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윤리] 뉴스 화면의 흐림처리 오남용, 해결 방안은?

지하철을 기다리는 인파가 담긴 화면이 흐릿하게 보인다. 길게 늘어선 줄 사이로 분주히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장면이 전환되자, 승객들이 승강장에 들어선 만원 열차에 하나둘 타기 시작한다. 여전히 화면 일부는 흐리게 보인다. 이어진 장면도 마찬가지다. 콩나물시루처럼 모인 인파를 머리 위에서 촬영한 장면, 걸어가는 시민의 뒷모습, 다시 비좁은 열차에 몸을 집어넣는 이용객들을 담은 컷도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인다.

지난 1월 19일 SBS가 보도한 ''지하철 5호선 연장' 중재안 내놓은 정부…인천은 '반발'' 영상 갈무리.
지난 1월 19일 SBS가 보도한 ''지하철 5호선 연장' 중재안 내놓은 정부…인천은 '반발'' 영상 갈무리.

이 영상은 지난 1월 19일 <SBS>가 보도한 ''지하철 5호선 연장' 중재안 내놓은 정부…인천은 '반발''의 일부다. 총 25컷으로 구성된 영상 중에서 11컷은 화면이 흐리게 처리된 채로 나왔다. 몇몇 장면은 지하철 노선도, 승강장 벽까지 흐리게 처리돼 화면 대부분이 뿌옇게 보였다.

이처럼 흐리게 처리된 화면은 국내 방송뉴스에서 흔히 발견된다. <단비뉴스>는 지난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1주일 동안 방영된 지상파 3사의 저녁 메인뉴스 리포트 총 491개를 직접 보고, 흐리게 처리된 화면이 있는 보도를 일일이 확인했다. 타 방송사 영상을 인용한 보도 중 원본 영상의 자막과 방송사가 편집한 자막의 위치가 겹쳐 불가피하게 가린 경우는 집계 대상에서 제외했다.

분석 결과, 전체 491개 영상 가운데 절반가량인 228개에서 흐리게 처리된 화면이 나타났다. 방송사별로 살펴보면, <KBS>는 175개 영상 중 75개(42%), <MBC>는 152개 중 65개(42%), SBS는 164개 중 88개(53%)였다. 흐리게 처리된 컷의 수는 KBS가 평균 2.4컷, MBC가 3.1컷, SBS가 4.2컷이었다. 여기에 앵커 화면을 포함하면 방송뉴스에서 흐리게 처리된 컷은 이보다 더 많다.

방송사별 저녁 메인뉴스 화면 흐림처리 현황(2024년 1월 15일~21일). 그래픽 김다연
방송사별 저녁 메인뉴스 화면 흐림처리 현황(2024년 1월 15일~21일). 그래픽 김다연

흐림처리로 범벅된 보도 화면

모자이크라고도 불리는 '흐림처리'는 화면의 특정 부분을 잘 보이지 않게 처리하는 일이나 그렇게 처리된 상태를 의미한다. 실제 영상을 가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성을 중시하는 방송 뉴스에서는 흐림처리를 쉽게 하면 안 된다. 물론 흐림처리가 꼭 필요한 때도 있다. 자극적인 장면의 노출을 막거나 취재원을 보호해야 하는 경우다. '전미언론노조(National Union of Journalists) 행동강령'에도 개인의 초상권과 사생활을 보호하고, 자극적인 장면의 노출을 방지하기 위해 흐림처리를 권고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 방송 뉴스를 보면 흐리게 처리된 화면은 매우 자주 등장한다. 특히 공개된 장소에서 불가피하게 촬영된 시민들을 가린 영상이 많다. 단비뉴스가 확인한 보도 중에도 이런 영상이 다수 발견됐다. 흐림처리된 전체 보도 중 거리, 지하철, 시장 등 공개된 장소에 나온 인물을 가린 영상은 KBS가 19개(25%), MBC가 15개(22%), SBS가 24개(27%)로 확인됐다.

흐림처리 범위가 지나치게 넓은 경우도 쉽게 나타난다. 지난 1월 15일 SBS가 보도한 '"매진입니다"…설 앞두고 고물가에 수입 농산물 인기 '쑥''에서는 마트 직원뿐 아니라 진열대, 상품 등 인물 주변의 배경도 흐리게 처리됐다. 하루 뒤인 16일 KBS가 보도한 '할인 폭 최대로' 설 명절 대책...혜택 최대한 챙기려면?'도 이와 비슷했다. 시장 상인과 시민을 포함해 주변 배경까지 흐리게 나왔다. 두 영상 모두 비판적인 내용이 담긴 것도 아니었다. 촬영과 공개에 동의하는 곳을 찾을 수 없어서 불가피하게 흐림처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 지난 1월 15일 SBS가 보도한 '"매진입니다"…설 앞두고 고물가에 수입 농산물 인기 '쑥'', (아래) 지난 1월 16일 KBS가 보도한 '할인 폭 최대로' 설 명절 대책...혜택 최대한 챙기려면?" 영상 갈무리.
(위) 지난 1월 15일 SBS가 보도한 '"매진입니다"…설 앞두고 고물가에 수입 농산물 인기 '쑥'', (아래) 지난 1월 16일 KBS가 보도한 '할인 폭 최대로' 설 명절 대책...혜택 최대한 챙기려면?" 영상 갈무리.

아예 화면 대부분을 가리다시피한 보도도 있다. 지난 1월 17일 SBS는 이날 보도한 '대단지 아파트 상가마저 '텅텅'..."비싸니까 못 들어오죠"'에서 영상에 나온 기자를 제외하고 나머지 배경을 뿌옇게 처리했다. 상가 복도가 촬영된 장면도 특정 글자를 제외한 나머지 화면을 통째로 가렸다. 이 중에는 임대문의 전화번호와 같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릴 필요가 있는 대상도 있었다. 하지만 이 화면처럼 아예 취재한 장소도 알 수 없게 흐림처리하는 것이 정말 필요한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1월 17일 SBS 8뉴스가 보도한 '대단지 아파트 상가마저 '텅텅'..."비싸니까 못 들어오죠"' 영상 갈무리.
지난 1월 17일 SBS 8뉴스가 보도한 '대단지 아파트 상가마저 '텅텅'..."비싸니까 못 들어오죠"' 영상 갈무리.

뉴스 품질 훼손하고 조작까지 초래해

흐림처리로 가득한 화면이 자주 등장하면 방송뉴스의 품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김상우 전 한양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는 2014년 논문 '텔레비전 뉴스의 모자이크 영상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서 흐림처리를 하면 "시청자 입장에서 선명한 뉴스 영상을 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정확한 정보를 얻기 어렵다"고 말했다. 흐림처리는 현장을 생생히 담은 영상을 인위적으로 왜곡하고, 방송뉴스에서 중시하는 사실성을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과도한 흐림처리는 뉴스의 품질 차원을 넘어서 인터뷰를 조작하는 문제를 초래하기도 한다. <CJB 청주방송>은 지난 2018년 8월 10일 보도한 '녹는 필름필터…불안한 소비자'에서 자사 직원을 흐림처리해 소비자를 인터뷰한 것처럼 방송했다. 조작이 확인된 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CJB에 '주의' 처분을 내렸다. 주의는 재허가 심사에서 방송사가 감점받는 법정 제재에 해당한다.

CJB가 2018년 8월 10일 보도한 '녹는 필름필터…불안한 소비자' 영상 갈무리.
CJB가 2018년 8월 10일 보도한 '녹는 필름필터…불안한 소비자' 영상 갈무리.

지난 2018년 1월 1일 MBC가 보도한 '무술년 최대 화두 '개헌'…시민의 생각은?'도 마찬가지였다. 흐림처리된 채 인터뷰에 응한 24살 A 씨가 직전까지 자사 인턴기자로 일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자, MBC는 다음날 뉴스데스크에서 "기자가 지인을 섭외해 시민 인터뷰로 방송한 것은 여론을 왜곡할 우려가 있는 보도 행태일 뿐 아니라, 취재 윤리를 명백히 위반한 행위"라며 사과했다.

(위) MBC가 2018년 1월 1일 보도한 '무술년 최대 화두 '개헌'…시민의 생각은?', 아래는 앞의 보도에서 학생으로 소개된 인터뷰이가 인턴기자로 등장한 2017년 12월 8일 엠빅뉴스 영상 갈무리.
(위) MBC가 2018년 1월 1일 보도한 '무술년 최대 화두 '개헌'…시민의 생각은?', 아래는 앞의 보도에서 학생으로 소개된 인터뷰이가 인턴기자로 등장한 2017년 12월 8일 엠빅뉴스 영상 갈무리.

화면 흐림처리가 잦은 것을 악용해 인터뷰이를 조작하는 것은 시청자를 기만하는 행위다. 시청자는 화면이 흐리게 처리돼도 뉴스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언론 전반의 신뢰를 떨어트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흐림처리를 악용한 인터뷰 조작 행위는 법적인 처벌로 이어지지 않아도, 언론의 근간을 흔들 만큼 심각한 문제다.

초상권 과보호 경향이 흐림처리 과잉 부른다는 지적도

시청자를 불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조작 위험까지 있는데도, 언론이 보도 화면을 과도하게 흐림처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상을 흐리게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보도했다가 누군가가 초상권을 침해했다고 언론중재위원회나 법원에 주장하면, 언론에 불리한 결론이 나온다는 인식이 퍼져있는 탓이다.

실제로 언론인들 사이에는 언론중재위에 초상권 침해를 주장하면 대부분 인정된다는 인식이 있다. 공개된 장소에서 촬영됐더라도 시민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면 언론이 배상해야 한다고 결론이 난 사례가 적지 않은 탓이다. 지난 2020년 언론중재위가 발간한 언론중재사례집을 보면, 한 언론사가 시민이 '에코 파티' 현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을 동의 없이 방송했다가 50만 원의 손해배상액을 지급한 사례가 있다(2020대전조정8/9). 지역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신청인이 식사하는 모습을 동의 없이 방송한 언론사도 총 1백만 원을 배상한 사례가 있다(2020서울조정307ㆍ308, 2020서울조정309ㆍ310(병합)).

법원 판례에서도 초상권 보호에 무게를 둔 판결이 있다.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에 응한 사람을 보도한 행위가 초상권 침해라고 인정한 판결이 대표적이다(서울남부지법 2012. 9. 19. 선고 2011가단102015 판결). 이 사건의 피고였던 SBS는 원고가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에 응한 것을 묵시적인 동의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면 동의를 받지 않을 정도의 긴급성이 없다는 게 법원의 판결 이유였다.

물론 언론에 무조건 불리한 결론만 나오는 건 아니다. 앞선 사례와 유사하게 SBS 카메라 앞에서 정식으로 인터뷰에 응한 시민이 방송 보도 후 초상권 침해를 주장했으나, 법원이 이를 부인한 판결도 나왔다(수원지법 2015. 7. 8. 선고 2015나4440 판결). 원래는 언론중재위가 SBS의 초상권 침해 행위를 인정하고,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결정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조정 결과에 불복한 SBS가 정식으로 제소하자, 법원에서는 이 결정을 뒤집은 판결을 내놨다. 이 외에도 강도 용의자의 뒷모습을 담은 보도 영상이 초상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한 사건에서 법원이 "뒷모습만으로는 피해자임을 식별하기 쉽지 않다"고 본 판례도 있다(서울서부지법 2012. 7. 19. 선고 2011가합10952 판결).

하지만 이런 판례를 통해 기존의 판결 경향이 확실하게 바뀌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니 초상권 보호에 치우친 판결이나 언론중재 결과가 몇 번 쌓이면, 언론은 위험 부담을 줄이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위험 부담을 떠안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문제 될 가능성이 있는 부분을 아예 흐리게 처리하는 것이다.

흐림처리 오남용 문제, 언론·중재위·법원 모두의 관심 필요해

이런 상황은 언론사의 노력만으로 화면 흐림처리 오남용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론과 언론중재위, 법원이 모두 개인의 인격권을 크게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흐림처리를 최소화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언론중재위나 법원이 사회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합리적 수준의 초상권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생생한 현장을 담아 보도한 뉴스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언론도 분쟁에 휘말리는 것만 피하지 말고, 흐림처리 없이 대상의 실체를 보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편집 기술의 발달로 흐림처리가 쉬워지면서, '일단 찍고 문제 될 부분은 나중에 지워버리면 그만'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이보다는 '촬영 단계에서 보도 대상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 실천해야 한다. 현장에 인파가 많아 일일이 동의받기 어렵다면, 현장에서 촬영 사실을 크게 알리는 식으로 허락을 구할 수 있다. 이 과정을 녹화해 두면 추후 초상권 침해 소송에 휘말리더라도 동의 요건을 입증하지 못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울러 보호가 필요한 대상을 보도할 때도 촬영 단계부터 흐림처리의 필요성을 줄이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김창숙 선임연구원은 지난달 22일 단비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보호 대상을 촬영할 때라도 흐리게 처리하지 않는 다양한 대안적 촬영법이 있다"고 말했다. 그 예로 모니터에 비친 뒷모습을 촬영하거나, 화분에 가려진 실루엣을 촬영하는 방법, 풀 샷이 아닌 클로즈업 샷을 활용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김 연구원은 이 방안에 대한 일관된 기준을 마련한 뒤, 기자와 촬영팀, 편집팀이 모두 공유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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