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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인의 기억’으로 되살린 ‘무명 민주열사’
[미디어비평] SBS스페셜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
2019년 07월 29일 (월) 11:01:51 최유진 기자 gksmf2333@gmail.com
   
▲ 최유진 기자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내리다가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씨돌 아저씨다!’ 아저씨가 SBS 프로그램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4년여 시간이 흘렀지만, 웃통을 벗고 환히 웃는 그 얼굴을 잊지 않았다. 한 여행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취재작가로 일하며 김씨돌 씨를 알게 됐다. 

정선 봉화치 마을에 사는 그는 흙냄새를 맡으며 감탄하고 열매를 따 먹으면 꼭 산에 감사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농약을 뿌리지 않고, 야생 동물이 숨도록 잡초도 베지 않았다. ‘실속 없는 유기 농사꾼이자 괴짜 자연인’, 이렇게만 그를 기억해왔다. SBS 스페셜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을 보면, 그는 3개나 되는 이름만큼 곡절 많은 인생사를 엮어왔다. 화면 속에 펼쳐진 그의 삶은 ‘민주주의’ 그 자체였다. 

1987년 ‘정연관 상병 의문사’ 진상을 밝혀냈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는 구조 작업에 뛰어들어 사람을 살려냈다. 정선에서 산불 감시 활동을 했고, 떼죽음을 당하고 남은 토종벌을 지켜내려 나서기도 했다. “왜 그런 삶을 사셨어요”라는 PD의 질문은 시청자가 가질만한 의구심을 대변하는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평생을 생판 남의 일에 뛰어들어 살았다. 자기 이익에만 급급한 현실에서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김씨돌 씨가 내놓은 답변이 충격과 반전을 준다. 경련하는 그의 오른손과 함께 펜을 쥔 왼손이 비친다. 한 글자 한 글자 어렵게 써 내려가지만, 망설임 없는 생각이  드러난다. 카메라는 종이 위 펜촉을 따라 더디게 따라간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지요.” 이 다큐멘터리가 단순히 개인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가치를 다루는 작품으로 전환하는 지점이며, 시청자를 울리는 이른바 ‘킬링 포인트’다.

‘괴짜 자연인’, 알고 보니 ‘민주열사’

   
▲ 김용현 씨는 과거 민주화 운동에 가담해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다리와 허리 통증을 앓고 있다. ⓒ SBS

지난달 26일은 ‘세계 고문 희생자 지원의 날’이었다. ‘괴짜 자연인’으로 알고 있던 김씨돌 씨는 과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고문으로 숨져간 박종철, 이한열 같은 민주열사 유가족과 함께 투쟁하기도 했다. 그는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다. 프로그램이 방송될 때는 기초생활 수급자로 강원도에 있는 한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경제적 여유가 없어 재활치료도 제대로 못 받는 처지였다. 군부 독재에 만신창이가 된 김씨돌 씨의 ‘현재’ 모습이다. 노태우를 비롯한 고문 가해자들은 법적 심판을 받았지만, 피해자들은 여전히 ‘치유’받지 못했다. 격동의 투쟁 현장에 있던 그를 기억해주는 이는 없다.

방송 이후 그에게 응원 편지와 후원금을 보내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를 독립유공자로 지정해달라는 국민청원도 7만5천여 명(7월 17일 기준)에 이른다. 십시일반 정성이 모여 현재 그는 서울의 한 대형 병원에 입원해있다. 방송에 따른 일시적 효과일 뿐, 그의 삶은 아직도 나아진 것이 없다.

   
▲ 6월 17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김용현 씨를 독립유공자로 지정해달라는 국민청원 글이 게시됐다. ⓒ 청와대

공권력에 고문 피해를 본 국민은 수없이 많다. 미디어가 주목하는 희생자는 그중 일부다. 민주투사에서 유력 정치인이 된 이야기는 영화가 되고, 열사로 조명된 이들은 기념사업도 치러진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잘 알려진 극소수 사람뿐 아니라 김씨돌 씨 같은 수많은 평범한 이들에게서 시작됐다.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숨겨진 과거사 ‘조각 맞추기’

"다큐멘터리는 스토리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실존적 존재(사회적 행위자)를 통해 상황과 사건을 제시한다.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분명한 시선을 가지고, 비유나 상상이 아니라 입증된 사실에 근거해 역사적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게 한다."

빌 니콜스(Bill Nichols)가 언급한 다큐멘터리 정의다. 김씨돌에 관한 상황과 사건을 찾고, 이를 보여줄 증거 자료를 수집해 조각들을 짜 맞춰보면 한 사람의 일생을 넘어선, 우리 사회의 과거사를 보여주는 큰 그림이 된다. 반민주·반인권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진실화해위원회가 5년 활동 끝에 내놓은 종합보고서에는 수많은 인권침해 ‘각하’ 사건이 기록돼있다. 이 기록을 조명하면 시청자의 경험치는 희생당한 국민 개개인을 넘어 민주주의 수난사를 이해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제작진의 기획의도는 여기에 닿아있다. 

   
▲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인권침해 사건 편에는 ‘김용현 미행 감시 및 가혹행위 의혹사건’이 2008년 ‘각하’로 결정된 사실이 적시돼 있다. ⓒ SBS

제작진은 과거 신문과 방송, 잡지를 뒤지며 김 씨에 관한 흔적을 찾는다. 1987년 6월 29일 자 미국 주간지 <TIME>에 그가 찍힌 사진이 실렸다. 사진기자 그렉 데이비스가 포착한 당시 상황을 알고자 제작진은 일본 군마현 도네군으로 향한다. 그의 아내인 다큐멘터리 감독 사카타 마사코가 이 작품의 ‘엔딩’을 장식한다.

"사진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감명했습니다. 이 사람뿐 아니라 그 외에도 더 많은 사람이 (사진 속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더 다양한 드라마가 있을 것 같아요."

김씨돌 씨가 병실에서 제작진에게 손 흔들며 인사한 장면에 이어 나온 인터뷰다. 그러나 주인공 김씨돌 씨와 작별하면서 프로그램이 끝날 것이라는 클리셰가 깨져버린다. 주연과는 무관해 보이는 타국 땅의 조연이 사진 한 장을 놓고 그 속에 찍힌 인물들의 인생을 언급한다.

제작진은 그 인물의 인생을 역사로 확장한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친 이들을 포착한 사진 한 장에 웅장한 음악과 도전적인 내레이션이 깔린다. 그 속에 사람들이 하나, 둘 애니메이션 효과로 채워지면서 금세 군중을 이룬다. 어깨동무로 뭉친 이들은 살아 움직일 듯하다. 꿈틀대는 ‘민주화’ 열기를 표상하는 장면 속에 시청자들이 빨려 들어간다. 거대한 과거사를 담은 그림 속에 ‘김씨돌 씨’도 한 조각으로 존재한다.

   
▲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취재한

‘역사에 대한 증언’이 된 33명 인터뷰 기록

‘인물 뉴스’는 ‘개인 알리기’로 귀결되기 쉽다. 실제 국내 일간지 게이트 키퍼들의 손을 거친 인물 뉴스에 고위 관리, 기업체 대표 같은 남성 상류층이 편향적으로 많이 보도됐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인물 뉴스를 ‘연성 뉴스’ 범주로 분류하는 학자도 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공익 보도로 이어지기 어려운 걸까?

<뉴욕타임스>의 부음기사를 분석한 저널리스트 파워스(Powers, 2002)는 인물 뉴스를 보통 사람의 진가를 찾아 인정해 주는 개념으로 정의했다. 이에 따르면 이 다큐멘터리는 충실한 인물 뉴스다.     

   
▲ 실명으로 인터뷰에 응한 33명을 비롯해 익명의 동네 주민들까지 김씨돌 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 SBS

이 작품은 세상을 위해 헌신한 이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여준다. 김씨돌 씨는 굳은 얼굴 탓에 계속 침이 흘러 제대로 말할 수도 없다. 사회복지사가 보살펴주지만, 실은 24시간 옆에서 수발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온몸에 고통만 남았다.

카메라의 시선은 그에게서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로 옮겨 간다. 정선, 포항, 인천, 서울 그리고 일본의 시골 마을까지 카메라는 이곳저곳 바쁘게 옮겨 다닌다. 2부작 다큐멘터리에 총 33명이 실명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농민, 종교인, 정치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등장해 김씨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삶이 얼마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가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주변인들의 ‘기억’이 더해져 세 개의 이름을 가진 한 사람에 관한 서사가 완성된다. ‘기억의 기록’은 하나의 사실을 위한 ‘증언’이 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제 몸이 부서지게 살아온 이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그런 누군가가, 바로 우리 곁에 있다. 타이틀은 주제 의식을 절절히 담아낸다. 그래서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이다.


편집 : 박동주 기자

[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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