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기후위기 시대, 폭염 취약지대를 가다

“더워도 그냥 버티면서 사는 거지. 집에만 있으면 갑갑하니까 나오는 게 나아. 크게 바라는 것도 없고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뭐.”

최고기온이 33도까지 올라갔던 지난달 20일 서울 아현동 북쪽지구 ‘달동네’. 인생의 반 이상을 이곳에서 살았다는 홍순식(85), 김임복(80) 두 할머니는 지난해에 이어 찾아 온 땡볕 더위에 ‘졌다’는 표정이었다. 유럽 등지를 휩쓴 폭염이 국내에서도 ‘불지옥반도’ ‘한프리카’ 등의 신조어를 만들며 기승을 부린 지난여름, 독거노인 등 취약계층이 모여 사는 아현동 연립주택 밀집지대는 특히 직격탄을 맞았다.

무더위 속 드러난 가난의 속살

 
재개발계획이 추진되고 있어 곳곳이 빈집인 서울 아현동 달동네. 금이 가고 이끼가 낀 담벼락 밖에 덩그러니 놓인 평상이 노인정 구실을 한다. 반대편 구역에는 고층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고 있다. © 정재원

곳곳에 금이 간 건물 벽, 푸르죽죽한 이끼가 잔뜩 낀 담장, 비좁은 골목이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이곳에선 더위의 맹폭에 지친 삶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문이란 문은 다 열어놓은 집, 커튼으로 위쪽만 살짝 가린 채 창을 활짝 열어놓은 집들이 낡은 가구 등 옹색한 살림살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동차도 올라가기 힘겨울 만큼 가파르고 울퉁불퉁한 오르막길 옆 평상에는 70~80대로 보이는 남녀 노인 넷이 하얀 민소매 속옷 차림으로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맞은편 재개발구역 아파트 공사현장 등에서 날아오는 먼지 탓인지 이들은 연신 기침을 했다. 

영화 기생충에서 ‘동네 슈퍼’와 ‘빗속 귀가’ 장면 촬영지인 아현동 699번지를 마주하고 있는 이 동네는 조만간 건너편 구역처럼 재개발이 시작될 예정이라 곳곳에 빈 집이 많다. 이삿짐센터 전화번호가 적힌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은 허름한 집들에는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5만원’ 등 싼 집세를 보고 당분간 눌러 앉은 이들이 허다하다. 

“처음엔 동네 밑쪽에서 살았지, 근데 살다보니 점점 더 위로 올라오게 됐어.”
“원래는 다른 동네에 살았는데 그쪽도 재개발인가 뭔가 한다고 해서 나왔어. 근데 여기도 또 재개발을 한다네.”

집 안에서 선풍기 하나로 더위를 버티던 주민들도 오후가 되자 하나 둘씩 밖으로 나와 골목길 평상에 ‘작은 노인정’을 만든다.

“노인정? 노인정 가려면 여기서 걸어서 한참을 내려가야 하는데, 이 몸을 끌고 어떻게 가. 이 평상이 노인정이지. 여기가 볕이 들어서 가림막 같은 거라도 하나 해줬으면 좋겠는데, 동사무소랑 의원인지 뭐시긴지가 와서 보고 간지 한참 됐는데 소식이 없어. 더 큰 건 바라지도 않고 그 정도만 해줘도 좋겠는데...”

연신 부채질을 하던 할머니들은 낮부터 맹렬히 활동 중인 모기를 쫓기 위해 스프레이를 뿌리기도 했다.

▲ 서울 아현동 북쪽지구 골목길 평상에서 더위를 피하던 한 주민이 모기퇴치용 스프레이를 뿌리려 하고 있다. © 정재원

폭우와 장마를 겁내며 여름 보내기도

아현동 달동네에서 약 5킬로미터(km) 떨어진 홍제동 문화촌길 주민들은 폭염보다 폭우를 두려워하며 여름을 보냈다. 이 동네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는 조부연(80)씨는 마을의 배수시설이 낡아 큰 비만 오면 홍역을 치른다고 호소했다.

“30년을 여기서 살았는데, 비만 오면 너무 힘들고 무서워 죽겠어. 보기엔 깨끗해 보이지? 우리가 직접 바른 거야. 일해 줄 사람이 누가 있어. 비가 빠져나가질 않아서 골을 냈는데도 물이 안 빠져. 수도관도 맨날 터져서 뜯고 붙이고 집이 완전 난리야.”

▲ 서울 홍제동 한 주민의 집 벽과 천장에 비 피해, 누수로 얼룩진 부분을 종이로 덧발라 가려놓은 모습. © 정재원

조씨는 “이 동네 집들이 대부분 지은 지 50년 넘은 낡은 주택이어서 습기가 차고 바퀴벌레가 끓는데, 주택공사가 고쳐준다고 하고는 소식이 없다”고 말했다. 또 “매년 여름마다 하수도 등에 문제가 생기는데 동사무소 같은 곳 찾아가 봐도 도와주는 곳이 없다”고 덧붙였다. 주민들은 앞으로 폭우와 홍수가 더 큰 규모로 닥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팝콘 터지듯 폭염 피해 한꺼번에 발생”

유엔(UN) 산하조직인 기후변화에관한정부간협의체(IPCC)는 2012년, 2018년에 발간한 특별보고서 등에서 지구온난화가 현재 속도로 진행될 경우 극단적 폭염과 폭우, 혹한 등 이상기후가 더욱 잦아질 것이며 그 피해는 대응 수단이 없는 취약계층에게 가장 먼저 집중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기과학자인 조천호(58) 전 국립기상과학원장은 지난 5일 <단비뉴스>와 주고받은 이메일 인터뷰에서 “현재 우리나라 폭염 일수는 전국 평균 7일이지만 21세기 말에는 2~4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 된다”며 “날씨의 변동 폭이 커져 가뭄과 홍수라는 상반된 극한 날씨가 자주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폭염은 단순히 기온이 올라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생명까지 위협하는 재앙으로 (폭염이) 얼마나 길게 이어지느냐가 사망자 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조 전 원장은 특히 “폭염 피해는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엔 껍데기가 약한 옥수수 알 몇 개가 터지다가 어느 순간 모든 팝콘이 한꺼번에 터지는 것처럼 그 피해가 어느 순간 급격히 발생한다”고 강조했다.

▲ 서울 홍제동 주민들이 더위를 피해 부채를 들고 골목길에 나와 앉았다가 <단비뉴스> 기자(맨 오른쪽)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정재원

정부와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도 갈수록 심해지는 폭염, 폭우 등 기상이변에 대비해 독거노인, 노숙인을 포함한 5대 취약계층 집중관리 등 대책을 내놨다. 그러나 상당수 대책이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정부가 재난 문자로 폭염 주의보나 경보 등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서비스의 경우 노인가구 등에 잘 전달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고, 주민센터와 보건소 등에 설치된 ‘무더위 쉼터’도 몸이 불편한 취약계층 노인들이 찾기엔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국에너지공단이 주거취약계층에게 지원하는 ‘에너지 바우처’ 제도도 냉방기기 자체가 없는 쪽방촌 등에 전기료를 지원해봐야 큰 의미가 없다는 비판이 있다.

서울연구원 조항문 선임연구위원은 “취약계층의 에너지 비용을 지원하는 에너지바우처 같은 경우 지역마다, 집마다 상황이 다른데 산업자원부에서 그런 점을 고려하지 않고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취약계층의 폭염 피해는 환기와 단열이 안 돼 더위와 추위를 다 겪을 수밖에 없는 주거환경 자체의 문제”라며 “한시적 해결책보다 종합적으로 주거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도의 한계와 함께 취약계층을 지원할 인력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서울 돈의동 쪽방촌의 주민공동시설 '새뜰집' 최상관(41) 담당자는 <단비뉴스> 전화 인터뷰에서 “취약계층 폭염 대응책의 제일 심각한 문제는 이들을 제대로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새뜰집에서 관리하고 있는 쪽방촌 주민들은 550여 명인데, 이들을 단 6명의 직원이 담당하고 있다”며 “(직원들의) 손이 취약계층 주민들에게 더 닿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아쉬움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6일까지 발생한 온열질환자 수는 1816명, 사망자는 10명이다. 사상자 중 4분의 1 가량이 65세 이상 노인이다.


편집 : 홍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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