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4월’ ① 숨

지난 가을학기에 연재한 <청년기자들의 시선>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봄학기 <청년기자들의 시선2>는 현상들 사이(Between) 관계에 주목해 현상을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사이의 갈등과 대립 너머(Beyond)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시선2>의 두 번째 주제는 ‘4월’이다. ‘4월’은 봄을 여는 계절이자 T.S. 엘리엇이 노래한 ‘잔인한 달’이며, 4·3과 4·19혁명, 그리고 4·16 등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다. 올해 4월,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과 4·15 총선 과제까지 껴안아야 한다. 청년기자들이 2020년 4월 이 땅의 시·공간을 다양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편집자)

지상 25m의 둥근 방과 n번방

4월, 나는 살아서 벚꽃잎이 눈처럼 날리는 봄을 맞는다. 신문에 실린, 사람들에게 부정당해 스스로를 벼랑으로 내몰고 있을 사람들 이야기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노조를 결성하려 했다는 이유로 삼성에 해고당한 뒤, 지상 25m 위에 떠서 투쟁하고 있는 김용희 씨가 선명하게 느끼고 있을 공포와 n번방이라는 ‘대형 뉴스’가 터진 뒤에도 여전히 피해자들을 괴롭히고 있을 자책을 가슴으로 느낀다. 김용희 씨는, n번방 피해자들은 이 밤에 잠을 못 이룰 것이다. 

마음 속 목소리는 주로 밤에 찾아온다. 목소리가 너를 비난하는 그들이 맞고 네가 틀렸다고 속삭일 때면, 억울함에 손발이 떨리고 심장이 조여 온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지 생각조차 못 한다. 주변 사람에게도 털어놓기조차 힘들다. 온 혈관이 바싹 말라붙는 듯한 공포, 어떻게 그 목소리가 자신을 향하게 됐는지 설명할 정신도, 기력도 없다. 거대한 현실 벽 앞에 그저 참담하다. 무기력하다. 사람이 버려지는 이 냉랭한 사회구조 앞에서 개인인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2년 전 죽기를 작정했던 나를 기억한다. 나를 살리기 위해 내 손목을 붙잡고, 경비원, 학교 직원과 교수를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하던 클레어를 생각한다. 

▲ 지난 2월 5일, 삼성생명 유리 건물을 배경으로 김용희 씨가 강남역 CCTV 철탑 위에서 삼성그룹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깃발을 흔들고 있다. 그는 사방 1미터가 안 되는 도넛 모양 공간 안에서 매일 새우잠을 청한다. Ⓒ 연합뉴스

죽음 앞의 내게 클레어가 내민 손

미국 위스콘신 애플턴의 겨울은 길다. 2년 전 4월에도 쌓인 눈이 녹으면서 푸른 잔디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고 없이 눈보라가 두세 번 왔다 가고 튤립이 피었다. 봄이 왔다. 직전 겨울에는 죽을 생각만 했다. 목소리가 “세상에 짐만 되는 넌 죽어야 해”라고 속삭였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유서를 썼다. “네가 진정한 ‘등골브레이커’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으면서 위스콘신에서 보낸 4년 대학생활, 남은 게 없었다. 성적은 애매했고, ‘취업의 무덤’이라는 문학 전공에 특별한 꿈도 없었다. 어디 기생하는 거머리가 되거나 나를 못 알아보는 세상을 욕하며 꾸역꾸역 살아갈 내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공포였다. 내 주관을 지키며 살 자신도 없었다. 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남들이 떠올릴 이미지에 신경 쓰는 내가 경멸스러웠다. 이런 내가 겨울에 춥다고 북극곰 터전을 뺏으며 히터를 트는 것조차 역겨웠다. 나는 나에게 좌절했다. 

클레어는 내가 아무 비전 없이 빈둥거려도 되니까 일단 살아 달라고 했다. 나머지는 나중에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수시로 내 상태를 확인하고 제시간에 약을 먹는지 챙겼다. 바쁘다고 컵밥으로 때우는 나를 이끌고 학교 밖 식당에 데려갔다. 거부감에 내가 노려보면, 눈물을 보이며 그가 말했다. 잠시 쉬어도 된다. 애써 피운 꽃이 매번 져도 튤립 구근은 때가 되면 다시 싹을 틔운다. 그해 4월 아침에, 나는 긴가민가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학부 마지막 학기였다. 나는 무사히 졸업식을 치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숨만 쉬면 희망은 있다 

올해 4월, 나는 서울에서 눈처럼 날리는 벚꽃잎을 맞는다. 세상에서 버려진 사람들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때의 나를 기억한다. 자신이 존중받을 권리가 있는 인간이라고 25년간 꺾이지 않고 말해왔던 김 씨가, “내가 지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 말을 읽고 또 읽는다. 그가 해온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저 말을 되뇌며 나답게 서려던 오랜 노력이 한순간에 의미 없어지던 순간을 떠올린다. n번방 피해자도 범죄자와 똑같다는 말에 무너질 가슴에 좌절한다. 핏발 선 눈으로 밤을 샐 이들 모습을 상상한다. 다시 무기력해진다. 김용희, n번방 피해자만이 아니다. 코로나가 드러낸 이 땅의 약자들이 지금 겪고 있을 고통과 좌절, 한숨과 눈물이 가슴을 짓누른다. 똑같이 세금을 내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여권 겉면이 다르다는 이유로 재난기본소득마저 차별받았다는 뉴스를 보고 분노한다. 그 돈이 아니어도 그들의 일상에 자신을 초라하게 여길 일은 차고 넘칠 텐데.

▲ 존엄성을 무시당할 때, 우리는 막다른 길로 몰린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자책한다. Ⓒ Pixabay

사회적 약자에 관한 인식도, 제도도 없는 암울한 4월에 클레어를 기억한다. 아무런 답이 보이지 않아도, 일단 숨만 쉬고 있으면 꽃 하나는 피울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해 나를 살게 한 그의 마음을. 자기 문제만으로도 힘겨웠던 그가 함께 울며 내게 손을 내밀었듯, 이 봄 4월에 아픈 이들에게 손을 내밀자. 같이 아파하고, 같이 분노하자. 잔인한 달 4월을 이 ‘숨만 쉬어도 괜찮은’ 부활의 봄이 되게 하자.


편집 : 김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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