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의 유물풍속문화사] ㊹ 상수도1

“인천 붉은 수돗물은 수도관 벽에서 떨어진 물때와 침전물 때문이다.” 환경부가 지난 18일 내놓은 인천지역 '붉은 수돗물' 진상조사결과다. 인천시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서울 풍납취수장과 성산가압장이 전기 점검으로 5시간 가동을 멈춘 사이 다른 곳에서 물을 끌어온 게 화근이었다. 물의 방향이 바뀌면서 상수도관 벽의 때와 침전물이 요동친 거다. 수도관이 그만큼 낡았다는 얘기다. 환경부는 인천의 31곳에서 시료를 채수해 분석한 결과를 24일부터 매일 공개하기로 했다. 그만큼 먹는 물은 시민 생활, 위생, 건강과 직결된 문제여서 정부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반증인데...

서울시를 비롯한 전국의 상수도 수돗물의 상황은 어떨까? 낡은 수도관에 유해물질이 섞이는 일은 없을 거라 믿으며 문득 고대 동서양의 상수도문화로 관심을 돌려 본다. 먼저 첫 회는 수원지, 즉 상수원으로부터 도시까지 물을 끌어오는 로마의 수도교 문화를 들여다보고, 다음 회에 도심에서 주민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수돗물을 공급했는지 저수장부터 수도관과 물이 나오는 수도까지 살펴본다. 상수도 문화는 동서고금에 두루 퍼져 있었다. 하지만, 수도교는 로마제국에서만 활용했다. 그만큼 높은 기술력이 요구됐던 로마의 수도교 유적을 만나러 떠나자.

고흐와 세잔, 비제의 예술혼... 프로방스

프랑스 남부지방 프로방스(Provence)로 가보자. 그림처럼 아름답다. 기후도 연중 온화하다. 겨울에도 수도 파리와 달리 햇빛이 자주 든다. 그러다 보니 예술분야에서 돋보인다. 햇빛을 좇아 빈센트 반 고흐가 1888년부터 1889년까지 15개월을 살며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던 아를이 먼저 떠오른다. 돈 맥클린의 명곡 ‘빈센트’의 주인공 고흐는 이곳에서 ‘론강의 별밤’을 그린 데 이어 이듬해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속편격인 ‘별밤’을 그리며 절정의 예술세계를 빚어낸다. 비제의 주옥같은 선율 ‘아를의 여인’ 무대도 아를이다. 프랑스 근대 미술의 거장 세잔이 태어나 활약한 엑상 프로방스, 영화의 도시 칸, 비록 자갈 해안이지만 지중해의 낭만이 가득한 니스, 그리스인들이 B.C6세기 만든 마르세이유, 중세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고향 베종라 로멘느도 프로방스다.

▲ 아를 로마 극장. 비제의 감미로운 연주곡 ‘아를의 여인’ 선율이 울려 퍼질 것 같은 고즈넉한 분위기다. ⓒ 김문환
▲ 아를과 론강. 고흐가 밝은 햇빛을 찾아 15개월을 머물던 고색창연한 아를. ⓒ 김문환

로마 ‘프로빈키아’에서 유래한 로마 유적

프로방스라는 이름은 어떻게 나왔을까? 로마인들이 기후조건과 환경이 이탈리아 반도와 비슷한 이곳에 속주(식민지)라는 뜻의 프로빈키아(Provincia, 원래는 통치권이라는 의미)를 세우면서 파생됐다. 그만큼 로마 유적도 많다. 님과 아를의 원형경기장은 로마 콜로세움보다 보존 상태가 좋다. 오랑쥬의 로마극장은 지중해 전역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오랑쥬의 개선문 역시 수도 로마에서 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개선문과 같다. 건축연대는 오랑쥬 개선문이 앞선다. 프로방스에서 가장 장대한 로마 유적은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는 수도교(水道橋) 퐁 뒤 가르(Pont du Gard)다. 수도교란 수도관이 지나는 다리를 가리킨다.

▲ 아를 로마 원형 경기장 외경. ⓒ 김문환
▲ 님 로마 원형 경기장의 내부. ⓒ 김문환
▲ 오랑쥬 로마극장 내부. ⓒ 김문환
▲ 베종 라 로멘느 로마 무덤. ⓒ 김문환

로마 최대 수도교, ‘퐁 뒤 가르’ 사람과 마차도 지나

프랑스어로 퐁(Pont)은 다리, 가르(Gard)는 아비뇽과 님, 아를 사이의 지명이다. 가르 지방에는 가르동(Gardon)강이 흐른다. 이 가르동 강 계곡을 가로지르는 로마 수도교가 퐁 뒤 가르다. 파리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퐁 뇌프(Pont neuf)는 새로 만든 다리(New bridge)라는 의미다. 퐁 뒤 가르에 도착하면 일단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울창한 숲속의 계곡에 방금 공사를 끝낸 듯한 거대한 다리가 솟아 있기 때문이다. 퐁 뒤 가르의 규모를 보자. 높이는 무려 48.77m에 이른다. 콜로세움과 비슷하다. 3층 구조인데, 1층 아치 높이는 21.87m이고, 다리 길이는 142m다. 2층 아치는 높이 19.5m에 길이가 242m나 된다. 3층 아치 높이는 7.4m, 길이는 275m다. 이 3층 아치 위로 수돗물이 지난다.

▲ 퐁 뒤 가르. 계곡 사이 웅장한 모습. ⓒ 김문환
▲ 퐁 뒤 가르 관광엽서 사진. 3층으로 이뤄진 아치 건축물 구조가 잘 드러난다. 3층에 수도관이 놓인다. 맨 꼭대기 사람의 작은 모습에서 수도교의 규모가 읽힌다. ⓒ 김문환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퐁 뒤 가르의 전경을 제대로 보기 어렵다. 강으로 풍덩 들어가면 강 한가운데서 퐁 뒤 가르의 위용을 볼 수 있으련만... 그럴 수도 없으니, 전경사진을 찍을 수가 없으므로 관광엽서 사진으로 전체 윤곽을 보는 수 밖에 없다. 퐁 뒤 가르의 위용이 제대로 보인다. 1층 아치는 사람과 마차가 건너다니는 인도교의 역할을 겸한다. 마치 댐을 물막이로만 쓰는 게 아니라 꼭대기로 길을 내 사람과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한 것과 같다.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2000년 전 로마 수도교 퐁 뒤 가르의 1층 아치 도로 폭은 6.3m다.

▲ 퐁 뒤 가르. 인도교. 1층 아치는 도로로 활용된다. 현대 댐의 인도교와 같다. ⓒ 김문환

50km 거리 17m 고도차 활용한 경사도 0.034% 기술력

퐁 뒤 가르의 진면목은 규모에 있지 않다. 당시 물이 시작되는 수원지 위제스에서 도시 님(로마인들이 작은 로마라고 부를 만큼 번영했음)의 저수장까지 길이는 무려 50km다. 물론 50km가 전부 교량 즉 수도교로 건축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처럼 땅 속에 관을 묻거나 산에 터널도 뚫어 통과시킨다. 문제는 당시 전동 가압장치가 없어 오직 고도 차이를 이용해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한 점이다. 물은 중력 때문에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수원지에서 저수장으로 고도가 조금씩 낮아져야 자연스런 물줄기가 유지된다.

수도교는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해 줬다. 교각 아치(Arch)의 높이를 조금씩 낮추면 자연스럽게 고도가 낮아진다. 위제스와 님의 고도차는 해발 76m대 59m. 구불구불 50km 거리에 고도차가 겨우 17m다. 지하구간과 수도교 구간을 합쳐 평균경사도 0.034%를 적용해야 자연스럽게 물줄기가 이어진다. 심지어 일부지점의 경사도는 0.007%까지 낮췄다. 로마의 토목공학 수준에 입을 다물기 어렵다.

▲ 아그리파 조각. 퐁 뒤 가르 공사를 지휘한 인물. 루브르 박물관 ⓒ 김문환

이런 기술력을 지휘한 엔지니어는 누구일까? 누구나 한번쯤 들어 봄직한 이름인데 뜻밖에 과학자는 아니다. 뛰어난 전술의 군인이요, 행정가이자 엔지니어였다. 요즘 미술 화실에서 소묘할 때 접하는 두상, 아그리파 장군이다. 로마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절친이자, 부하인 동시에 사위다. 아그리파 장군이 B.C 19년에 만든 이 퐁 뒤 가르 건축 기술력이 프랑스 땅에 다시 살아난 것은 18세기 넘어서다.

로마, B.C312년 ‘아피아 수로’ 개설로 수도 문화 개막

님의 수로 50km는 짧다.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로 가보자. 한국 관광객은 물론 전 세계 로마 유적 탐방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콜로세움 앞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서 남쪽으로 전차 경주장을 향해 300여m 걸으면 높은 교각이 나타난다. 수도교 잔해다. 로마인들은 일찍부터 위생문화가 발달해 상수도를 활용했다. 거대한 공공시설과 화려한 도시주택인 도무스가 제구실을 다하려면 깨끗한 물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티베르 강물을 사용했지만, 도시인구와 하수가 늘어 티베르 강물이 오염됐다. 강물을 더 이상 식수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로마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깨끗한 상수원을 찾아 나섰다.

▲ 로마 시가지 수도교 잔해. ⓒ 김문환

B.C312년 로마 최초의 장거리 포장도로 ‘아피아 가도(Via Apia)’가 등장한다. 수도 로마에서 카푸아(훗날 그리스로 가는 항구 브린디시)까지 도로다. 공사 책임자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가이쿠스. 그는 도로와 함께 수로도 만들었다. ‘아피아 수로(Aqua Apia)’라고 부른다. ‘아피아’는 공사 책임자 ‘아피우스’에서 따온 말이다. 길이는 16km였다. 이때는 지상에 수로를 만들거나 수도관을 매설하는 방식이었다. 자연경사를 이용해 물을 끌어오면서 처음에는 언덕경사를 내려간 물이 관성의 법칙에 따라 반대편 언덕으로 치고 올라가는 ‘사이펀의 원리’도 이용했다.

로마, B.C144년 수도교 공법 채택 91km ‘마르키아 수로’ 개설

로마 인구가 늘어 수원지가 더 필요해졌다. 로마는 B.C 272년 두 번째로 ‘아니오 수로(Aqua Anio)’를 만들었다. 길이는 63km다. 수로 거리가 길어지자 수로의 고도를 조절할 수 있는 수도교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B.C 144년 등장한 ‘마르키아 수로(Aqua Marcia)’는 수도교 공법을 적용한 최초의 수로다. 수도교 구간을 포함해 수원지에서 로마까지 전체 수로 길이는 무려 91km에 이른다.

이후 각 속주에서 노예와 주민이 대거 유입돼 수도 로마의 인구도 폭증했다. 수로도 더욱 늘어 로마가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전환된 1세기 말에는 모두 9개의 수로가 놓였다. 난숙기에 접어든 아치 건축공법의 수도교를 지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어 109년과 226년에 하나씩 더 건설해 모두 11개의 수로가 수도 로마의 갈증을 풀어줬다. 로마는 정복한 속주에도 수도교를 만들었다. 전략적, 상업적으로 원하는 지역 어느 곳에나 로마도시를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수도교다. 북아프리카 튀니지 카르타고, 이스라엘 카이세리아, 터키 이스탄불과 페르게, 스페인 타라고나와 메리다 등지의 수도교가 그렇다.

▲ 스페인 세고비아 로마 수도교. ⓒ 김문환
▲ 터키 페르게 로마 수도교. ⓒ 김문환
▲ 스페인 타라고나 로마 수도교. ⓒ 김문환
▲ 스페인 타라고나 로마 수도교 꼭대기 수로. ⓒ 김문환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수도교 80km

한니발의 고향인 북아프리카 튀니지 카르타고로 가보자. 튀니지는 아프리카 북단 한가운데서 지중해 쪽으로 툭 삐져나와 이탈리아 반도와 가깝다. B.C 146년 3차 포에니 전쟁(로마-카르타고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잿더미로 만든다. 100여년이 흐르고 카르타고의 전략적 위치와 비옥한 토지를 눈여겨 본 카이사르가 로마도시로 일으켜 세운다. 5세기 게르만 반달족의 침략과 7세기 이슬람의 침략을 거치며 파괴된 카르타고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묻힌다. 폐허 카르타고에서 육지 쪽으로 이슬람시대 건설한 도시가 현재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다.

▲ 튀니지 자구안 로마 수도교 잔해. ⓒ 김문환
▲ 튀니지 카르타고 로마 수도교의 밀폐된 터널형 수로. ⓒ 김문환

카르타고 폐허에는 다양한 로마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수도교도 마찬가지다. 카르타고의 수원지 자구안은 바닷가에서 내륙으로 80여km 떨어졌다. 해안 카르타고까지 거대한 수도교로 연결했다. 그 수도교가 지금도 군데군데 우뚝 솟아 장엄한 정경을 연출한다. 이물질이 물에 섞이지 않도록 수도교 꼭대기 수로를 밀폐시킨 터널 형태 구조가 이채롭다.

로마의 수도교, 적군 침략루트 된다는 이유로 파괴

로마의 위생문화를 상징하는 수로와 수도교는 언제 자취를 감췄을까?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 6세기 초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게르만족의 손에서 잠시 이탈리아 반도를 되찾았다. 이때 동로마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게르만족과 대치하면서 수도교를 파괴하거나 아치 교각 위 수로터널을 막아버렸다. 터널을 통해 게르만족들이 시가지로 잠입해올 수 있다는 걱정때문이었다. 군사적인 이유로 로마의 수도교가 문을 내린 거다. 물론 초원에 천막 치고 살던 게르만족은 세련된 로마의 위생문화와 거리가 멀어 물을 쓸 일도 많지 않았다. 지금도 사용 중인 로마 시대 수로가 하나 있기는 하다. ‘비르고 수로(Aqua Virgo)’. 음용수는 아니다. 15세기 만든 로마의 명물 트레비 분수에 물을 대준다. 수도교 없이 지하수로 형태로만 남았다. 수원지에서 수로와 수도교를 통해 도시로 온 수돗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주민들에게 공급되는지 다음 글에 살펴본다.


<문화일보>에 3주마다 실리는 [김문환의 유물로 읽는 풍속문화사]를 <단비뉴스>에도 공동 연재합니다. 김문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서양문명과 미디어리터러시' '방송취재 보도실습' 등을 강의합니다. (편집자)

편집 : 조현아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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