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신지인 기자

'저녁이 있는 삶’에서 저녁은 하나의 은유다. 직장을 벗어나 원하는 활동을 할 체력과 환경만 주어진다면, 그 시간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다. 저녁이 있는 삶의 핵심은 직장과 휴식의 구분이다. 인공지능(AI) 기술 발전에 힘입어 디지털 플랫폼을 매개로 노동을 거래하는 ‘플랫폼 노동자’가 늘어나고 있다. 낮과 저녁의 경계를 자발적으로 허무는 사람들이다. 2019년 기준 한국고용정보원이 추정한 우리나라 플랫폼 노동자는 50만 명에 이른다.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이에게 플랫폼은 대안 노동시장이다. 전업주부가 대표적 사례다. 이들은 배우자에게 덜 의지한 채 여유자금을 만들고 싶지만, 온종일 직장에 얽매일 수 없다. 그 대신 자기 스케줄에 맞는 플랫폼 일자리를 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플랫폼 노동자를 대상으로 해당 업종을 택한 이유를 물었더니, ‘일하는 시간을 자유롭게 택할 수 있어서’ ‘다른 일을 하고 싶지만 못 구해서’라는 답변이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플랫폼 노동처럼 탄력적인 노동은 주부뿐 아니라 고학력, 고스펙에 밀린 노동자들을 고용시장 내부로 진입시킬 방안이 될 수 있다.

▲ 플랫폼 노동자는 개인사업자로 분류되어 노동법에 따른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 KBS

플랫폼 노동은 확대되고 있지만, 제도는 발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 기존 노동 규제와 노동 보호제도가 새로운 형태의 노동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다. 재즈 연주자가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연주하던 것을 가리키는 ‘긱(Gig)노동’은 플랫폼 노동의 안 좋은 면을 강조한 용어다.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성격이 잘 드러난다. 실제로 플랫폼 노동자는 법률상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사용자가 노동권 보장 의무를 지지 않는다. 플랫폼업체 또한 일시적 노동 중개만 할 뿐 고용 기간이나 질은 관리∙감독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다 보니 사업장에서는 폭언이나 폭행, 산업재해를 겪는 노동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 탓에 올 들어 열 명이 넘는 택배기사가 과로사로 우리 곁을 떠나갔다.

‘노동’의 협소한 정의 때문에, 플랫폼 노동자 보호 논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법원은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사업주로부터 지휘·감독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플랫폼 이동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 본다. 그러나 노동 선진국들은 이미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2015년 플랫폼 노동 이해관계자들이 공동의 행동강령을 마련했다. 플랫폼 노동자에 관한 최저 의무 기준을 규정하고, 별도 분쟁해결기구를 설치해 감시한다. 유럽의회는 첨단기술 시대 모든 유형의 노동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근로조건 지침을 마련했다. 이 지침에 따라 플랫폼 노동자도 근로조건, 근무시간, 근로계약 부문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됐다.

인공지능 기술 발달로 플랫폼 노동이 활성화한 것처럼 언제 또 다른 노동 형태가 나타날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나라 ‘노동’의 정의는 협소한데다 견고하기까지 하다. 보통직장, 정상노동의 개념은 바뀌어야 한다. 한창 일하는 한낮이 누군가에게는 평온한 휴식시간일 수 있다. 노동의 시차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노동권익 보호의 첫 걸음이다.


편집 : 이성현 PD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