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박진우 기자

▲ 박진우 기자

북한에서 온 편지 한 통이 있다. 발신인은 우리 아버지조차 본 적이 없는 북한에 사는 큰아버지와 큰고모이고, 수신인은 할머니.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캐나다 국적 먼 친척이 할머니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할머니는 1.4 후퇴 때 아들과 딸을 친척에게 맡기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20대 엄마였던 할머니는 80대 엄마가 돼서도 아들과 딸을 볼 수 없었다. 잠깐 이별하는 줄 알았던 할머니는 아들과 딸을 두고 온 선택을 평생 후회하며 살았다. 그런 할머니에게 온 편지였으니 할머니는 이따금 편지를 꺼내보며 울고 또 울었다. 

또 다른 편지가 있다. 북한에 보내는 답장이지만 전달하지 못한 채 할머니는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편지를 간직하고 있지만 아버지도 전달할 가능성이 낮으니 내가 전달자가 돼야 할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와 한 방에서 18년을 보냈으니 그 염원만이라도 내가 꼭 해결하고 싶다. 

편지를 보낼 방법이 TV를 보다 떠올랐다. 바로 ‘삐라’다. 삐라는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는 일종의 편지 아닌가? 할머니 편지를 대량으로 복사해 풍선에 묶어 보내면 삐라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편지가 큰아버지나 큰고모에게 갈 가능성 낮지만 어쨌든 시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라도 할머니 답장을 보내려는 시도가 내 마음을 한결 편하게 할 것만 같았다. 

어떻게 보낼 수 있는 건지, 불법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켰다. 검색을 하자마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삐라는 불법이었다. 미디어에서 흔히 보는 삐라 살포가 불법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국의 승인 없이 북한으로 물품 등을 반출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금지된 행위였다. 

▲ 분단으로 가족이 서로 떨어져 살게 된 사람들은 어쩌다 전달된 편지 한 통에 의지하며 여생을 살아간다. 답장을 보내는 것조차 꿈같은 일이다. ⓒ flickr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르면 삐라는 광고물 또는 인쇄물에 속한다. 법령에 따라 삐라를 살포하기 위해서는 통일부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삐라 살포가 장관 승인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지는 걸까? 박근혜정부는 삐라 살포가 통일부장관의 승인 대상이 아니라는 이명박정부의 판단을 이어가고 있다. 

통일부는 삐라 살포를 제재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법을 떠나서 상식으로 생각해보자. 장관 동의 없이 물품을 보낼 수 있다면 기밀문서나 위험 물질을 삐라와 함께 보내도 상관없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안보 측면에서도 삐라 살포는 위험한 행위다. 삐라 살포를 방치하는 건 법률상으로도 안보상으로도 정부의 직무유기다.

보수단체들이 대북 삐라 살포를 재개하고 북한이 조준 격파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4일 민간단체의 대북전단을 강제로 막을 수 없다고 발표했다. 삐라에 대한 정부의 수수방관을 보고 있자니 할머니 답장을 살포하려던 계획을 단념한 게 억울하다. 할머니 편지는 삐라처럼 정치적 의도도 없다. 자식을 북에 두고 온 일을 수 십 년간 죄로 여기고 살아온 한 어머니의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 편지의 전부다. 정부가 삐라 살포를 계속 제멋대로 해석할 거라면 나도 할머니 편지를 살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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