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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이 해방되는 날
[상상사전] '세탁기'
2019년 11월 27일 (수) 14:00:14 박동주 기자 shane9110@naver.com
   
▲ 박동주 기자

많은 역사가는 세계가 전근대에서 근대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로 산업혁명을 꼽는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소비재와 경공업을 중심으로 일어난 변화가 1차산업혁명이다. 19세기 중후반에 전기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불러일으킨 변화는 2차산업혁명이다. 2차산업혁명 때 과학기술이 많이 발전했는데, 특히 전기 관련 기술이 크게 진보했다. 여러 분야 중 일상생활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친 것도 전기 기술 진보였다.

전기 기술 발전과 보급은 세탁기, 진공청소기, 다리미 같은 가전제품 발달로 이어졌다. 가전제품 발달은 가사노동을 전적으로 떠맡고 있던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을 크게 줄였다. 이런 이유로 청소기나 세탁기는 가격이 비싼데도 빠르게 확산해, 중산층 가정에서 없으면 안 되는 물건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 도입으로 여성들이 담당하는 가사노동이 줄었을까?

미국 펜실베니아대 과학사회학과 루스 코완 교수에 따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미국 여성이 가사노동에 투여하는 평균 시간은 변화가 없었다. 집마다 세탁기를 들여놓기 전 미국에서 빨래는 여성만이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가족 여럿이 나눠서 해야 하는 노동이었다. 특히 여성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부피가 큰 빨래는 남성인 아버지나 아들이 담당했다. 세탁기를 들여놓은 뒤 상황은 달라졌다. 어느 정도 부피가 큰 빨래까지 세탁기로 빨 수 있게 되자, 빨래는 온전히 여성의 몫이 된 것이다.

   
▲ 세탁기는 가사노동의 강도를 현저히 낮췄지만, 여성이 가사노동에 들이는 시간에는 변화가 없었다. ⓒ pixabay

결국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의 도입으로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된 건 여성이 아닌, 남성이었다. 빨래를 빨래판에 내리치거나 주무르는 일, 또는 이불을 세게 쳐 먼지를 터는 고역이 세탁기나 청소기라는 가전제품 등장으로 노동 강도가 낮아진 건 사실이다. 그런데도 가사노동 시간이 줄지 않았다는 건 결국 여성이 다른 사람 도움 없이, 홀로 더 자주 가사노동을 해야 했다는 뜻이다.

가사노동을 도와주는 가전제품은 오히려 여성이 하는 가사노동의 가치를 저평가할 우려가 높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출산 후 집안일로 팔목이 아파 병원에 간 김지영에게 남자 의사는 되레 비꼬는 말을 한다.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드냐?” 이 말은 여성이 맡고 있던 가사노동을 상당 부분 기계에 맡겨 여성이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고 여기는 남성의 인식을 보여준다. 사실 한국 남성들은 예전부터 집안일은 사내가 할 짓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2016년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한국 남성 가사노동 시간은 평일 하루 39분이다. 1999년 조사 결과보다 9분가량 늘어난 수치다. 2016년 한국 여성 가사노동 시간은 3시간 25분이다. ‘82년생 김지영’ 말마따나 더러운 옷들이 스스로 세탁기에 걸어 들어가 물과 세제를 뒤집어쓰고, 세탁이 끝나면 다시 걸어 나와 건조대에 올라가지는 않는다. 청소기가 물걸레 들고 다니면서 닦고 빨고 스스로 널려있지도 않는다. 앞으로 기술이 더 발달한다면 여성은 그들에게 집중된 가사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기술 발달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남성이 변화하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편집 : 유연지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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