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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금관은 언제부터 왕권을 상징했나?
[김문환의 유물풍속문화사] ㊽ 금관
2019년 08월 06일 (화) 13:26:23 김문환 kimunan2724@hanmail.net

독일 역사박물관의 나폴레옹 금관 초상화

통일 독일 수도 베를린 테겔 공항은 참 편리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들어갔는데, 그 흔한 입국 검사도 없다. 브란덴부르크 문과 독일 의회를 비롯해 박물관 섬이 있는 시내 최중심부까지 5천원도 안 되는 저렴한 요금의 버스로 30분 안에 닿는다. 그나마 버스표를 끊지 않아도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다. 건물이 오래돼 낡았다는 점을 빼면 불황 없이 잘사는 나라의 공항과 물가라는 점이 믿기지 않는다. 신공항을 조만간 개장한다니 그때는 어떻게 바뀔지... 베를린은 탐방도 손쉽다. 다양한 박물관이 시내 중심 슈프레강 한가운데 섬, 일명 박물관 섬에 모여 있으니 말이다. 터키 페르가몬 유적지의 헬레니즘 시대 제우스 대제단, 탈레스가 거닐던 터키 밀레토스의 로마시장 건물 입구를 통째로 가져다 전시 중인 페르가몬 박물관, 고대 이집트 공예 기법의 절정을 보여주는 B.C 14세기 네페르티티 두상으로 이름 높은 노이에스(신) 박물관, 그리스 로마 유물의 보고 알테스(구) 박물관이 그렇다. 알테스 박물관 앞 루스트 정원에서 슈프레강을 건너 훔볼트 대학 방면 강가에 자리한 독일 역사박물관으로 가보자. 

   
▲ 나폴레옹 전신 초상화. 프랑수아 제라르 작. 1806년-1810년. 베를린 독일 역사박물관. ⓒ 김문환
   
▲ 금으로 만든 월계관을 쓴 나폴레옹 모습. 프랑수아 제라르 작. 1806년-1810년. 베를린 독일 역사박물관. ⓒ 김문환

1500년 남짓한 역사를 시대순으로 장식하는 유물 가운데 뜻밖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관련 유물들이 눈길을 끈다. 나폴레옹이 쓰던 모자나 소지품들... 그중 나폴레옹 전신초상화를 보자.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제라르가 1806년에서 1810년 사이 그렸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운동을 벌이던 코르시카섬 출신으로 정통 프랑스어 발음에도 어려움을 겪던 시골뜨기였다. 하지만, 파리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군인의 길을 걷다 1795년 10월 과감한 공격작전으로 위기에 처한 프랑스 혁명을 구해내며 명성을 얻는다. 이후 해외 원정에서 탁월한 전략으로 연전연승하며 프랑스를 유럽 최고 강대국으로 만든다. 이어 프랑스 대혁명을 뒤엎고, 1804년 황제에 오른다. 물론 독재자들이 그렇듯 국민투표를 거친다. 제라르의 초상화에는 최고의 위세를 떨치던 이 무렵의 위엄이 묻어난다. 독일 역사박물관 측은 프랑스 제국의 공식 나폴레옹 초상화라면서 프랑크왕국 왕 가운데 샤를마뉴 대제와 그 이전 고대 로마제국 황제의 차림새라는 설명을 붙였다. 권위를 상징하는 홀을 오른손에 들고, 머리에 로마 황제가 애용하던 월계수 잎 금관을 썼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황제나 왕의 즉위식을 왕관을 쓰는 대관식(Coronation)이라 부른다. 왕관이 곧 왕권이라는 의미다. 

인류사에서 금관이 왕권은 아니었는데...

곰곰 따져보자. 대한민국 역사에서 금관을 왕권의 상징으로 썼던 임금이 있었는가? 없다. 황제를 칭했던 2명의 임금, 고종과 순종은 금관을 쓴 적이 없고, 세종을 비롯해 조선과 고려, 신라나 백제, 고구려의 왕 누구도 금관을 썼다는 기록이나 직접 증거는 없다. 앞선 글에서 살펴본 대로 신라 금관 6개 중 2개는 여성용, 2개는 성인용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이 남녀를 떠나 권위의 상징이지 왕권의 상징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동양에서 가장 오랜 왕조사를 가진 중국 황제 누구도 금관을 쓴 적이 없다. 중국은 금관을 권위의 상징으로조차 만들지 않았다. 일본의 천황도 마찬가지다. 신라나 가야에 훨씬 앞서 금관 문화를 고도로 발달시켰던 기마민족인 선비족, 훈족(흉노), 월지, 스키타이의 금관이나 관모 금장식은 여성용이다. 각종 보석을 활용해 빼어난 장식미를 선보였던 헬레니즘 시기 지중해 연안 금관도 여성용이다. 이에 앞선 마케도니아 알렉산더의 부친 필리포스 2세 금관에서 보듯 사후 무덤에 왕의 금관을 넣었지만, 여성 무덤에도 넣었으니 왕권의 상징은 아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금관 역시 왕실 일원도 썼으니 마찬가지다. 그럼 언제부터 금관이 왕권의 상징으로 여겨진 걸까? 유물을 통해 시대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 답을 찾아보자. 

   
▲ 지기스문트 황제 초상화. 알브레히트 뒤레르 작. 1514년. 베를린 독일 역사박물관. ⓒ 김문환

로마 황제 칭호 샤를마뉴의 보석금관 초상화

독일 역사박물관에서 초상화 한 점을 더 본다. 독일어권 국가들의 연합체인 신성로마제국의 지기스문트 황제(Sigismund, 재위 1433년-1437년) 초상화다. 그가 죽고 난 뒤, 뉘른베르크에서 활동하던 화가 알브레히트 뒤레르가 1514년 그렸다. 머리에 각종 보석이 화려하게 박힌 금관을 쓴 모습이다. 이 금관의 모델은 무엇이었을까? 지기스문트 황제 초상화 옆에는 또 한 점의 초상화가 탐방객을 맞는다. 프랑스와 독일의 공동조상이자 프랑크 왕국 최초로 로마 교황청에서 황제 칭호를 얻은 샤를마뉴(독일어 카를 마그누스) 초상화다. 역시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금관을 썼다. 분위기가 비슷한데, 이 역시 1516년 알브레히트 뒤레르 작품이다. 뒤레르는 무엇을 근거로 지기스문트 황제와 샤를마뉴 황제의 보석 금관을 그렸을까? 독일은 1871년 통일 독일제국이 들어설 때까지 여러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지기스문트 황제는 뮌헨 중심의 독일 남부 바바리아 왕국 출신이다. 1433년 신성로마 황제에 오르기 전인 1424년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이던 그는 샤를마뉴 대제가 쓰던 것이라고 알려진 금관을 고향 뉘른베르크로 가져다 놓았다. 뒤레르는 이것을 보고 금관을 가져온 지기스문트 황제는 샤를마뉴의 초상화를 그린 거다. 이 금관이 지금도 존재할까? 있다. 어디에?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

   
▲ 샤를마뉴 황제 초상화. 알브레히트 뒤레르 작. 1516년. 베를린 독일 역사박물관. ⓒ 김문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 오스트리아 비엔나

비엔나.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부터 생각난다. 오스트리아 항공을 타고 듣는 음악은 오직 한 종류다. 왈츠. 비록 지금은 알프스산맥에 위치한 그림처럼 아름다운 나라로만 여겨지지만, 오스트리아는 한때 유럽의 강대국이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1273년 ~ 1918년)는 유럽 최고 명문 왕가였고, 1452년 프리드리히 3세부터는 신성로마 황제를 세습해 왔다. 1814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패퇴시킨 유럽 국가들이 전후 처리를 논할 때도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비엔나에서 회의를 주도한 점은 오스트리아의 위세를 잘 말해준다. 독일어권 국가 맹주 자리를 놓고 다투던 베를린 중심의 프로이센이 강력해져 1871년 독일제국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는 빠진다. 여기다 독일과 연합해 치른 1차 세계 대전에 패하면서 독일제국의 호엔쫄레른 왕가와 함께 합스부르크 왕가는 해체되고, 오스트리아는 열강의 지위에서 밀려난다. 심지어 히틀러 집권 시기 독일에 통합돼 오스트리아의 정체성도 사라진다. 하지만, 공화국으로 거듭나 지금은 유럽 어느 나라보다 민주주의를 발달시키며 부유한 복지국가로 이웃 나라의 부러움을 산다. 

독일의 도시들과 달리 2차 대전 중 미국의 폭격에서 벗어났던 비엔나는 베를린과 달리 웅장하고 고풍스런 건물들이 많이 남았다. 프랑스 파리 못지않다. 과거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들이 그대로 남아 영광스러웠던 오스트리아의 과거를 들려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정이던 쉔부른 궁전은 물론 호프부르크 궁전은 탐방객의 시선을 쏙 빼앗을 만큼 웅장하고 아름답다. 쾌적한 환경과 청결한 도시 분위기에 웅장한 고건축물까지... 매력 만점 비엔나 호프부르크 궁전 건물에 오스트리아의 주요 박물관들이 몰려 있다. 과거 프랑스 왕조의 루브르궁전이 지금은 박물관이 된 것과 같다. 호프부르크 궁전의 여러 박물관 가운데 비엔나 제국보물관(Imperial Treasury Vienna)으로 가보자. 속된 말로 시선을 강탈하는 아름다운 보석금관 한 점이 모두의 탄성을 자아낸다. 뉘른베르크에 있던 샤를마뉴 금관이다. 어떻게 비엔나로 왔을까? 1796년 나폴레옹의 침략당시 프랑스로 빼앗길 것을 우려해 합스부르크 왕가가 뉘른베르크에서 비엔나로 옮겨온 거다.       

   
▲ 독일 왕관. 10세기. 오랫동안 샤를마뉴 금관으로 오인된 금관. 비엔나 제국보물관. ⓒ 김문환

서유럽 역사에서 샤를마뉴가 갖는 의미

샤를마뉴. 그는 어떻게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프랑스에서 이상적인 군주이자 위대한 군주로 기억되는 걸까? 샤를마뉴의 할아버지 샤를 마르텔은 프랑크 왕국 첫 번째 왕조인 메로빙거 왕조 아래서 실권을 장악한 재상이었다. 이때 도전이자 기회가 찾아온다. 622년 아라비아반도에서 시작된 이슬람교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며 북아프리카를 휩쓸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까지 삼켰다. 이슬람군은 732년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으로 쳐들어온다. 프랑크 왕국의 운명은 물론 유럽 기독교 사회의 운명을 건 프랑스 남부 푸아티에 전투에서 샤를 마르텔이 이슬람군을 물리친다. 이후 이슬람군은 서유럽 진출을 단념하고 피레네산맥 남쪽 이베리아반도, 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머무는 한편 기수를 바다로 돌려 시칠리아를 정복한다. 샤를 마르텔에 이어 재상 권한을 넘겨받은 아들 피핀은 751년 형식뿐인 메로빙거 왕조의 왕 힐데리히 3세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돼 카롤링거 왕조를 연다. 피핀이 죽으면서 나라를 물려받은 큰아들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의 영역을 북으로 확장해 게르만 민족의 제 부족을 대부분 왕국에 포함한다. 아울러, 헝가리 땅에서 8년 전쟁 끝에 아바르족을 물리치며 게르만족의 영역을 더욱 넓힌다. 아바르족은 과거 훈족의 후예로 흑해 북부를 중심으로 위세를 떨치던 중이었다. 고구려처럼 말도 갑옷으로 보호하는 기마무사 전투부대를 운영했지만, 샤를마뉴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샤를마뉴는 문화와 거리가 먼 게르만족 특징답게 문맹이었다. 마치 중국을 정복한 여진족 누르하치나 그 아들들이 문맹이었던 것과 같다.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의 태종만이 글을 깨우쳤다. 글도 쓸 줄 모르던 샤를마뉴가 남긴 가장 큰 공로는 교황과의 관계증진이었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원정을 할 때면 샤를마뉴는 로마의 교황을 꼭 찾았는데, 당시 교황은 서유럽 기독교 사회를 사실상 통제하던 동로마 황제와 갈등 관계에 있었다. 이유는 성상 파괴령, 726년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3세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며 예수님, 성모 마리아, 성인들 조각이나 성화를 없애라는 명을 내렸다. 서유럽 기독교도들이 대부분 문맹인 상태에서 조각이나 그림마저 없다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한 교황은 이를 거부했다. 이렇게 동로마 황제와 갈등을 빚던 교항은 서유럽에서 강력한 세를 구축한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를 800년 로마 황제로 인정하며 대관식을 치러준다. 교회가 동로마제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프랑크왕국과 연대한 것은 물론 야만의 상징이던 게르만족이 문명의 상징 로마제국을 계승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이후 프랑크 왕국은 서유럽의 패권자 자리를 확고히 다진다.

비엔나 보물관 샤를마뉴 금관은 진품?

800년 교황이 샤를마뉴에게 씌워줬다는 금관이 합스부르크 왕가가 비엔나로 옮겨온 비엔나 제국 보물관의 금관이다. 진짜 샤를마뉴의 금관일까? 1000년 가까이 샤를마뉴의 금관으로 알려진 이 금관은 조사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10세기 경 동부독일 어디선가 만들어진 금관이며 당시 소왕국들의 왕이 이런 금관을 만들었다는 게 비엔나 제국보물관 측의 설명이다. 샤를마뉴의 금관이 아니어서 실망스럽지만, 분명한 것은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는 물론 여러 소왕국이 금관을 왕관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 아라곤 연합왕국 알폰소 3세의 금관 쓴 주화. 1281년-1295년. 마드리드 고고학 박물관. ⓒ 김문환

스페인 마드리드로 가보자. 마드리드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 중인 작은 주화 한 점이 중세 서양 왕국 왕들의 금관 모습을 잘 간직한 채 탐방객을 맞는다. 피레네산맥 남부와 바르셀로나를 연합해 이룬 아라곤 연합왕국(1164년-1479년)의 알폰소 3세(재위 1285~1291)가 금관을 쓰고 있는 은화다. 중세 널리 유행하던 왕관의 하나라는 일명 샤를마뉴 금관처럼 화려한 디자인은 아니지만, 아래로 드림장식까지 갖춘 품격 있는 왕관의 위용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제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에 앞선 메로빙거 왕조에서도 왕관을 썼는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무대를 런던 대영박물관 중세 전시실로 옮긴다.

   
▲ 테오데베르테 1세 금관 쓴 반지.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 534년-548년. 대영박물관. ⓒ 김문환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와 게르만족 왕 금관 주화

작은 금반지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반지 전면에 인물이 새겨졌다. 507년 클로비스가 세운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아우스트리아 왕 테오데베르트 1세(프랑스어 티베르, 재위 533년-547년)다. 머리를 보자. 금관을 쓰고 있다. 메로빙거 왕조 왕과 지방 소왕국 왕들도 머리에 금관을 써 왕권을 과시했음을 보여준다. 대영박물관은 반지 제작뿐 아니라 금관을 쓴 왕의 얼굴 조각이 476년 멸망한 서로마제국과 달리 1453년까지 1000년을 더 이어간 동로마제국의 영향이라고 설명한다.   

   
▲ 금관을 쓴 롬바르드족 왕 주화. 758년-787년. 이탈리아 베네벤토 출토. 마드리드 고고학박물관. ⓒ 김문환
   
▲ 금관을 쓴 동고트족 왕 주화. 474년-526년. 마드리드 고고학박물관. ⓒ 김문환
   
▲ 앵글로 색슨 왕이자 잉글랜드 최초의 왕 에설스탠 왕의 금관을 쓴 주화. 924년-939년. 대영박물관. ⓒ 김문환

서로마제국 말기 몽골초원에서 옮겨간 훈족에게 쫓겨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이주해온 게르만족에는 프랑크족만 있는 게 아니다. 이탈리아에 동고트족과 롬바르드족, 북아프리카로 반달족이 가는 사이 이베리아반도는 고트족 특히 서고트족이 차지한다. 이들 게르만족 왕국의 왕들도 금관을 썼을까? 스페인 마드리드 고고학 박물관이 답을 준다. 8세기 말 롬바르드족 왕의 금관을 담은 주화를 전시 중이다. 이탈리아 베네벤토에서 출토한 주화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직후 474년~526년 사이 만들어진 동고트족 금관을 담은 주화도 볼 수 있다. 영국으로 간 게르만의 일파 앵글로 색슨족의 여러 왕국 가운데 위섹스 왕국의 왕이자 통합 잉글랜드의 첫 왕으로 바이킹을 물리친 에셀스탠 왕(재위 927년-939년) 동전에도 금관을 쓴 모습이 나온다. 이는 대영박물관에서 확인 가능하다. 게르만족 왕들 모두가 금관을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실물 금관을 볼 수는 없을까?

서고트족 왕국의 화려한 사파이어 금관

스페인 마드리드 고고학 박물관이 시원하게 답을 준다. 흑해 동부 연안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등지에 살던 서고트족은 훈족의 침략을 받고 376년 로마제국 영내로 이동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하는 계기였다. 황금 문화 특히 보석을 금에 넣는 상감처리 공예기법을 발달시켰던 서고트족은 서로마제국의 허락을 얻어 프랑스 서남부 보르도 지역에 서고트 왕국을 415년 세운다. 이후 이베리아반도로 남하해 거대왕국을 수립하지만, 507년 프랑크 왕국 클로비스에게 패해 피레네산맥 남쪽 이베리아반도만을 영토로 삼는다. 수도는 톨레도. 오늘날 마드리드 남부 지방을 라만차라고 부른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나오는 라만차 지방이다. 로마 시대부터 발달한 라만차의 톨레도는 서고트 왕국의 수도로 더욱 빛을 발한다. 654년 로마법전을 본 따 ‘서고트 법전’을 만드는 등 활기를 띠지만, 711년 이슬람의 침략으로 무너진다. 

   
▲ 서고트족 금관 4점. 621년-672년. 구아라자르 출토. 마드리드 고고학 박물관. ⓒ 김문환
   
▲ 서고트족 레세스윈트 왕 금관 전경. 621년-672년. 구아라자르 출토. 마드리드 고고학 박물관. ⓒ 김문환
   
▲ 서고트족 레세스윈트 왕 금관 세부. 사파이어로 빛난다. 621년-672년. 구아라자르 출토. 마드리드 고고학 박물관. ⓒ 김문환

교회, 예수님에게 헌정한 금관

붕괴한 서고트 왕국의 화려한 황금 유물이 마드리드 고고학 박물관에서 탐방객을 맞는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유물은 금관이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번쩍이는 황금에 정교하게 장식한 사파이어의 쪽빛이 보는 이를 휘감는다. 이렇게 큰 사파이어를 활용한 고대 유물을 다른 박물관에서 본 적이 없다. 4점의 금관을 전시 중인데, 1858년에서 1861년 사이 처음 발굴될 당시는 6점의 금관과 다양한 금 유물이 있었다. 일부는 도난당하고 나머지는 프랑스 파리의 중세 박물관에 전시중이다. 발굴 장소는 톨레도 남서쪽 근교의 소도시 구아다무르(Guadamur)의 작은 과수원이다, 과수원 이름을 따 ‘구아라자르 보물(Treasure of Guarrazar)’이라 불린다. 구아라자르 보물 4점 금관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사파이어 금관은 서고트 왕국 레세스윈트(Recceswinth, 스페인어 레세스빈토, 재위 653년-672년)왕 금관이다. 이보다 150~200여 년 앞선 시기 만들어진 6점의 신라 금관과 비교해볼 만하다. 

여기서 기독교와 연관성을 짚고 넘어가자. 레세스윈트 왕의 금관을 비롯해 나머지 금관들은 왕이 실제 착용한 금관이 아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헌정한 금관이다. 게르만족의 모든 국가는 로마제국에 이어 기독교로 전향해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유지했다. 주화에서 보듯 왕도 금관을 활용했지만, 최고 품질로 만든 금관을 교회에도 바쳤다. 물론 예수님께 바치는 금관이었다. 예수님이 직접 쓰실 수 없으니 교회에 걸어 놓았다. 구아라자르 서고트족 금관은 그 전형적인 예다. 길게 줄을 달아 매달 수 있도록 제작됐다. 금관을 교회에 헌정하고 왕권의 상징으로도 활용하는 문화는 언제 시작됐을까? 기독교와 관련해 유추해 보면서 탐방을 이어가자. 이탈리아 수도 로마의 팔라쪼 마시모 박물관으로 가면 역대 로마 황제들의 주화를 전시 중이다. 그 주화들을 세밀하게 들여다보자.

   
▲ 서고트족 금관. 621년-672년. 구아라자르 출토. 마드리드 고고학 박물관. ⓒ 김문환
   
▲ 서고트족 금관. 621년-672년. 구아라자르 출토. 마드리드 고고학 박물관. ⓒ 김문환
   
▲ 서고트족 금관. 621년-672년. 구아라자르 출토. 마드리드 고고학 박물관. ⓒ 김문환

게르만족의 금관전통은 로마제국 계승한 것

오도아케르 주화가 눈길을 끈다. 학창 시절 들어본 기억이 있을 오도아케르는 로마 황제가 아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인물이다. 게르만족 소부족인 스키리족 출신인데 일설에는 훈족과 혼혈이라고도 한다. 서로마 제국의 게르만족 용병 대장이 된 뒤, 476년 서로마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재위 475년-476년)를 폐위시키고 실권을 장악한다. 뒤이어 이탈리아반도로 들어온 동고트족에게 493년 살해당한 오도아케르 주화를 보면 역시 금관을 쓴 모습이다. 서로마를 멸망시킨 게르만족 지도자도 금관을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팔라쪼 마시모 박물관은 오도아케르 주화 옆에 오도아케르가 폐위시킨 마지막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주화도 전시 중이다. 역시 금관을 썼다. 오도아케르는 로마 황제의 금관을 배웠고, 뒤이은 게르만족 국가 왕들도 오도아케르의 예는 물론 멸망하지 않은 동로마 제국 황제처럼 금관을 쓴 거다.  

   
▲ 오도아케르가 금관을 쓴 주화. 476년-493년. 로마 팔라쪼 마시모 박물관. ⓒ 김문환
   
▲ 서로마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금관을 쓴 주화. 475년-476년. 로마 팔라쪼 마시모 박물관. ⓒ 김문환

서로마 최후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에 앞선 로마 황제들도 금관을 사용했을까? 팔라쪼 마시모 박물관에는 동로마제국 테오도시우스 2세(재위 408년-450년)와 부친 아르카디우스 황제(재위 393년-408년)가 금관을 쓴 모습의 주화를 남긴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재위 379년-393년)가 393년 죽으면서 큰아들 아르카디우스에게 동로마제국을 상속했고, 작은아들 호노리우스에게 서로마제국을 물려줬다. 서로마 제국 호노리우스 황제(재위 393년-423년) 주화 역시 황제가 금관을 쓴 모습이다. 아르카디우스가 상속받은 동로마제국을 후세에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 비잔티움을 따온 거다. 하지만, 동로마인들은 단 한 번도 자신을 비잔틴 제국이라거나 동로마 제국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1453년 멸망할 때까지 오직 하나의 이름 로마제국이었다. 자신을 로마제국의 정통이라 여긴 거다. 게르만족의 금관 문화를 비잔틴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이는 콘스탄티노플이 고대 그리스 영역이고,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온 빼어난 황금 예술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쉽다. 팔라쪼 마시모 박물관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앞서 360년부터 362년까지 황제를 지낸 율리아누스 황제의 금관 쓴 주화도 탐방객을 맞는다. 율리아누스가 누구인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배다른 형제 아들이니까, 조카인 셈이다.

   
▲ 테오도시우스 2세가 금관을 쓴 주화. 408년-450년.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박물관. ⓒ 김문환
   
▲ 아르카디우스 황제가 금관을 쓴 주화. 393년-408년. 로마 팔라쪼 마시모 박물관. ⓒ 김문환
   
▲ 호노리우스 황제가 금관을 쓴 주화. 393년-423년. 로마 팔라쪼 마시모 박물관. ⓒ 김문환
   
▲ 율리아누스 황제가 금관을 쓴 주화. 360년-362년. 로마 팔라쪼 마시모 박물관. ⓒ 김문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금관 쓴 주화

이제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년-337년)로 넘어간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유럽인들에게 가장 깊이 각인된 로마 황제다. 기독교를 공인했기 때문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대문명은 기독교를 떼놓고 생각할 수 없기에 콘스탄티누스의 위상은 더욱 커진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년-305년) 시절 단순히 행정구역의 편의상 갈랐던 동서 로마제국에서 서로마 제국의 부황제였다. 해방 노예 출신의 위대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동서 로마로 구역을 나눈 뒤, 각 황제(Augustus) 밑에 부황제(Caesar)를 둬 제국을 실질적으로 4등분 통치했다. 콘스탄티우스 1세가 서로마 부황제로 맡은 지역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오늘날 프랑스와 영국이다. 콘스탄티우스 1세는 잠시 술집 여인과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았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다. 곧 버림받은 여인은 헬레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모친으로 훗날 기독교 공인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금관을 쓴 주화. 327년.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 김문환
   
▲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금관을 쓴 주화. 로마 팔라쪼 마시모 박물관. ⓒ 김문환
   
▲ 막센티우스가 금관을 쓴 주화. 로마 팔라쪼 마시모 박물관. ⓒ 김문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305년 황제에서 스스로 물러나며 생긴 권력 공백기에 콘스탄티우스 1세가 그만 306년 급사한다. 부하들은 영국 요크에서 18살 나이의 콘스탄티누스를 서로마 황제로 추대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역시 서로마 황제를 칭한 막센티우스를 치기 위해 동로마 황제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는다. 이어 312년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해 티베레 강 밀비오 다리에서 312년 10월 28일 막센티우스를 물리친다. 명실상부한 서로마의 실권자가 된 그의 나이는 23살. 이듬해 313년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공동으로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내린다. 로마제국과 갈등하던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등장하는 게기였다.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를 패퇴시키고 로마를 단일 통치체제로 묶는다. 이어 330년 리키니우스의 본거지이던 천혜의 요새 비잔티움으로 천도해 콘스탄티노플 시대를 연다. 로마의 팔라쪼 마시모 박물관이나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서 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주화는 보석이 장식된 띠 형태의 금관을 쓴 모습이다. 콘스탄티누스와 자웅을 겨뤘던 막센티우스 주화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콘스탄티누스에 앞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도 보석으로 장식한 금관을 썼을까? 

   
▲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월계관을 쓴 주화. 284년-305년. 로마 팔라쪼 마시모 박물관. ⓒ 김문환

월계관에서 보석금관으로 바꿔 왕관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3년-305년) 주화는 다른 모습을 전한다. 보석 금관이 아니라, 월계관을 썼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앞선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재위 193년-211년) 주화나 로마의 2대 황제이던 티베리우스 황제(재위 14년-37년)의 카메오 조각을 보면 역시 월계관을 쓴 모습이다. B.C 45년 공화정을 뒤엎고 종신 독재정을 연 카이사르부터 실질적인 첫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재위 B.C 27년-A.D 14년)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월계관을 명예의 상징으로 활용했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태양신 아폴론의 상징, 월계관을 명예로만 쓴 거다. B.C 45년 이전 로마는 공화정이어서 황제나 왕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왕관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금관을 만드는 문화도 없었다. 권위의 상징은 월계관이 전부였다. B.C 509년 로마가 공화정으로 전환하기 이전 B.C 753년부터 200년간 왕정이 있었지만, 이때도 금관은 없었다. 

   
▲ 셉티무스 세베루스 황제가 월계관을 쓴 주화. 193년-211년.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 김문환
   
▲ 티베리우스 황제가 월계관을 쓴 주화. 14년-37년.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 김문환

요약하면, 카이사르 이후 명예의 상징으로 월계관을 쓰던 로마 황제의 전통이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보석을 장식한 왕권 상징의 금관으로 바뀐다. 동시에 보석 금관을 교회와 예수님께 헌정하는 문화도 같이 생겨났다. 이후 로마를 배운 중세 게르만족 국가들의 왕이나 황제는 물론 교황이나 주교들도 보석금관 전통을 이었다. 월계관은 그리스 태양신 아폴론을 상징한다. 기독교 입장에서는 이교도 문화의 산물이다. 당연히 콘스탄티누스 대제이후 사용할 수 없었다. 로마의 여성들도 최고 권위를 상징할 때 월계관 대신 보석 금관을 쓴 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 주화나 4세기 로마 여인을 묘사한 카메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석으로 장식한 헬레니즘 시대나 고대 마케도니아, 동방 기마민족의 여성용 금관을 닮은 보석 금관이 주류가 되며 더욱 화려한 왕권의 상징으로 발전해 나간다. 금관을 왕관으로도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신라 금관 제작 시기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인 5세기~6세기다. 신라에도 로마 금관 문화가 유입됐을까? 신라 금관은 기마민족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금관이 출토되는 신라 무덤에서는 로마 유물도 동시에 나온다. 이 대목은 다음 기회에 살펴본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 모친 헬레나가 금관을 쓴 주화.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 김문환
   
▲ 로마 여인이 금관을 쓴 주화. 4세기.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 김문환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

편집 : 최유진 기자

[최유진 기자]
단비뉴스 지역농촌부, 기획탐사팀, 전략기획팀 최유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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