 한다. 롭은 엄청난 사건에 신경이 매몰되는 병을 얻고 무능한 변호사, 무심한 가장으로 전락한다. 영화는 지리멸렬한 과정을 끈질기게 따라간다. 

그가 견뎌내는 인고의 세월은 자막으로 강조된다. 관객은 연도 자막이 바뀌면서 갈등이 해소되길 기대한다. 그러나 거대 권력의 방어막만 더 두터워질 뿐이다. 피해자들마저 더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 식으로 듀폰에 맞서기 힘들다고 롭에게 호소한다. 전형적이지 않은 서사구조 속에서, 짜릿한 영화적 순간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지극히 현실적인 고통을 주인공과 함께 느낄 뿐이다. 

   
▲ '10억분의 1'은 듀폰이 주장한 PFOA의 안전기준. 실제로는 안전 수치의 6배나 넘게 하천수를 오염시켰다. ⓒ 이수C&E

시간이 흐르는 자막은 영화 <스포트라이트>(2015)에서 빛을 발했다. 마크 러팔로가 제작과 주연을 맡은 영화다. 기자 마이크 레젠데스가 오랫동안 심층 취재한 끝에, 천주교 신부들이 어린아이들을 성추행하고 교단이 은폐해온 사실이 세상에 드러난다. 시간과 노력을 들인 만큼, 값진 특종을 얻어내는 결말이다. 그러나 관객은 썩 통쾌하지 않다. 피해자의 고통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다. 영화 <다크 워터스> 역시 그렇다. 무고한 이들에게 오랜 세월을 희생시키고 얻은 진실이 무엇인가? 프라이팬부터 콘택트렌즈, 장난감 매트 등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물품을 거쳐 우리 몸에 들어온 PFOA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듀폰이 원고 몇몇 사람에게 돈으로 배상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래 전에 화학기업이 저지른 잘못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유해 화학물질은 여전히 종식되지 않았다. 피해자는 지금까지도 속출하고 있고, 그들은 싸우고 있다. 옥시는 ‘가습기 살균제’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피해자 소송은 계속되고 있다. 익산 장점마을에서는 발암물질을 내뿜던 비료공장 때문에 주민 3분의 1이 암에 걸렸다. 영화는 끝났지만, 현실은 진행중이다. 분노와 참담함을 느끼는 이유다. 언제든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을 줄이려면, 부당한 권력에 맞서야 한다.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다윗이 많아져야 골리앗도 진실을 은폐하려는 악행을 멈추지 않겠는가?


편집 : 김성진 기자

[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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