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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의 두 여인, 너무나 다른 삶의 궤적
[지역⋅농업이슈] 신사임당 대 허난설헌 서사
2018년 07월 05일 (목) 11:40:24 이민호 장은미 기자 wordianlee@naver.com

허난설헌 기념공원은 여느 민속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기와집이 몇 채 있을 뿐이다. 반면 신사임당의 오죽헌은 입구부터 웅장하고 드넓다. 신사임당은 조선시대의 지배적 이념을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이념과 정파성은 일제 강점기를 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주류사회로 이어졌다. 오만원권에 신사임당의 초상이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반면 허난설헌은 철저히 비주류의 삶을 살았다.

조선의 두 여인을 다루는 서사에서 드러나는 역사적 온도차는 그들의 흔적이 담긴 장소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지역농업문제세미나] 답사반이 지난 5월 15일 다녀온 강원도 강릉시 허난설헌 기념공원과 신사임당의 오죽헌은 차로 불과 10분 거리에 있지만 모습과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 오죽헌은 입구부터 허난설헌 기념관의 소박한 모습과 대비된다. ⓒ 이민호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가의 어머니

조선 성리학에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룬 사상가인 율곡 이이를 키워낸 어머니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와 ‘예술가’로 이름을 떨쳤다. 오죽헌은 율곡이 태어났다는 몽룡실이 있는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 정조대왕이 율곡 선생의 학문을 기리기 위해 율곡이 어린 시절 쓰던 벼루에 글을 써서 남긴 것을 보관한 어제각, 율곡의 업적을 현창하는 기념관 등이 있다. 오죽헌으로 들어서면 잘 깔린 보도블럭과 정돈된 정원에서 오는 현대적인 느낌에서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명성을 새삼 실감한다. 정부와 지자체에서 시설물에 공들인 티가 난다.

아쉬운 점은 1976년 정화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이곳을 성역화한 인물이 친일 행적이 뚜렷한 박정희란 점이다. 그는 정조의 어제각을 한쪽 구석으로 옮긴 뒤 문성사(文成祠)라는 사당을 거창하게 짓게 하고 직접 현판을 썼다. 그뿐 아니라 율곡의 영정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김은호 화백이 그렸다.

   
▲ 허난설헌 생가는 화단과 나무도 오죽헌의 화려함과 사뭇 비교된다. ⓒ 이민호

꾸밈없는 소박함을 간직한 생가

허난설헌 생가터의 기념관은 크기로는 오죽헌에 비할 게 못 된다. 십여 명이 들어가면 꽉 찰 듯한 전시관에 허난설헌과 그의 형제들 작품 소개, 가족 이력 등이 비좁게 배치돼 있었다. 시비와 생가터가 있는 공원도 소박하다.

생가터에 복원한 한옥에 들어서자 길고양이 한 마리가 길을 안내하듯 앞장서서 걸어갔다. 자유로운 길고양이는 관람객들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자유로운 ‘안내인’은 툇마루에 앉아 관람객들을 물끄러미 ‘관람’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여인으로서 가부장적 인습에 괴로워했던 허난설헌의 모습이 자유로운 길고양이와 겹쳐보였다. 그녀가 혹시 길고양이로 환생한 건 아닐까, 잠시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신사임당(1504~51)과 허난설헌(1563~89)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여성 문인이자 예술가였다. 둘은 어려서부터 재능을 키우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났다. 당시는 여성이 문필적 교양을 갖추는 것이 가로막혀 있던 시대였다. 실학의 대가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글을 읽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다, 여자가 이에 힘쓰면 그 해로움이 끝없을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외가의 둥지에서 예술혼이 피어나다

신사임당은 강릉의 북쪽 들에 있는 마을, 곧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외할아버지 이사온은 무남독녀이자 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 이씨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친정에 머물러 살게 했다. 그 덕에 사임당의 어머니는 다른 여성들과 달리 시가에서 받는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사임당도 외가에서 태어나 어머니와 살았다.

아버지 신명화는 사임당 13살 때인 1516년(중종 11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서울에서 공부에 매달려 사임당과는 16년간 떨어져 살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정에 피바람이 불자 사림파에 가까웠던 신명화는 벼슬을 포기하고 강릉으로 내려와 처가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이때 신명화는 딸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사임당은 자매들 가운데 유난히 영특했다.

사임당은 타고난 재능을 갖췄지만 좋은 환경이 재능을 북돋아주었다. 외조부의 예술과 학문을 어머니를 통해 전수받았다. 출가한 1522년에 아버지가 죽어 고향에서 3년상을 치렀다. 자식을 키우며 1941년까지 어머니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다. 어머니와 함께한 깊은 유대는 창작의 기반이 되었다. 그녀가 쓴 한시 3편에는 모두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사임당의 아들 율곡 이이는 어머니를 기리는 글인 <선비행장>(先妣行狀)에서 ‘어렸을 때 경전을 통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또한 바느질을 잘하고 수놓기까지 정묘(精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썼다. 또한 ‘자당은 평소 묵적(墨跡)이 뛰어났는데 7세 때 안견의 그림을 모방한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했고,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썼다. 사임당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대개 아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다.

   
▲ 신사임당 <포도도>. 그는 화조나 초충보다 산수와 포도 그림으로 화명이 높았다고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포도 그림은 한 점밖에 없다. © 간송미술관

사임당의 그림은 풀벌레·포도·화조·어죽(魚竹)·매화·난초·산수가 주된 화제(畫題)다. 현재 채색화와 묵화 등 약 40폭, 글씨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있다. 사임당 그림은 그녀가 45세가 되던 해 세상에 소개되었는데, 당대 시인묵객들이 그림을 보고 발문을 남겼다. 대개 그림을 묘사하면서 격찬한 글이다. 명종 때 인물인 어숙권은 수필집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 간다’라고 한다’며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으랴'라고 찬탄했다.

논란이 된 신사임당 화폐 도안 선정
 
신사임당은 그의 그림이나 시만큼이나 5만원권 도안 인물로 익숙하다. 사임당은 2017년 5월 한국은행의 고액권 발행 계획에 따라 구성된 화폐도안자문회의 논의와 국민 설문조사 등을 거쳐 결정됐다. 한은은 신사임당을 5만원권 도안으로 선정한 이유로 ‘우리 사회의 양성 평등의식 제고와 사회 참여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문화 중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여성단체들은 “유교적 ‘현모양처’의 여성상을 대표하는 신사임당이 현대적 여성의 역할 모델에 적합하지 않다”고 반발했다.

답사반을 인솔한 이봉수 교수도 “아들 율곡은 5천원권, 어머니 신사임당은 5만원권 도안 인물인데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모자가 화폐에 들어간 것은 다원적 가치를 존중한다는 취지에서 보면 자연스럽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유관순이나 허난설헌처럼 항일 정신이나 문필적 감각으로 시대와 불화했던 자주적 인물이 화폐에 들어갔으면 더 좋았겠다”고 말했다.

당시 화폐 도안 선정은 화폐도안자문회의 중심으로 이뤄져 사회적 합의 도출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한은은 “독립적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며 5만원권 도안이 선정될 때까지 자문위원 명단이나 회의록도 공개하지 않을 만큼 화폐도안자문회의를 폐쇄적으로 운영했다. 화폐 도안은 오래 유지되므로 폭넓은 사회적 논의를 수렴해 결정했더라면 변화하는 시대 정신과 이상을 반영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재능 넘치는 집안에 핀 한 폭의 난초

허난설헌은 1563년 강릉 초당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초당 허엽은 선조 때 동인의 우두머리에 올랐던 인물로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첫 부인 청주 한씨 슬하에 1남2녀, 후처인 강릉 김씨 슬하에 2남1녀를 뒀는데 허난설헌은 강릉 김씨가 낳은 셋째 딸로 동복(同腹)은 바로 위 오빠 하곡 허봉과 막내 동생인 교산 허균이었다. 형제들이 모두 명석하여 큰 오빠 악록 허성(1548~1612)은 병조 판서에 올랐고 황윤길과 서장관(書將官)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일본이 침략할 것임을 조정에 고하기도 했다.
 
작은 오빠 허봉은 열여덟 살 때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창원부사로 있을 때 도승지 박근원과 율곡 이이 선생을 논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됐다. 허봉은 홍문관 동료인 예조판서 유성룡, 그리고 아버지와 동문인 영의정 노수신의 도움으로 3년 뒤 귀양에서 풀려나자 벼슬의 뜻을 버렸다. 그는 백운산과 금강산 대명암 등에 묻혀 살다가 술을 많이 마신 탓에 병을 얻어 서른 여덟 나이로 죽었다.
 
동생 허균은 여섯 살 아래였는데 형제들의 귀여움을 받은 막내로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아 한 번 읽으면 모두 외웠다. 다른 형제들처럼 글 짓기가 매우 뛰어났다. 형식적인 예절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급진적 사상가로 자라, 유교와 도교를 포함한 제자백가뿐 아니라 불교와 천주교까지 익혔다. 문과 장원 후 여러 차례 장원을 거듭,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천대받던 서얼 출신 동지들과 뜻을 모아 혁명을 꾸미다가 당파 싸움에 휩쓸리어 쉰 살에 능지처참됐다. 허씨 집안은 멸족을 당하고 아버지 초당의 신도비는 두 동강 났다.

초당 허엽과 네 남매는 조선을 통틀어도 손꼽히는 문장가 집안을 이뤘다. 아버지 허엽은 당시 문화대로 딸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재능은 숨길 수 없었고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는 동복 남매와 가깝게 지냈는데, 열세 살 위 작은 오빠 허봉이 글을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허봉은 허균이 어릴 때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우라고 권했다. 이달은 당대에 손꼽히는 시인으로 최경창, 백광훈과 더불어 ‘삼당’(三唐)시인으로 불렸다. 이달은 양반의 아들이었지만 기첩에게서 태어나 글재주가 좋아도 세상에서 쓰이지 못했다. 그는 세속의 예절을 지키지 않았고 성품이 방탕했다. 난설헌은 손곡한테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접했을 것이다. 그에게 자녀 교육을 맡긴 초당 집안의 식견도 평가할 만하다.

   
▲ 허난설헌 생가 터에 지은 건물에 걸린 초상. 그녀의 시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감수성과 통찰력이 있다. © 이민호

난설헌은 여덟 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을 정도로 천부적 재능을 갖추었고, 주위의 책 가운데 읽지 않은 것이 없어 초당에 쌓인 만권의 책 모두 그의 소재가 되었다. 난설헌의 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꽃이 난초다. 단아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가 난설헌과 어울렸다. 눈(雪)이란 낱말도 그의 시에서 아홉 번 나온다. 온누리를 잠시나마 흰색으로 깨끗이 덮는 눈은 여성을 억압하고 자신을 괴롭게 하는 현실을 잠시나마 보이지 않게 해준다. 이 둘을 합쳐 난설(蘭雪)이라고 호를 지었다.

난설헌은 신선 세계에 관해 듣고 상상한 것들을 모아 87편의 시를 지었다. 그는 현실에서 만족을 느끼지 못했기에 꿈과 신선의 세계를 소재로 삼았을 것이다. 마치 신선 세계가 자신의 고향이고, 인간 세계는 잠시 머물다 가는 곳으로 묘사하는 시를 썼다. 그는 죽기 전에 평생 동안 쓴 시를 다 불태워버렸다. 지금 전해지는 시는 동생 허균이 평소 외웠던 누님의 시와 친정에 남은 시를 정리해서 시집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이것이 중국에서 온 사신 주지번을 통해 중국으로 넘어가 출간되었고, 허균은 광주목사로 있으면서 1608년 4월 고을 재정을 빌어 목판으로 <난설헌집>을 간행했다. 이 책에는 시 210수, 부(賦) 1편, 산문 2편이 실려 있다.

   
▲ 허균은 누나의 시를 모아 난설헌집을 만들고 이를 목판본으로 만들었다. © 이민호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노래하다

신사임당이 남긴 한시 3편이 있는데, 모두 ‘효도’를 주제로 한다. 어머니를 강릉에 남겨두고 한양 길에 올라 대관령을 넘을 때 친정 쪽을 바라보며 지은 시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 대표적이다. 신사임당은 남자 형제가 없어 어머니 혼자 강릉에서 살고 있었기에 떠나는 발걸음이 더욱 무거웠을 것이다. 서울에서도 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시 ‘사친’(思親)을 보면 어머니를 향한 신사임당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당시의 유교적 규범은 출가한 여인은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했지만 사임당은 친정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는 남편의 지지와 시부모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남편 이원수는 사임당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그의 재능을 높이 샀다고 한다. 특히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있었다. 훗날 이기는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킨 사람이다.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그를 눈여겨보고 그 집에 발을 끊을 것을 당부했다. 그래서 이원수는 화를 당하지 않았다. 그녀가 시, 그림, 글씨를 통해 재능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남편의 성원 덕분이었다.
 
불운한 결혼과 몰락하는 친정을 바라보며

그에 견주어 허난설헌의 남편은 역설적으로 부인이 예술 활동을 하는 원동력이 됐다. 난설헌이 지은 시에는 삶의 고단함이 배어있는데 최대 원인제공자가 바로 남편이었다. 신혼살림을 차린 방에 오지도 않는 님을 혼자서 기다리며 지은 시와 아이 둘을 여의고 절절하게 지은 시에는 그의 외로움과 슬픔이 구절마다 서려있다.

난설헌의 비극은 결혼부터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의 혼인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안동김씨 집안인 시댁은 5대나 문과에 합격했을 정도로 유망한 집안이었지만, 그녀의 남편 김성립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과거에 계속 떨어져 난설헌이 죽던 해에 겨우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재주와 학식보다 바람기가 있어 난설헌의 애를 많이 태웠던 것 같다. 과거 준비를 한다는 핑계로 집에도 잘 있지 않았다. 고부관계도 좋지 않았다는 허균의 글도 전해진다. 그녀의 결혼 생활은 한마디로 ‘고립무원’의 상태였던 것 같다.

그의 친정마저 몰락해 갔다. 아버지는 경상감사 벼슬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길에 상주 객관에서 객사했고, 오빠 허봉은 귀양을 떠나 객사했다. 이와 같은 상황 또한 난설헌을 한없이 우울감에 빠져들게 했을 것이다.

   
▲ 허난설헌의 시 <빈녀음>. 남이 시집갈 때 입을 옷감이나 짜는 가난한 노처녀의 슬픔을 읊었다. ⓒ 장은미

자기 삶을 다룬 시만 쓴 것도 아니다. 가난한 이들의 삶을 성찰하는 시도 지었다. <빈녀음>(貧女吟)이 대표적이다. 다른 여인의 혼수감이 될 옷감을 짜는 노처녀의 모습을 통해 당시의 불평등한 상황을 보여주는 현실비판적 참여시라는 평을 받는다. 이 역시 허난설헌의 불우한 삶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현실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작품 속 여인의 모습과 허난설헌의 삶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지역∙농업이슈]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이 기자·PD 지망생들에게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개설한 [농업농촌문제세미나]와 [지역농업이슈보도실습] 강좌의 산물입니다. 대산농촌문화재단과 연계된 이 강좌는 농업경제학·농촌사회학 분야 학자, 농사꾼, 지역사회활동가 등이 참여해서 강의와 농촌현장실습 또는 탐사여행을 하고 이를 취재보도로 연결하는 신개념의 저널리즘스쿨 강좌입니다. 동행하는 지도교수는 기사의 틀을 함께 짜고 취재기법을 가르치고 데스크 구실을 합니다. <단비뉴스>는 이 기사들을 실어 지역∙농업문제에 대한 인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편집자)

 편집 : 임형준 기자

 

[이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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