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가족'

▲ 정소희 PD

2016년 9월 10일, 조카가 태어났다. 언니 부부는 아기를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건강한 여아를 낳았다. 양가의 첫 손주라, 조카는 친척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가족 모임은 조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외식 장소를 정할 때는 조카가 좋아하는 음식을 파는 곳으로 가고, 가족 단톡방에는 조카의 성장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다. 이모, 할머니, 할아버지는 조카의 동영상이 보고 싶어 사진과 영상을 보고 또 본다. 조카가 영상통화를 ‘허락’하는 날에는 소감을 말하기 바쁘다. 축복 같은 이 아이는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하고 있다.

아이에 심드렁하던 나도 조카를 사랑하게 됐다. 목도 가누지 못하던 신생아가 뒤집기를 시작할 때, 엉금엉금 기어 다니던 때, 걸음마, 옹알이, ‘소희이모’라고 처음 불러주던 때를 모두 기억한다. 그런데 아이와 둘만 있는 시간이 마냥 즐겁지는 않다. 조카와 함께 있을 때는 항상 조카가 다칠까 긴장한다. 밥은 먹었는지, 유치원은 어떤지, 숫자를 세는지 묻고 나면 질문 밑천도 떨어진다. 인형놀이나 블록쌓기도 내게는 재미가 없다. 조카를 왜 사랑하는 걸까, 생각하다 보면 지금까지 내가 맺어 온 인간관계와 분명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귀여워서, 피붙이니까 등 이유를 꼽아보지만, 뭔가 부족하다. 그래도 조카가 태어난 뒤로 조카가 살아갈 한국에 관해 자주 고민하게 됐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조카의 삶을 들여다보다, 오랫동안 잊고 지낸 문제를 상기했다. 급식이다. 언니가 조카의 유치원 식단 사진을 보여줄 때, 나는 경악했다. 식판에는 5살 아이가 먹기 힘든 매운 김치, 건더기가 부족한 국, 즉석식품, 어른 입맛에도 안 맞을 나물 반찬이 있었다. 어른 식사량 삼 분의 일 정도일 텐데 교육기관에서 신경 쓴 식단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언니는 가능하면 반 조리된 즉석식품을 먹이지 않으려 하는데 헛수고가 될 것 같았다.

서울시는 자치구 내 어린이집, 복지시설 같은 공공 급식시설과 산지 지자체를 연결해 ‘도농상생 공공급식’ 체계를 구축했다. 시설은 어린이에게 질 좋은 로컬푸드, 친환경 급식을 제공하고 지자체는 안정적인 농산물 수요를 기대할 수 있어 상부상조다. 조카는 작년 말 ‘비리 유치원 파동’으로 떠들썩했던 수도권 신도시에 산다. 지역 학부모들이 집회를 열어 항의해봤지만 나아진 것은 별로 없다. 이전에는 엄마가 아이를 통해 건네 듣던 식단이 SNS 사진으로 올라오게 된 게 변화다. 집에서 간식까지 챙겨 먹는 조카는 유치원에 가면 흰 밥만 먹고 온다. 언니는 급식 문제에 공감하는 학부모가 많지만, 학부모는 철저히 ‘을’이라고 말했다. 공립유치원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사립유치원이 문 닫으면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서다.

▲ 마이클 무어의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에는 셰프가 정성껏 차린 음식을 먹는 프랑스 어린이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 판씨네마

다큐멘터리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은 프랑스 한 초등학교를 점심시간에 방문한다. 셰프가 맛과 영양을 고려해 식단을 짜고 조리하는 낯선 모습이 보인다. 프랑스는 점심시간도 수업의 연장으로 본다. 수십 종 치즈를 냉장고에 보관하는 이유는 좋은 식자재로 만든 음식이 아이들의 미각과 감성을 자극할 수 있다고 믿어서다. 아이는 좋은 음식을 통해 식사예절을 배우고 건강과 직결된 식생활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집, 유치원은 의무교육기관이 아니지만, 정부에서 교육비와 보육비를 지원받는다. 지난 유치원 파동 때,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사립유치원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해 제도적 노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유아교육의 의무교육화에 관한 의견도 내비쳤다. 전국적으로 의무교육과정의 무상급식이 확대되고 있지만, 질적 혁신도 동반해야 하지 않을까? 어린이집, 유치원, 초∙중∙고교 모두 로컬푸드와 친환경 급식을 지향하고 건강하고 맛있는 먹거리를 제공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먹거리만이 문제일까? 유치원 3법이 통과되길 바라지만 국회라는 난관에 부닥쳤고, 입시 위주 교육도 바뀌길 바라지만 정부의 정시 확대 조처로 역행하고 있다. 외모지상주의 문화는 갈수록 기승을 부린다. 조카가 자라는 세상은 더욱더 성평등한 한국이 되길 기대한다. 타인의 시선만 신경 쓰기보다 스스로에 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길 바란다. 혹시 대학에 다닐 거라면 학비도 싸졌으면 좋겠다. 부모에게서 독립할 때, 주거 복지 정책의 혜택을 누리길 바란다. 취업을 할 거라면 저녁 있는 삶을 보장하고 고용이 안정된 질 좋은 일자리들을 고르고 고를 수 있기를, 사업을 할 거라면 임차인의 권리가 지금보다는 훨씬 보장된다면 좋겠다. 혹시나 인생에서 실패하고 주저할 일이 있다면, 사회가 청년들의 실패를 이해하고 재기를 돕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은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가장 바라게 된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저 건강하기만을 바란다는 부모 말에 공감하게 됐다. 잘 먹고, 건강하게 뛰노는 조카의 모습을 보면 아프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기만을 기도한다. 아이가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하고, 사회가 건강해야 아이도 건강하다. 안전한 먹거리가 출발점이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윤재영 PD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