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풍속문화사] ④ 격전의 현장에 남겨진 ‘무명용사의 기록’
[문화일보 공동연재]

오는 25일은 6·25전쟁 발발 67돌이다. 지난 6일은 현충일이었다.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호국영령들을 기리며 문득 25년 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최종일 마라톤 경기가 펼쳐진 몬주익 경기장을 떠올린다. 두 손을 번쩍 든 채 우승 테이프를 끊고 뛰어오르던 스물세 살 앳된 황영조의 모습은 언제 봐도 가슴 벅차다. 시곗바늘을 56년 전으로 되돌려 본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 비록 일장기를 달았지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인 손기정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머리에는 월계관을 쓰고, 그리스제 청동 코린트 양식 투구를 부상으로 받았다. 왜 그리스제 투구일까?

▲ BC 490년 아테네와 페르시아가 맞붙었던 마라톤 벌판과 해안 전경(왼쪽). 마라톤 전투에서 숨진 아테네 시민 무명용사 192명을 기리는 무덤(가운데).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밀티아데스 장군 동상(오른쪽). ⓒ 문화일보

황영조, 손기정, 현진건, 심훈…올림픽 마라톤

1936년 상황을 좀 더 들여다보자. 식민치하. 그것도 일제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며 강압적인 민족 말살 정책으로 우리 사회를 옥죄던 숨 막히는 상황에서 손기정의 쾌거는 형용하기 어려운 기쁨을 안겼다. 그 의미를 알아챈 동아일보 학예부장 현진건은 일장기를 지운 손기정 사진으로 기사를 다뤘다.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지만, 현진건은 자신의 소설 작품 ‘운수 좋은 날’의 역설적인 내용처럼 해고의 불운을 겪는다. 손기정이 전한 감격에

‘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썼던 심훈은 그만 이 시를 끝으로 장티푸스에 걸려 만 35세의 나이에 생을 접는다. 자신이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처럼 짧지만 강렬하고 숭고한 생애였다.

마라톤(Marathon). 우리의 강인한 민족혼을 상징하는 마라톤 경기의 기원은 그리스다. 수도 아테네 북동쪽 바닷가에 자리한 마라톤(Μαραθων) 벌판은 치열한 전투현장이었다.

그 전장(戰場)이 왜 인류 역사에서 마라톤 경기의 이름이 됐을까? 이란고원에서 나라를 일으켜 동쪽으로 인더스 강에서부터 서쪽으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는 물론 터키와 그리스 일부까지 거대 제국을 일궜던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인류 역사상 BC 5세기까지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눈엣가시 아테네를 항복시키려고 마음먹는다.

마라톤, BC 490년 아테네가 페르시아를 물리친 전투현장

BC 492년 다리우스 1세의 사위 마르도니오스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정벌에 나서지만, 함대가 그만 풍랑으로 좌초하면서 아테네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고배를 마신다. 절치부심하던 다리우스 1세는 2년 뒤 BC 490년 동생인 아르타페네스 장군을 사령관으로 2차 정벌군을 보낸다. 이때 앞잡이 향도 역을 맡은 인물이 히피아스. 21년 전 BC 511년 아테네의 독재자 참주(僭主) 자리에서 쫓겨나 페르시아로 망명했던 인물이다. 적은 언제나 내부에 있기 마련이다. 80세의 고령으로 참주 자리 복귀를 노린 히피아스를 앞세워 페르시아 대군은 아테네의 숨통을 단숨에 끊는다는 목표 아래 아테네에서 100리 떨어진 마라톤 해변에 닻을 내린다.

정보를 입수하고 델포이 신탁소의 신탁을 거쳐 항전을 결의한 아테네 시민들. 강력한 육군을 자랑하는 스파르타에 띄운 지원요청이 거절당하고, 그리스 폴리스 가운데 단 1곳, 프라티아에서 온 지원병 1000여 명을 더해 1만1000여 명으로 마라톤에 방어진을 친다. 역전의 용장 밀티아데스 장군은 오랜 항해로 지친 페르시아 병사들이 상륙하자 그리스 특유의 팔랑크스(Phalanx) 밀집대형(密集隊形) 전술로 맞선다. 가로세로 16명씩 256명의 중무장 병사들이 대형을 이뤄 전진하는 이 전법에 페르시아 군대는 그만 무릎을 꿇고 만다.

마라톤의 무명용사 무덤, 인류사 국립묘지 효시 

페르시아 병사 6400여 명 사망에 아테네 병사는 192명 사망. 민주체제와 시민주권을 지켜내기 위한 아테네 시민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때 시민병사 페이디피데스는 마라톤 전투 현장에서 아테네까지 무려 100리를 쉬지 않고 달려 승전소식을 전한 뒤 쓰러져 숨지는 투혼을 쏟아냈다. 그로부터 정확히 2386년 뒤 1896년 1회 현대올림픽이 열렸다. 그때 페이디피데스가 달린 거리 42.195㎞를 마라톤이라는 이름의 육상경기로 만들어 냈다. 페이디피데스의 애국혼이 마라톤 경기로 부활한 셈이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의 어느 지점에서 출발했기에 대략 40㎞도 아니고 42.195㎞라는 초정밀 거리계산이 나왔단 말인가? 마라톤에 가보면 궁금증이 간단하게 풀린다. 마라톤 전투현장이 유적지로 잘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현대 그리스인들이 조성한 관광지인가? 아니다. 마라톤 전투가 벌어진 BC 490년 아테네인들이 조성한 유적지다. 아테네 시민병사들은 페르시아와 가장 치열한 전투를 펼쳤던 바로 그 장소에 기념비적인 유적을 남겼다. 호국영령을 위한 ‘무명용사 무덤’이다.

1만여 명의 아테네 시민병사 가운데 숨진 192명을 기리는 합동 무덤. 아테네로 시신을 가져가지 않고, 전투현장의 승리를 기리며 그 주역인 희생병사들의 영혼을 바로 그 자리에 남겨둔 조치다. 이 무덤은 지구촌 인류역사에서 호국영령을 기리는 국립묘지의 효시(嚆矢)다. 놀라운 대목은 무덤이 우리 눈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둥그런 흙 봉분. 마치 부여나 공주, 경주에서 보는 대형 왕릉처럼 생겼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무덤 양식을 다루며 살펴보기로 하고, 발길을 옆으로 옮기면 무명용사 기념조각도 눈에 들어온다. 물론 전투를 지휘한 밀티아데스 장군 조각도 크게 세웠다.

▲ ▲ 1952년 6·25전쟁 기간 중 펼쳐진 한국군과 중국군의 전투에서 희생된 한국군을 기리는 백마고지 전적비(왼쪽).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1916년 베르? 전투 뒤 조성된 베르? 국립묘지와, 1984년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헬무트 콜 독일 총리가 만든 화해의 석판(가운데). BC 460년 아테네를 위해 싸우다 숨진 시민병사 170명의 이름을 적은 비석(루브르 박물관 소장·오른쪽). ⓒ 문화일보

BC 460년 아테네 호국영령 추념비석

 지도자뿐 아니라 이렇게 이름 없는 시민병사를 기리는 국가의 예우가 단순히 마라톤 전투에 국한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그리스라는 단일국가가 존재했던 게 아니다. 폴리스(Polis)라는 작은 도시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오늘날 그리스 본토뿐 아니라 터키 서부연안, 흑해 연안, 이탈리아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 북아프리카 해안까지 지중해 전역에 그리스인들이 만든 수백 개의 도시국가는 평화롭게 교류하다 분쟁이 생기면 편을 갈라 전쟁을 치렀다. 숱한 전투현장에서 죽은 시민들을 기리는 유물을 파리 루브르에서도 만난다.

루브르 박물관은 크게 3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중 유리피라미드 정문으로 들어가 지하 1층 오른쪽 전시관이 드농(Denon)관이다. 드농관 지하 1층은 고대 그리스 유물이 자리한다. 키클라데스와 아르카이크기 유물을 훑어보며 왼쪽 별실로 들어가면 2500여 년 전 그리스 비석들이 즐비하다. 그중 인상적인 비석 하나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리스 문자로 열거된 사람 이름들이 보인다. BC 460년 아테네가 치른 전투에서 숨진 병사 170명이다. 상비군이 없이 전쟁이 터지면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나가 조국을 지키던 아테네. 이미 2500여 년 전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산화한 국민의 고귀한 넋을 기리는 일에 소홀함이 없던 모습을 보여준다. 아테네가 거대제국 페르시아마저 물리치고, 최강의 국력을 뽐내며 민주주의를 발달시킨 비결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1차 세계대전 베르?, 6·25전쟁 백마고지의 교훈

독일과 국경지대인 프랑스 북동부 로렌 지방. 여기에 베르?(Verdun)이란 아담한 소도시가 자리한다. 베르?이 역사에 남는 이유는 843년 프랑크 왕국이 ‘베르? 조약’으로 동, 서, 중 프랑크 왕국으로 분열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된 사건. 또 하나는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간 펼쳐진 현대전 최악의 참사, ‘베르? 전투’다. 베르?을 넘으면 독일은 수도 파리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고, 프랑스는 베르?을 잃으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페탱 장군의 지휘 아래 프랑스군은 결사항전. 결국 독일을 물리친다.

버티기의 혹독한 참호전에서 첫 한 달간 7만여 명을 포함해 프랑스군 38만여 명이 숨졌다. 독일군도 34만 명이 희생됐다. 최근에는 이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6·25전쟁에서 3년간 한국군 사망자가 22만7748명인 점에 비하면 10개월 동안 그것도 한 장소에서 얼마나 많은 인명이 희생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치열했던 전투 현장은 전쟁 직후 마라톤처럼 호국영령의 고귀한 넋을 기리는 묘지로 바뀌었다. 베르? 전투의 포성이 멎은 지 68년 지나 1984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가 이 자리에서 만나 기념 석판을 세웠다. “우리는 화해했고, 서로를 이해했으며, 친구가 됐다”. 석판에 적힌 내용처럼 프랑스와 독일은 친구로 손잡고 유럽연합을 주도하며 유럽의 평화를 위해 매진하는 중이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 사이 9일간 펼쳐진 철원 백마고지 전투. 한국군 9사단과 중국 38군의 물고 물리는 접전에서 중국군 1만여 명, 한국군 3500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현장에는 병사들의 이름을 새긴 추념탑이 하늘 높이 솟아 애국충절을 기린다. 하지만 하나 더 보고 싶다. 프랑스와 독일처럼, 한국과 중국도 언젠가는 이 자리에서 ‘친구’가 됐다는 석판이 세워지기를….


문화일보에 3주 단위로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교수는 '동서문명사'와 'TV저널리즘'을 강의합니다. (편집자주)

편집 : 강민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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