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음악기행] ① 런던 웨스트엔드

안세희 기자가 지난 여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주관하는 ‘유럽 음악여행’에 참여해 여행기를 썼다. 12일간 이 ‘특별한 여행’을 다녀온 안 기자는 숙명여대에서 기악을 전공했고 음악전문기자가 되기 위해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있다. 3회에 나누어 싣는 이 기사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1월호에도 전문 게재된다.  <편집자>

"런던에 싫증난 사람은 인생에 싫증난 사람"

어릴 때부터 서양음악을 공부해오면서, 그 본고장인 유럽 음악도시를 순회해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 꿈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알림’을 본 순간 현실로 다가왔다. 융프라우, 피사,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이름난 일반관광지 외에도 런던 웨스트엔드, 밀라노 스칼라극장, 크레모나 스트라디바리 악기박물관,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생가, 빈 쉔부른궁 음악회 등으로 짜인 프로그램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12시간을 날아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마중 나온 것은 여름 치고는 차가운 밤공기였다. 런던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변에서 마주친 삼성 스마트폰 대형 광고판이 떠나온 서울을 잠시 생각나게 했지만, 금세 이국적 분위기에 젖어 들었다.

이튿날 시내관광을 하면서 느낀 런던의 분위기는 왠지 설렘의 공기로 가득한 듯했다. 외양은 보수적이고 전통을 고수하는 듯하면서도 도시를 감도는 공기는 자못 진보적이고 창의성을 함께 호흡하는 듯했다. 하긴 런던은 보수주의와 보수당의 아버지인 에드먼드 버크와 디즈레일리의 도시인 동시에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가 잠들어 있는 도시가 아니던가?

여행객들은 런던의 우아한 외양에 매료되었다가 이내 런던의 자유로운 정신과 예술적 분위기에 감염된다. ‘노팅힐’과 ‘러브 액추얼리’의 배경이 된 곳, 복잡하면서도 절도와 매너가 있는 도시, 런던은 여행객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매력이 넘친다. 그래서 사무엘 존슨은 “런던에 싫증난 사람은 인생에 싫증난 사람”이라고 말했다.

▲ 영국 의회가 사용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웨스트엔드가 있다. 멀리 빅벤이 보이고 가까이 있는 빅토리아 타워에 영국 국기가 게양된 걸로 봐서 의회가 개원중임을 알 수 있다. ⓒ 안세희

런던에는 볼거리들이 너무나 많지만 뭔가 퍼포먼스를 보고 싶은 여행객들 중에는 웨스트엔드에 들러 뮤지컬을 관람하는 이가 많다. 웨스트엔드는 런던 한가운데 극장밀집구역이다. 왕이 지배하던 웨스트민스터지역과 별도로 신흥상공인을 중심으로 시티즌(시민)이 그들의 도시 ‘더 시티’를 건설했고, 시티의 동•서쪽 끝이 이스트엔드와 웨스트엔드로 불렸다. 이스트엔드가 도심의 빈민구역으로 전락한 반면 웨스트엔드는 시티의 자유로운 정신을 이어받아 뮤지컬의 중심지가 됐다. 웨스트엔드는 지난해 220만 명의 관람객을 끌어들였다.

도심속 초원에서 '라이온 킹'을 만나다

우리는 코벤트 가든의 라이시엄 극장에서 ‘라이온 킹’을 보기로 했다. 아쉽게도 일요일이라 공연 선택 폭이 넓지는 않았다. 일요일에는 부모가 자녀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들 위주로 공연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혹시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며 어린이 뮤지컬 정도로 생각한다면 오해다. 1997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이래 세계 각국에서 크게 성공한 뮤지컬 ‘라이온 킹’은 우리나라에서만 11만이 넘는 사람이 관람했다. 한국 공연시장을 감안하면 ‘대박’이었다. 작품성과 상품성을 고루 갖췄다는 방증일 터이다. 실제로 화려함과 생동감이 넘치는 멋진 공연이었다.

막이 올라가고 노을에 붉게 물든 아프리카 초원이 무대에 펼쳐졌다. 붉은 해가 떠오르는 가운데 늙은 점술사 원숭이는 노래를 부르며 많은 동물들 앞에서 장차 왕이 될 아기 사자 심바의 탄생을 알린다. 노래 제목은 ‘Circle of life’. 오페라의 서곡이 그렇듯 작품이 주는 메시지를 담아낸다. 단순한 구조와 줄거리에 인간 세상의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드넓은 아프리카 초원이 뛰어난 연출로 런던 한 복판에서 재현됐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역시 음악이었다.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에 쓰인 배경음악에 3곡이 추가됐다. 극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아프리카 민속 타악기들이 2층 앞쪽 좌우에 배치돼, 흑인 연주자들에 의해 빠른 리듬으로 쉴 새 없이 연주되었다. 무대 밑 오케스트라의 선율과도 무리 없이 어우러졌으며, 배우들 노래 또한 음악에 잘 스며들었다. 풍부한 흑인 배우들의 성량은 아프리카의 강인한 기운을 생생히 전했다.

▲ 코벤트 가든에 있는 라이시엄 극장. ⓒ 안세희

아직도 웨스트엔드에서는...

우리나라는 초대형 뮤지컬 또는 대학로 소극장에 올라가는 창작 뮤지컬로 크게 양분되지만, 이곳은 100개 가까운 크고 작은 공연장에서 다양한 작품들을 올린다. 극장은 그리 크지 않아 세종문화회관의 소극장과 대극장 중간쯤 되는 규모일까? 원작이 애니메이션이라 만화 속 다양한 효과를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해낼지 의아했지만, 뮤지컬은 갖가지 방법으로 효과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1층 맨 뒷줄에 자리 잡았으며 티켓 가격은 38.5파운드, 우리 돈으로 7만 원 가량이었는데 영국의 물가를 감안하면 비싼 편은 아니었다.

영국의 웨스트엔드는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함께 세계 뮤지컬의 양대 본산이다. 화려한 무대 장치와 다이내믹한 전개, 생동감 넘치는 퍼포먼스 등 무한한 볼거리를 갖춘 뮤지컬은 오페라보다 재미있고 연극보다 신난다. 음악, 춤, 연기, 모든 것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는 종합 예술장르인 뮤지컬은 엄청난 수익을 창출한다.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은 무엇이 다를까? 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한 형태를 갖췄다는 점에서 교류가 활발하고 그만큼 많이 닮아있다. 하지만 웨스트엔드는 브로드웨이보다 철학적이고 문학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런던에는 백여 개에 이르는 공연장이 있고, 이삼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곳도 많다. 우리가 방문한 라이시엄 극장도 1772년에 개관했다. 이 극장은 1999년 이후 ‘라이온 킹’을 지속적으로 공연하는 전용극장이다. 이런 환경 덕분에 웨스트엔드에서 장기 공연작 빅3가 탄생할 수 있었다. '레미제라블' '오페라의유령' '캣츠'가 그것이다. ‘레 미제라블’은 1984년 시작돼 1만 회 이상, ‘오페라의 유령’은 1986년 시작돼 9천5백 회 이상 공연됐지만 아직도 많은 관객들이 극장을 찾는다. 이후 ‘라이온 킹’이 인기를 모았고, ‘라이온 킹’은 ‘맘마미아’에 바통을 넘겼다고 한다.

레스터 스퀘어에는 뮤지컬 티켓을 파는 부스가 여러 개 있는데, 공연 전날 반환돼 반값에 파는 표나 간혹 보이는 입석표를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한다. 웨스트엔드에는 소규모이고 실험적인 작품이 주로 공연되는 프린지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서 한국의 ‘난타’, ‘점프’ 등이 공연돼 눈길을 끌기도 했다. ‘주변, 가장자리’라는 뜻의 프린지를 통해 신인 발굴과 문화 유입의 통로를 열어놓았기에 웨스트엔드의 명성도 유지될 수 있었으리라.

층간 로비에서는 맥주와 칵테일은 물론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사탕이나 젤리 등 군것질거리도 판매한다. 1막이 끝난 뒤 들뜬 마음에 평소엔 너무 달아 먹지도 않는 마시멜로와 젤리를 사버렸다.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뒷자리 네 살짜리 꼬마 아이에게 주고 말았다. 공연장에는 아이들이 매우 많았다. 어린이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란 이유도 있지만, 이곳 아이들은 이렇게 어릴 때부터 뮤지컬과 음악회 등 공연을 자주 접한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온통 학원이나 시험으로 내몰려 힘겨워하는 한국 아이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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