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나는 숨쉴 수 없다’ ① 성폭력

지난 가을학기에 연재한 [청년기자들의 시선]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봄학기 [청년기자의 시선2]는 현상들 사이(Between)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갈등과 대립 너머(Beyond)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이번 주제는 ‘나는 숨쉴 수 없다’이다. 경찰에 목이 눌려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가 죽음 직전에 몇 번인가 울부짖었다는 이 말은, 코로나가 드러낸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의 외침이자 세상의 불평등과 편견, 차별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을 상징한다. 기존 삶의 방식과 인식을 혁신할 뉴노멀은 무엇인가? ‘성폭력’ ‘냄새’ 두 키워드로 제대로 숨쉴 세상을 생각한다. (편집자) 

공포스러웠던 기억, 그리고 후회

나 역시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 야간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골목길이었다. 자전거를 탄 젊은 남자가 내 엉덩이를 만지고 지나갔다. 나는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 남자는 내 얼굴까지 확인하며, 미소까지 짓는 여유를 보였다. 무사히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만 하면서 정신없이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해서는 긴장이 탁 풀려 엉엉 울었다. 또 한 번은 부산역에서 마주오던 중년 남자가 그랬다. 두 번 다 단순 성추행으로 끝나지 않을까 무서웠다. 나는 어렸고, 상대는 나보다 힘이 센 남자였다. 성추행 범에게 따졌다가 맞을 뻔도 했다. 만원버스에서 자기 엉덩이를 내 허벅지에 밀착시키던 아저씨는 오히려 당당했다.

몇 번 비슷한 일을 겪고 난 뒤부터 공공장소에서 나도 모르게 긴장한다. 역겨운 그때 기억들은 불쑥불쑥 고개를 든다. 오래 전 일이지만 그때 공포감과 충격, 불쾌감들은 설명되거나 해소되지 않았다. 성폭력 사건을 접할 때마다 그들에게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그땐 대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듣거나 배우지도 못했다. 그들이 처벌을 받았다면 이 분함이 조금이라도 해소됐을까? 전혀 죄의식이 없던 그들 모습을 떠올리면, 이후에도 같은 짓을 반복해서 저지르고 있을 것 같아, 후속범죄를 막지 못한 죄의식마저 든다.

▲ 살면서 성폭력 한 번 당하지 않은 여성이 있을까? 피해자가 되고 싶은 여성은 아무도 없다. 우리 사회는 피해를 당한 여성에게 피해자의 도리를 요구하면서 여성이 피해 사실을 밝히기 어렵게 만드는, 여성이 제대로 숨 쉴 수 없는 사회다. ⓒ pixabay

왜,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나

사회 초년생 시절, 일터에서 ‘나이든 남자’ 직원이 불쾌한 신체 접촉을 하던 일도 있었다. 다른 또래 여자 직원들도 겪었고, 우리는 불쾌감을 공유했다. 그러나 그에게 “이건 성희롱이거든요, 당장 그만 두세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가 가진 나이와 지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직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권리를 찾는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내 몸에 관한 권리를 지키는 이 당연한 일은 용기와 희생을 필요로 한다. 권리 구제 과정에서 수군거림의 대상이 되면서 또 다른 성폭력을 겪어야 한다. ‘피해 사실’ 앞에서 오히려 피해자가 부끄러움과 수치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주변에서 거꾸로 당하는 경우를 보며, 피해자들은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피하고, 참으면서 좋게 넘어가려 한다. 세상은 겨우 용기 낸 피해자를 응원하고 믿어주고, 다독여 주지 않는다. 성폭력이 일상적으로 지속되는 이유다.

얼마 전,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지인의 딸이 학교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같은 반 남자 아이가 처음엔 자신의 얼굴을 만졌고, 몸까지 더듬었다. 몇 번은 참았다고 한다. 나중에 엉덩이까지 만지자 아이는 부모님과 선생님께 이 사실을 알렸다. 남자 아이 보호자의 태도는 가관이었다. “어깨와 엉덩이가 헷갈렸나 보다”라는 황당한 말을 했다. 얼굴이든 어깨든 엉덩이든 타인의 신체를 마음대로 만지는 것은 성폭력이다. 가해자의 부모는 아이 행동이 잘못된 성폭력임을 일깨워주는 대신, 아이를 두둔해 더 큰 범죄자로 키우는 어리석은 방법을 택했다. 여자아이의 후유증은 심했다. 그때 공포감을 그림으로 그리고, 학교에 다녀와 울기도 했다. 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두고, 친구에게 자신이 쉽게 보인 것 같다며 자책까지 했다. 가해자는 당당하고 피해자가 자책하는 이상한 일이 이처럼 반복된다.

책임과 추모 사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을 둘러싸고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보수 진영은 이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모양새다. 진보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다 못해 버젓이 2차 가해를 저지른다. 듣도 보도 못한 ‘피해호소인’이라는 말을 쓴다. 그가 순수한 사람이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거나, 남성중심사회에서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다는 둥 공감 못할 말을 쏟아낸다. 요즘 나는 트윗을 모조리 차단한다. 박 전 시장을 두고 대단한 사람으로 추모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피해자가 문제가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해서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약자의 대변인’임을, 정의와 공정을 자처하던 진보에 대한 실망감이 크다. 그들은 심지어 피해자의 순결성을 따지거나 피해자의 변호인을 흠집 내는 등 음모론에 불을 지핀다.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고, 그가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성추문을 축소한다. 그저 진영 논리에 따라 성폭력 문제를 두둔한다면 진보는 약자의 대변자가 될 자격이 없다. 피해자의 증언이 있지만, 제대로 사실을 밝혀내고 처벌하지 못하게 된 것은 박 전 시장의 선택 때문이 아닌가. 그는 피해자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고 문제를 회피했다. 자기 죽음으로 피해자와 또 다른 여성들에게 2차 가해를 했다. 무책임한 그에게 나는 어떤 추모도 할 수 없다.

▲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서울시 인권 및 평등 촉구 공동행동 회원들은 ‘서울시장 위력에 의한 성폭력 인권위 직권조사 촉구 기자회견’을 했다. 시민들은 ‘박원순 죽음의 원인은 오직 박원순 자신일 뿐’이라는 플래카드 등을 들고 피해자를 응원했다. ⓒ <연합뉴스>

문제는 당신이다

논란이 한창인데, 한 일간지 인터넷 판에 김제시장 비서실에 여자 직원이 없다며 대단히 혁신적인 시정인양 홍보하는 기사가 올라왔다. 댓글엔 한술 더 떠 ‘펜스 룰’을 적용해야 한다고 난리였다.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가 아내 아닌 다른 여성과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는 발언에서 나온 펜스 룰은 명백한 '여성 지우기'다. 동료나 직업인으로 여성을 존중하는 대신 성적 대상으로 격하하고, 남성중심사회를 공고히 하는 펜스 룰은 여성을 차별하는 시대역행적 행태다.

범죄를 저지른 남성이 문제지, 피해를 당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이 무슨 죄가 있나? 그게 올바른 범죄예방이 될 수 있나? 왜 성폭력 문제에선 가해자가 피해자 보다 더 당당한가? 왜 피해자는 수치감을 느끼며 부끄러워해야 하고 숨어야 하는가? 그럼 위계를 이용해 반복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남성’ 정치인이 이토록 많으니 그럴 범죄를 일으키지 않는 여성에게만 고위직을 허락하는 것은 어떤가? 이런 논의는 불가능하다. 이 사회가 남성중심사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당신이다. 안희정과 오거돈의 피해자들에게 ‘꽃뱀’을 운운하던 당신들이,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를 만들어 온 공범이다. 당신들의 행위가 지금 이 땅의 여성이, 딸이, 여자아이가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게 한다. 바로 당신이 우리들 여성이 제대로 숨 쉴 수 없게 만든다.


편집 : 방재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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