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권일용, 고나무/알마/15,500원

마주하고 싶지 않아도 맞닥뜨려야 하는 세계가 있다. 기자들에게는 범죄의 세계가 특히 그렇다. 잔혹한 범죄자들의 마음과 행동을 들여다보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힘들어하는 일이다. 사회의 병리적 징후인 범죄를 제대로 보도하려면 범죄를 직접 들여다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

<한겨레> 기자 출신인 고나무 ‘팩트스토리’ 공동대표와 권일용 전 경정이 함께 쓴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 책에는 김해선,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 실제 범죄자들을 프로파일링 기법을 활용해 추적하여 검거한 과정이 담겨 있다. 또한, 권 전 경정으로 대표되는 국내 프로파일러 1세대의 고투가 담겨 있다. 고나무 대표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집필하면서 '권일용 되기'를 목표로 전기(傳記) 취재 기법을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전 경정이 근무하면서 겪었던 일을 엮은 이 책은 2018년 9월 출간됐다. 기자 출신인 고나무 팩트스토리 대표가 권 전 경정과 함께 썼다. 출처 알마출판사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전 경정이 근무하면서 겪었던 일을 엮은 이 책은 2018년 9월 출간됐다. 기자 출신인 고나무 팩트스토리 대표가 권 전 경정과 함께 썼다. 출처 알마출판사

최초의 연쇄살인, 그리고 언론과 경찰의 혼란

1970년대 한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의 그늘에는 급격한 빈부격차가 있었다. 이는 사회 저변을 변화시켰다. 한국 최초의 연쇄살인 사건으로 평가되는 ‘김대두 사건’이 그 무렵에 발생했다. 김대두는 1975년 전라남도와 경기도 등에서 아홉 건의 살인을 저질러 열일곱 명을 살해하고 세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후에 밝혀진 김대두의 범죄 동기는 ‘사회에 대한 분노’였다. ‘연쇄살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낯선 시대였고, 처음 나타난 형태의 범죄여서 수사기관과 언론은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에도 경찰은 기존의 수사 방식을 이어갔다. 그 결과 경찰은 1986년부터 1991년 사이 경기도 화성시에서 발생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미제로 남겼고, 누명을 쓴 피해자를 만들었다. 언론도 경찰의 수사 결과만 받아쓰며 자극적 보도에 바빴고, 결과적으로는 범죄 피해만 키웠다.

변화한 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수사 기법의 마중물 역할을 한 사람은 윤외출 경무관(당시 경감)이었다. 그는 1997년 서울지방경찰청 감식계장이 된 뒤 ‘감식계’라는 직제 명칭을 ‘과학수사계’로 바꾸자고 건의했다. 또한, 전국 일선 경찰서에 ‘과학수사팀’을 만들자고 경찰청에 제안했다. 이어 2000년 1월에는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에 ‘범죄분석팀’을 만들고 ‘국내 1호 프로파일러’로 권일용 전 경정(당시 경장)을 발탁했다. 망설이던 권 전 경정은 “미래를 봐야 한다”는 윤 경감의 말에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프로파일러가 1명뿐인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링 팀이 탄생했다.

구체제 아래서 작성된 첫 프로파일링 보고서

이 책에는 낯선 개념인 ‘과학수사’를 경찰 조직이 받아들이기까지 과정이 상세하게 서술돼 있다. 2001년 5월경, 폐품을 찾던 노인이 어린이의 시신이 들어 있는 등산용 가방을 발견했다. 주검의 팔다리가 잘려 나간 상태였다.

사체 발견 뒤 동부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됐다. 상위 기관인 서울지방경찰청도 수사를 지원했다. 권 전 경정은 새로운 수사 방식에 거부감을 가진 동료들에게 프로파일링의 가치와 효용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꼈다. 그 부담은 프로파일링을 적용해 범인을 빨리 잡아야 한다는 책임감이기도 했다. 범죄 현장을 재구성하기 위해 증거가 나오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녀 사흘 만에 범죄분석 보고서를 제출했다. 한국 경찰 최초의 프로파일링 보고서였다.

그러나 수사팀은 이 새로운 보고서에 주목하지 않았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이 발표하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는 건 여전했다. 고나무 대표는 책에서 “(기자들이) 이 보고서의 존재에 대해 더 빨리 알아차렸다면 대단한 특종이 되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관성과 관행이 지배하는 구체제가 건재한 시기에 한국 최초의 프로파일링 수사가 시작된 셈이다.

이 책은 SBS에서 같은 이름으로 드라마화되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2022년 1월부터 3월까지 석 달에 걸쳐 방영됐다. 출처 SBS
이 책은 SBS에서 같은 이름으로 드라마화되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2022년 1월부터 3월까지 석 달에 걸쳐 방영됐다. 출처 SBS

범죄자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

이후에도 새로운 범죄자들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책에는 김해선,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을 추적하여 검거한 생생한 기록이 담겨 있다. 검거 이후에도 권 전 경정은 이들의 마음을 읽어 교화 가능성을 확인하고, 재범 가능성이 없는지 살펴봤다. 범죄자의 마음을 읽는 것은 향후 유사한 범죄를 수사할 때도 참고할 수 있는 정보였다. 마음을 읽기 위해 범죄자와 대화하면서도 단편적인 사실을 놓고 그를 재단하지 않았다. 그의 특징과 행위에 집중하면서 이런 범죄가 왜 일어나는지에 집중했다.

이는 최근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요구가 커지는 상황과 맞닿아 있다. 범죄나 사건에 대한 언론의 단편적인 보도는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게 아니라 범죄자에게 관심을 돌리는 효과가 있다. 범죄자는 발언권을 얻어 사건의 주인공 행세를 하고, 피해자의 목소리는 묻힌다. 하지만 권 전 경정은 어린 시절부터 애정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등 불우한 성장환경이 그런 범죄자를 낳는다는 구조적 원인도 밝혀야 한다고 설명한다.

권일용 전 경정 퇴임식. 권 전 경정은 27년 재직 기간 가운데 17년 동안 프로파일러로 일한 뒤, 2017년 4월 퇴임했다. 출처 연합뉴스
권일용 전 경정 퇴임식. 권 전 경정은 27년 재직 기간 가운데 17년 동안 프로파일러로 일한 뒤, 2017년 4월 퇴임했다. 출처 연합뉴스

영미 언론인들은 사회적 병리를 드러내는 징후인 범죄를 심층적으로 다룬다. 전문기자를 두기도 한다. 영국 <가디언>에서 23년간 범죄전문기자로 일한 던컨 캠벨의 기사와 칼럼들은 경찰 수사에서 참고자료로 활용되거나 학술논문에 인용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아직 이런 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범죄자의 자극적인 말 한마디만 단편적으로 보도하거나 그 사람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식이다. 범죄를 수사하는 경찰들 가운데 프로파일러라는 전문가가 나오는 것처럼 한국 언론계에도 범죄보도 전문기자가 등장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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