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케치북] '졸라맨' 우화, 대중사회의 풍경

▲ 이연주 PD

눈을 떠보니 나는 졸라맨이 되어 있었다. 내 손도 선, 발도 선, 얼굴도 선뿐이었다. 내가 졸라맨이 되었다는 것에 충격과 신기함을 느끼는 순간, 깨지는 소리와 고성에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온갖 낙서가 되어 있는 벽과 바닥, 10평도 되지 않는 방안엔 100명의 졸라맨이 있었다. 그들은 다 같은 졸라맨처럼 보였지만, 한쪽은 치마를 한쪽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들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끼리 편을 나눠 싸우고 있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 싸우는 거요?” 

내가 말을 건네자, 시장통 같았던 방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졸라맨들 시선이 동시에 나에게 향했다. 틈 사이에서 나처럼 아무것도 입지 않은 졸라맨이 다가왔다.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할 겁니까?” 

그의 한쪽 팔엔 바지가 다른 쪽엔 치마가 걸려 있었다. 나는 시끄러운 싸움에 휘말리기 싫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졸라맨들이 나를 자기편으로 데려가기 위해 나에게 뭐라고 말을 걸다가 또다시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방 한구석에 있는 문으로 도망쳤다.

문을 열자 두 번째 방이 나왔다. 동양적인 벽지와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기둥이 기이하게 혼재하는 이 방 중간엔 커다란 원탁이 있었다. 원탁엔 사람의 얼굴을 가졌지만 몸은 졸라맨인 이상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예전에 도덕 교과서에서 사진으로 본 사람들 같았다. 이들은 ‘사회, Society, 社會, societe…’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듣지 않으면서 자기가 할 말만 하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똑같은 옷을 입은 졸라맨들이 똑같은 노트를 들고 그들의 말을 받아 적고 있었다. 모두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받아 적고 있었다. “정의로운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말을 듣다가 재미가 없어서 다른 방으로 향했다.

▲ 스마트폰이 인간의 생각과 일상을 지배하는 사회가 도래하면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 pxhere

세 번째 방은 천장까지 빼곡히 액자들이 걸려있는 전시회장이었다. 큐레이터로 보이는 졸라맨이 도금한 액자로 다가가 설명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큐레이터는 다음 그림으로 이동했다. 관람하는 졸라맨들은 큐레이터가 지나친 그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던 그림을 보니 하얀 배경에 작은 동그라미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쳐다봐도 다른 그림은 없었다. 큐레이터가 설명하지 않은 그림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네 번째 방에는 한쪽 벽에 커다란 화면이 있었다. 졸라맨들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엔 5초마다 새로운 영상이 등장했다. 졸라맨들은 연인이 헤어지는 장면에선 울었다가, 음주운전 영상에는 화냈다가, 개그맨이 나올 땐 웃었다가 하면서 5초마다 표정이 바뀌었다. 자신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느끼는지는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마지막 방에 들어서자 나는 사람이 되었다. 마지막 방은 캄캄했다. 내가 들어왔던 문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아무도 없었다. 째깍째깍하는 시계 초침소리만 들렸다. 적막함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줬다. 가만히 누워 시계 초침소리를 들었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 초침소리가 나를 에워싸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나는 다시 졸라맨이 되었다.


편집 : 조현아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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