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특강] 이주헌 미술평론가
주제 ② 서양 신화미술의 이해

세계 어디나 신화가 존재한다. 멀게는 서구 그리스·로마신화부터, 가깝게는 우리 단군신화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신화란 무엇일까? 옛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었겠지만, 오늘날에는 아니다. 일반 교양이나 지적 즐거움의 대상일 뿐,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화는 왜 생겨났고 시간이 흐르며 그 의미는 어떻게 변했을까? 현대인에게 신화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걸까?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서양 신화미술의 이해’를 주제로 두 번째 강연을 이어갔다.

▲ 이주헌 미술평론가는 신화의 기원을 설명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 김서윤

신들의 이야기는 저절로 생기지 않았다

그는 ‘신화는 왜 만들어졌을까’라는 화두를 던진 뒤 여러 학설을 소개했다. 기원전에 활동한 신화학자 에우헤메로스는 신화가 태고의 왕이나 영웅을 신격화한 데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의 일대기가 더욱 부풀려져 구전되다 보니 ‘신들의 이야기’가 됐다는 설이다. 종교학자 윌리엄 로버트슨 스미스는 의식, 제례의 원초적 이유나 배경이 소실된 상황에서, 그 권위 회복을 위해 고안된 이야기가 바로 신화라고 주장했다.

▲ 고대 그리스인들은 파도를 포세이돈의 분노로 대유했다. 사진은 월터 크레인 작 ‘넵튠의 말들’. ⓒ Flickr

막스 뮐러는 신화가 자연현상의 알레고리라고 주장했다. ‘알레고리’란 추상적 생각이나 개념을 의인화하거나 동물, 식물 형상으로 바꿔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은유, 직유, 대유의 개념과도 비슷하다. 예를 들어 파도가 거세게 치면 ‘바다가 노했다’고 인격화하는 식이다. 다만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신의 인격을 부여했다. 자연현상뿐 아니다. 아테나가 지혜를, 아프로디테가 욕망을 상징하듯, 정신적인 관념도 알레고리의 대상이 된다.

이주헌 평론가는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시각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신화는 아득한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다. 네안데르탈인의 무덤에서 발굴된 무기, 연장 등 부장품은 인간이 유한함을 인식하고 그 사실과 타협하기 위한 대응논리로 사후세계를 상상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사시대 인류는 험난한 자연환경에 무력했다. 그럼에도 절망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신화가 전승됐다는 것이다. 이 평론가는 “이런 관점에서 신화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본능적 직관의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신화와 이성의 영역을 구분한 고대인들

“현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종교의 기원이 기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복을 준 것은 로고스였습니다. 대신 로고스는 죽음 이후에 뭐가 있는지, 삶의 궁극적 가치가 무엇인지 답해주지 않죠. 그들은 로고스와 뮈토스의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로고스(이성)라고 하면, 거창한 인식론이나 윤리론 같은 철학을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논리적인 사고능력은 옛 사람에게도 존재했다. 꾸준한 관찰과 경험으로 물소 떼의 움직임을 파악하면 더 효율적인 사냥이 가능하다. 일정 주기로 반복되는 기후를 경험하다 보면 미리 대응할 수 있게 된다. 이 평론가는 이처럼 인류가 성공적으로 살아남을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은 로고스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지, 왜 죽는지, 죽은 뒤에는 어디로 가는지 등은 절대적으로 신화의 영역이다. 이 평론가는 많은 원시부족들에게 볼 수 있는 성인식이나 입문식에서 옛 사람들이 어떻게 신화를 내재화하고 전승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혹독한 고통으로 일종의 죽음을 경험하게 하는 동시에 부족의 가장 신성한 신화를 처음 듣게 한다는 것이다. 

소설가 최인호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다가 죽으면, 그건 피살이나 마찬가지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평론가는 “죽음을 입문식으로서 미리 경험한 사람이 역설적으로 죽음을 ‘마지막 입문식’으로 바라보는 관조를 가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최초 입문식 때 들었던 신화를 떠올리면서 내가 가야 할 곳, 맞이하게 될 세계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천사도 배고픔을 느낀다면

역사시대에 들어서고 문자가 발명되자, 신화는 영속적인 문학작품으로 만들어져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칼 야스퍼스가 정의한 ‘기축시대(B.C 800~B.C200)에는 훗날 세계종교가 되는 기독교, 불교, 유교 등이 등장했다. 기축시대 모든 현인들은 ‘형식적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를 받아들일 게 아니라 올바른 윤리관과 실천을 통해 신화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것’을 강조했다. 신화가 종교와 도덕의 영역에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명의 발전이 신화에 긍정적 영향만 끼친 건 아니었다. 이 시기는 소포클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의해 그리스 철학이 발달한 시기이기도 했다. 로고스를 중시하는 철학자일수록 신화를 어리석은 이야기로 치부했다. 각종 신화는 문명을 ‘신을 향한 도전’으로 규정한다. <성경>에 나온 바벨탑 사례나 중동 일대에서 볼 수 있는 홍수 신화 역시 위기에 처한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잘 나타낸다. 이 평론가는 이 시기에 굉장한 사회적 긴장이 존재했다고 설명했다. 종교가 사회적 지주인 세계에서 신과 의식을 향한 비판이 횡행했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널리 받아들여지다 보니 일신론자들은 종교를 철학의 합리적 기준에 부합하려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에서 신화적 원천을 배제하면 종교적 영감도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을 곧 깨닫는다. 이성을 수단으로 신성을 논하는 것은 포크로 수프를 떠먹는 것처럼 무의미했다. 이 평론가는 이를 허스트의 유명한 그림으로 설명했다. 

▲ 데미안 허스트 ‘천사의 해부학’(Anatomy of an Angel). ⓒ Flickr

“천사를 해부해 놓은 그림을 보고 신성을 느낄 수 있을까요? 유방의 조직, 두개골과 근육, 내장도 볼 수가 있죠. 로고스적으로 따지면 천사도 내장이 있으니 뭔가 먹어야 하고, 배고픔도 느끼는 존재가 됩니다. 그럼 영적인 존재가 아니라 육체적인 존재가 되어 버리는 거죠.” 

로고스적으로 따지자면 예수의 탄생도, 부활도 설명할 수 없다. 사람들에게 <성경>이 진실이 되는 것은 역사적 증거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신자 자신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화와 이성이 서로 대치될 수 없고, 상호보완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신화는 이성으로 설명될 수도 없고, 설명될 필요도 없었다.  

켄타우로스가 죽어가는 까닭

이주헌 평론가는 대변혁(1500~현재) 시기 이후로 신화와 이성의 균형이 깨졌다고 강조했다. 현대사회는 로고스의 소산이다. 서구사회와 그 영향을 받은 전세계는 과학과 실용주의 정신의 승리에 기대고 있다. 이 시대 키워드는 효율이다. 새로운 착상이나 발명은 논리적 증명이 가능해야 했고 원리는 사실에 부합해야 했다. 새로운 영웅은 과학자와 발명가였다. 

현대의 과학자들과 비평가, 철학자들은 신화를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자연은 오랜 시간 인간이 넘볼 수 없는 한계로 남았지만, 과학의 발달은 자연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을 가져왔다. 더 이상 신화라는 상상력으로 자연의 불가사의를 설명할 필요가 없게 됐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신화는 신뢰를 잃어갔다. 

▲ 부르델 ‘죽어가는 켄타우로스’(Dying Centaur). ⓒ 위키미디어 커먼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처럼 신화와 숭배, 의식과 윤리에 근거한 삶이 없다면 신성을 알아보는 우리 감각도 죽는다. 이 평론가는 신화의 죽음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부르델의 ‘죽어가는 켄타우로스’을 소개했다. 모든 신화적 요소들이 사라지고 켄타우로스 하나만 남았지만 아무도 켄타우로스를 믿지 않는다. 존재하며, 눈으로 볼 수 있는데도 아무도 믿지 않으니 결국 죽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로고스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AI나 빅데이터 등을 이용해 인간의 생리적 기능을 완벽히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인간의 행동을 모두 호르몬의 작용으로 분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처럼 범죄자가 될지 안 될지 제어하거나 출생을 제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신화도, 신성도 죽고 신비도 사라질 겁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조차 사라지지 않을까요?”

신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평론가는 과학의 진보에 너무 흥분할 필요는 없다고 단언했다. 이성에 대응되는 세계를 우리는 늘 가져왔고,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케렌 암스트롱은 <신화의 역사>에서 “만약 전문 종교 지도자들이 우리에게 신화적 지식을 줄 수 없다면, 아마도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이러한 성직자의 역할을 맡아 길 잃고 상처 입은 세상에 새로운 통찰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는 신화를 예술의 한 형태라고 보았다. 

신화가 한계상황 앞에서 인간이 상상력으로 만든 대응논리라면, 소설은 상상력을 훈련하는 예술이다. 소설뿐 아니라 영화, 연극, 미술 등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다. 마치 종교적 의례처럼 수용자의 마음을 확장해 다른 이의 삶과 고통을 동정할 수 있도록 만들고 스스로도 구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예술은 이미 전통적인 ‘신화’와 동일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 카렌 암스트롱의 책 <신화의 역사>. ⓒ 알라딘

카렌 암스트롱은 우리에게 필요한 신화의 성격을 네 가지로 요약한다. 민족, 국가, 이념에 구애되지 않고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도와주는 신화, 연민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신화, 유아론적 이기주의에 이의를 제기하는 초월적 가치를 경험하게 하는 신화, 대지를 신성한 것으로 받들고 단순한 ‘자원’으로 이용하지 않게 하는 신화다. 이 네 가지는 ‘4차 산업혁명’으로 상징되는 로고스 지향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관통한다.

이주헌 평론가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어릴 때는 어차피 허구인 소설보다는 철학, 역사책을 읽는 게 훨씬 실용적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이 재미는 있지만 의미는 없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었죠. 결국 후회했습니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삶을 통찰하는 힘을 몰랐던 거죠. 신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겐 지식뿐 아니라 지혜도 중요합니다. 지식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이성과 신화가 상호보완적 관계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8년 2학기 [인문교양특강]은 정운현 이상수 한홍구 정희준 박창식 김필동 장승구 이주헌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연을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편집 : 홍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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