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송전탑 시위를 지지하는 ‘울산현대차 3차 포위의 날’

“자~ 떠나자 몽구 잡으러~, 대법 판결 무시하는 몽구 잡으러~.”

17일 저녁 8시 울산시 북구 현대자동차 송전탑 앞에서 열린 ‘울산 현대차 3차 포위의 날’에서 밴드 액트(ACT)가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개사해 부르자 무대 아래 모인 비정규직노동자, 학생 등 1600여명이 함께 움직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동무를 하고 몸을 좌우로 흔들거나 큰 소리로 휘파람을 불며 호응했다.

이날 오후 3시 태화강역 앞에서 모인 이들은 ‘비정규직 철폐’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연 뒤 송전탑 앞까지 행진해 왔다. 지상 25미터(m) 철탑 위에서 33일 째 농성하고 있는 현대차 사내하청 해고자 최병승(38)씨와 천의봉(31·현대차비정규직노조 사무국장)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 '함께 살자'고 절규하는 사람이 그려진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철탑. 두 노동자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15만 볼트 고압이 흐르는 철탑 위로 올라갔다. ⓒ 박다영

비정규직 노동자 등 1600여 명 연대 시위

행사가 시작되기 전인 저녁 7시 10분 쯤, 중앙무대에서 리허설이 진행되는 동안 참가자들은 현대차 비정규직지회가 마련한 하루주점에서 추위를 녹였다. 현대차 비정규직 해고자의 생계비 마련을 위해 파전, 오뎅탕, 커피, 사발면 등을 파는 자리. 손님들은 값을 치른 뒤 잔돈을 모금함에 넣기도 했다. 

“이래가지고 제대로 장사하겠나. 계산 똑바로 하소.”

음식 값을 받던 최상하(39)씨가 셈이 틀리자 다른 봉사자가 와서 웃으며 면박을 줬다. “계속 밑지며 판 거 아니냐”고 농 섞인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었다. 최씨는 현대자동차 의장1부 조립라인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다 2년 전 해고됐다. 근무 중인 비정규직 노조원들이 지난 8월 부분파업을 벌일 때 동조했다가 일부 노조원들은 구속될 위기에 처하고 최씨는 회사 측의 노조재산 가압류 과정에서 생활비 도움을 받던 통장을 가압류 당하기도 했다.

“과거엔 현대차 정규직들이 우리를 나 몰라라 했는데 요즘은 달라요. 먼저 찾아와서 열심히 하라고도 말해주고, 울산 시민들도 긍정적이고요. 최근 한 설문조사에서 61%의 울산 시민들이 ‘현대차가 법원 판결을 이행해야 한다’고 답했다고 합디다.”

대법원은 지난 2010년 7월 현대차의 사내하청을 ‘불법파견’으로 최종 판정하고 정규직으로 채용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현대차는 이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대신 지난 6월 일부 비정규직만 정규직으로 신규 채용했고 8월에도 선별적인 신규채용안을 내놔 노조의 반발을 샀다. 또 하청업체와의 계약 해지를 통해 최병승씨 등 일부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 '3차 포위의 날'에만 열린 하루주점. 몸과 마음을 모두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오뎅국물과 컵라면을 파는 곳이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와 자원봉사자들이 주점을 지켰다. ⓒ 박다영

하루주점 옆에는 작은 텐트 세 개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조합원 250명과 원정 온 현대차 전주공장 비정규직지회 조합원 김용삼(44)씨가 일부 동료들과 1박2일을 하기 위해 텐트를 친 것이다. 김씨는 “송전탑 위에 있는 두 노동자를 생각하니 가슴이 짠하고 마음이 아파 직접 텐트를 챙겨 왔다”며 “아프면 더 서러우니까 두 노동자가 감기 걸리지 말고 건강하게 내려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현대차 전주공장 비정규직노조 조합원 김용삼(44)씨. 그는 밤샘 농성에 참여하기 위해 직접 텐트를 챙겨 조합원 250여 명과 함께 이곳에 왔다. ⓒ 손지은

다른 한쪽엔 ‘연대 텐트’ 등의 이름이 걸린 특이한 텐트촌도 보였다. 시위 참가자 가족들을 위해 보드게임방, 만화방 구실을 하는 공간이다. 진보신당 대구시당원인 정민아(35·여)씨는 “지난번 ‘2차 포위의 날’ 왔을 때 어린이나 여성을 위한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을 느껴 이번 에 직접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송전탑 바로 밑에는 두 노동자에게 엽서를 보낼 수 있는 우체통이 마련돼 있었다. 엽서엔 두 노동자가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찍은 사진이 담겼다. 참가자들은 엽서에 ‘우리들의 힘을 받아 반드시 현장으로 돌아갑시다’, ‘천의봉, 최병승 사랑한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해고 없는 일터’ 등의 메시지를 적어 우체통에 넣었다.  

▲ 부스에서 철탑 위 두 노동자를 응원하는 엽서를 보낼 수도 있다. ⓒ 손지은

송전탑 위 두 노동자도 액정화면 흔들며 동참

▲ 울산 현대차 송전탑 앞에서 열린 '현대차 3차 포위의 날'. 전국 비정규직 노동자, 학생 등 1600여명이 참여했다. ⓒ 손지은

“정몽구를 구속하라.”
“모든 사내하청 정규직화하라.”

본 행사가 시작된 후 사회자의 소개로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노조원 세 명이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트로트곡 ‘있을 때 잘해’를 개사해 현대차 정몽구 회장에게 목청을 높였다.

“있을 때 잘해 구속되기 전에~,있을 때 잘해 구속되기 전에~.”
“대법 판결났잖아~,불법 판결났잖아~,우릴 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마.”

▲ 현대차 울산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 트로트 '있을 때 잘해'를 개사해서 불러 큰 호응을 얻었다. ⓒ 손지은
▲ '강성노조'라 불리는 금속노조 조합원들은 이날 하루 '고통'을 잊고 마음껏 뛰어 놀았다. ⓒ 손지은

무대 밑에서 폭소와 함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어 전주 현대차 비정규직노조원들이 만든 밴드 ‘하청종지부’가 와이비(YB)의 ‘나는 나비’를 열창했다.

“추운 겨울이 다가와 힘겨울지도 몰라. 봄바람이 불어오면 이제 나의 꿈을 찾아 날아. 노래하며 춤추는 나는 아름다운 나비~.”

희망을 노래하는 이들에게 참가자들은 박수로 호응했다. 송전탑 위 두 노동자도 액정화면에 불을 밝힌 휴대전화를 흔들었다. 스스로 찾아온 ‘초대가수’도 있었다. 울산 북구청 ‘청소반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년여성 이순득씨는 “힘내시라고 노래 한곡 하겠다”며 수줍게 인사를 마친 뒤 ‘섬마을 선생님’을 간드러지게 불렀다. 앵콜 요청이 쏟아졌다.

▲ 스스로를 '울산 북구청 청소반장'이라고 소개한 이순득씨. 얼마전 열린 '울산 미화노동자 노래자랑'에서 1등을 차지한 그녀는 농성 중인 두 노동자에게 힘을 주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 ⓒ 손지은

지난 9일 ‘학교비정규직 교육감 직접고용’ 등을 요구하며 전국공립 초중고에서 총파업을 했던 급식보조, 교무보조 등 노동자들도 이날 행사에 함께 했다. 전국교육기관 회계직연합회 울산지부 배현덕 지부장이 무대에 올라 “지난 번 아이들에게 빵을 먹여서 죄송하다”고 인사하자 여기저기서 “괜찮다”고 격려했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업체 소속으로 일하는 비정규직 김성곤(54), 오왕숙(54·여)씨 부부는 요즘 퇴근 후 거의 매일 농성장을 찾는다고 말했다. 오씨는 “우린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어 정규직으로 전환돼도 몇 년밖에 근무하지 못하지만 젊은 사람들을 위해 나왔다”며 “정작 젊은이들은 한 달 만에 잘리는 경우도 있는데 자기 문제로 인식을 잘 못하더라”고 안타까워했다.

“불법파견 사내하청 정규직으로 고용하라”가 법의 명령

▲ 송전탑 아래서 바라 본 고공 농성장. 나무 합판으로 만든 2평 남짓한 공간에서 두 노동자가 33일째 농성 중이다. ⓒ 손지은

열기가 한껏 달아오를 무렵, 무대 옆 대형스크린에서 송전탑의 두 노동자가 하루 일과를 휴대전화로 서로 촬영해준 영상이 상영됐다. 지난달 17일 철탑에 오른 이들이 30일 째 되던  날 찍은 이 영상에는 도르래를 이용해 동료노조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한 밥을 올려 받는 모습과 책을 읽고 트위터를 하는 모습 등 두 노동자의 일상이 담겼다. 철탑에서 매일 쓰는 최병승씨의 일기장은 70페이지가 넘었다. 일기에는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등의 고민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땅에서 천막농성 중인 동료조합원들의 모습도 영상에 담겼다. 천의봉씨는 “조금만 더 힘내자”며 동료와 지지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밤 10시경 참가자들의 염원이 담긴 ‘위문품’을 전달하기 위해 도르래가 철탑 위로 올라갔다. 손을 흔들며 함성을 보내는 이들을 향해 철탑 위 두 사람은 다시 작은 불빛으로 화답했다.

▲ 집회 말미에 횃불을 들고 무대 앞에 선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조합원들. 들뜬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고 비장함이 감돌았다. ⓒ 손지은

자정 무렵 현대차 울산공장 비정규노조 조합원 40여명이 횃불을 들고 무대에 올랐다. 이때까지 밝게 이어졌던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고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조합원들은 “10년 동안 흘린 피눈물을 이젠 끝내자”고 말했다. 노동부는 2004년 현대차의 울산·아산·전주 공장 127개 사내하청업체에 대해 불법파견이라고 규정했지만 지난 10년간 달라진 건 없었다. ‘약속을 이행하라’며 회사 측에 맞선 노조원들에게는 업무방해와 폭력행위 등을 이유로 구속영장이 날아왔다.

▲ 농성장을 찾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매일 기록을 남겼다. 30여일이 지나자 3m가 넘는 나무 구조물에는 메시지가 빼곡히 기록됐다. ⓒ 박다영

현대차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산업재해를 당한 남편과 함께 왔다는 30대의 김모씨는 “단지 판결 내용을 지켜달라는 것”이라고 호소했다.

“비정규직들이 임금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배를 불리자는 게 아니라 단지 판결 내용을 지켜달라는 겁니다. 지켜지지도 않을 법을 국회의원들은 왜 몸싸움을 해가며 만들었나요. 판결을 무시하는 대기업에 벌금형을 내리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모두가 잘 알지 않나요?”

▲ 자정이 다 된 시각, 본 행사가 끝나고 참가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였다. 이번 대선에 출마한 노동자 김소연 후보의 선거운동본부원들은 인천에서 울산까지 내려왔다. ⓒ 손지은

자정이 조금 지나 무대 행사가 막을 내리자 남은 참가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컵라면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한바탕 연대행사를 치렀지만 송전탑 위 노동자들이 언제 내려올 수 있을지 막막하다는 게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듯 했다. 현대차는 지난 14일 불법파견 자체를 부인하던 태도를 바꿔 ‘사내하도급 노동자가 일하는 작업장 가운데 불법파견 요소가 있는 작업장을 재분류해 해당 노동자를 정규직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노사간 의견차 조율이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소송을 맡은 민주노총 울산노동법률원 정기호(41) 변호사는 “사측이 전향적인 안을 내놓긴 했지만 노사간 합의점이 좁혀지지 않아 문제가 쉽게 타결될 것 같진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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