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지번서 2년 새 12건 발생 [탐사기획] 당신의 동네는 안전합니까

 

성범죄가 해마다 크게 늘고 있지만 경찰은 발생 장소나 시간 등 최소한의 기본 정보도 제대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정보 폐쇄성은 시민들의 자력화(empowerment)와 투명한 치안대책 수립을 가로막고 있다. <단비뉴스>는 성폭력 추방주간(11월 25일~12월 1일)을 맞이해 서울지역 31개 경찰서를 상대로 성범죄 관련 정보 공개를 청구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경찰의 정보공개 실태와 개선방안 등을 모색하는 ‘탐사기획’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상: (단독)‘성범죄 지도’ 그려보니 우범지역 나왔다
    -동일 지번에서 2년 새 성범죄 12건 발생

중: 시민 안전보다 집값 하락 걱정?
    -경찰의 비밀주의, 시민 안전과 알권리 침해

하: 선진국은 범죄정보공개로 투명성, 경각심 높여
    -‘LA타임스’는 성범죄 등 발생정보 상설 서비스

서울 서초구 서초대로 77길. 강남대로의 서초구 쪽 이면도로인 이 거리 주변에는 식당과 카페, 술집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지하철역에서 가깝고 학원가 등을 끼고 있어 주로 젊은 층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 일대는 유흥업소가 밀집해 밤에도 활기가 넘치지만 서울 서초경찰서 관내에서 성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단비뉴스>가 단독 입수한 서초경찰서 관내 성범죄 관련 정보에 따르면, 강남역에서 신논현역까지 이어지는 약 700미터 길이의 이 거리 주변에서 최근 2년 사이(2011년~2012년) 강간과 강제추행 등 성범죄가 모두 90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장소(동일 지번)에서 2년 새 2번 이상 성범죄가 일어난 곳도 10군데나 됐다. 특히 이 가운데 서초구 서초동 1308-*의 경우 지난 2년 사이 9건, 서초동 1317-**는 같은 기간에 5건 성범죄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은 <단비>가 서울 서초경찰서를 상대로 성범죄 정보 공개를 청구해 입수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드러났다. 이 자료에는 2011년부터 2012년까지 2년 동안 서초구 지역에서 일어난 강간과 강제추행 등 성범죄 발생 일자 및 장소 정보가 포함돼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서초구 지역에선 모두 518건의 성범죄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단비뉴스, 언론사 최초 ‘성범죄 지도’ 작성해 우범지역 확인

<단비>는 이 가운데 발생장소 정보가 주소지 지번까지 구체적으로 기재된 367건의 성범죄 발생 위치를 구글 퓨전테이블을 활용해 지도에 표시했다. 비록 서초구 지역에 한정된 정보이긴 하지만 언론사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성범죄 발생 위치 정보를 매핑(mapping) 도구를 통해 지도 위에 그릴 수 있었다.

 

▲ 서초구 지역에서 발생한 성범죄 발생 위치를 퓨전테이블을 활용해 지도에 표시했다. ⓒ 유선희

 

성범죄 발생 지도를 그려보니 단순 데이터 검색으로는 보이지 않던 패턴이 나타났다. 강남역과 신논현역을 잇는 서초대로 77길을 따라 성범죄 발생 지점이 집중적으로 찍혔다. 밀집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신논현역에서 북쪽으로 논현역까지 이어지는 거리 주변 지역에도 발생 지점이 잇따라 찍혀 강남역에서부터 남북으로 약 1.5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띠를 이뤘다. 이 곳 외에도 서초경찰서 관내에서는 지하철 교대역, 남부터미널역, 양재역 주변 등에서 성범죄가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도상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성범죄도 우범지역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성범죄추방 기간(11월 25일~12월 1일)이었던 지난 11월 29일 밤, 기자는 서초구에서 성범죄 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인 서초대로 77길을 찾았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지만 줄지어 늘어선 음식점과 주점의 화려한 조명으로 거리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유흥업소에서 터져 나오는 음악 소리는 시끄러울 정도로 귀를 울렸다. 한 식당 앞에는 회식을 마친 직장인 무리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떠들어 댔고, 어느 클럽 앞에는 입장객과 대기하는 젊은이들이 한 데 뒤엉켜 큰 혼잡을 빚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인데다 기온이 영하 5도까지 떨어졌지만 길목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 자정이 훨씬 넘은 지난 11월 29일, 서초대로 77길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 유선희

 

기자는 2년 새 성범죄가 9건이나 발생한 서초동 1308-*번지가 어떤 곳인지 찾아가 봤다. 서초대로 77길에서 75길로 들어서는 길목에 식당 세 곳과 주차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유흥주점이 줄지어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주변 유흥주점과는 달리 이 곳 식당들은 불이 꺼져 있었고,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꽤 어두웠다. 서초경찰서 자료에 따르면 이곳에선 2011년 5월 17일부터 2012년 9월 23일까지 강간 및 강제추행 사건이 9건 발생했다.

 

▲ 주변 유흥주점과 달리 이 길목은 식당들이 모두 영업을 종료해 꽤 어두웠다. ⓒ 유선희

 

이 근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유희진(19·여·서울 서초구)양은 “이 주변에 살고 있지만 성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지역이라는 사실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근처에 술집이 많고, 특히 이쪽(서초대로 75길)은 바깥 쪽(77길)과 달리 골목길 폭도 좁고 어두우니까 성범죄가 많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순찰차를 종종 보지만 단순히 순찰차원에서만 돌아다니는 것 같다”며 “동일 장소에서 성범죄가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정보가 공개되면, 경찰관들도 그곳을 집중적으로 단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지역의 치안 실태는 어떨까? S약국 주인은 “주변에 CCTV는 많이 설치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순찰대는 많이 못 본 것 같다”고 말했다. O사 화장품 가게 점원은 “CCTV는 많이 설치돼 있고, 순찰대가 지나다니는 것도 많이 봤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 일대 업소 관계자들도 주변에서 성범죄가 얼마나 일어나는지, 성범죄 예방대책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곳에 놀러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초대로 77길에서 만난 박지민(28·여·경기도 이천시)씨는 이 일대에 성범죄가 빈발한다는 얘기에 “전혀 몰랐다”고 놀라며, “정말로 이 지역에서 성범죄가 자주 일어난다면 주변 친구들한테 말해 줘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김희연(18·여·경기도 구리시)양은 성범죄가 반복해서 발생하는 것에 대해 “무섭다”면서 “어두운 곳까지 불을 밝히는 등 치안대책이 철저히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일 지번에서 2년 새 발생한 성범죄 건수 12건

서초대로 77길 주변처럼 성범죄 밀집 지역은 아니지만 같은 장소에서 2년 새 무려 12건의 성범죄가 일어난 곳도 있었다. 서초경찰서 자료에는 2011년 2월 19일을 시작으로 2012년 12월 16일까지 발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해당 주소지인 강남역 남쪽 사임당로에 위치한 서초동 1332-*번지로 찾아가니 한 건물이 나왔다. 지난 11월 29일 기자가 찾은 시간은 밤 11시경, 건물 뒤쪽 전용주차장은 가로등 불빛 하나만 켜져 있어 캄캄했다. 주차장 관리실은 텅 빈 채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 전용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가로등 하나가 불을 밝히고 있다. ⓒ 유선희

 

건물 입주 업체 관계자에게 이곳에서 성범죄가 자주 발생한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묻자 “전혀 모르는 사실”이라고 답했다. 빌딩 바로 옆 편의점 점원은 “두 달 동안 이곳에서 일했지만 특별히 어떤 사고가 발생했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말하며 “빌딩 뒤쪽으로 갈 일이 없으니 무슨 사고가 벌어지는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대로변이고 파출소도 근처에 있으니까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는 평균 두 달에 한 번 꼴로 이곳에서 성범죄가 발생했다. 편의점 점원 말처럼 이 건물에서 300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 서초파출소가 있다.      

서초경찰서 생활안전계 정재호 경사는 “성범죄 발생장소 밀집지역에 대해 다 파악하고 있다”며 “순찰을 강화하면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정 경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예방책을 마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까지 경찰은 성범죄 등 강력 범죄의 발생 장소와 일시, 빈도 등과 관련한 정보 공개에 매우 폐쇄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이 때문에 일반 시민들은 우범지역에 대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 경찰 내부에서 어떤 치안 대책을 세우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보 폐쇄성 때문에 투명하고 공개적인 치안 대책 마련도 불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서초경찰서의 성범죄 발생지 정보 공개는 상당히 전향적인 자세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단비>가 서초경찰서를 포함해 서울지역 31개 경찰서 전부를 대상으로 성범죄 정보 공개를 청구한 결과, 대다수 경찰서는 갖가지 사유를 들어 단순 통계 이외에는 비공개 결정을 통보해 왔다. 경찰의 범죄정보 공개태도는 여전히 비밀주의에 갇혀 있다는 것을 절감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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