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 산1번지 와우지구 시민아파트가 완공 4개월만에 붕괴한 사건. 이 사고로 주민 70여명 중 33명이 압사하고 수십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와우아파트는 1969년 6월 착공해 6개월 만에 준공했다. 최신 건축 기술을 적용해도 아파트단지를 조성하려면 착공 후 2년이 넘게 걸린다. 와우아파트는 70도 경사의 산비탈을 견디는 기둥을 만드는데 필요한 철근을 7개에서 5개로 줄였다. 건물을 견고하게 하는 시멘트도 거의 섞지 않았다. 1㎡당 280kg밖에 견디지 못하는 건물 기초에 900kg의 하중이 실렸다. 이 사건으로 구청장과 건축 설계자, 현장 감독, 건설회사 사장까지 책임을 지고 좌천되거나 구속됐다. 당시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그 일로 사임을 했지만, 1971년 내무장관으로 복귀했다.

당시 서울은 농촌을 떠나 몰려온 이들이 붐볐다. 서울시는 69년부터 71년까지 3년간 시민아파트 2000개동을 공급해 9만가구가 입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기한을 맞추기 위해 날림과 부실공사를 벌였고, 와우아파트는 부실 공사의 대명사가 됐다. 가수 조영남씨는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로 신고산타령을 바꿔 부르다가 ‘와우아파트 사건’을 부끄럽게 여겼던 박정희 정부의 기관원에게 끌려갔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은 서민들에게 싼 값에 아파트를 공급하기 위해 건축비를 줄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공무원과 업체 간 부정과 비리로 기본 안전마저 무시한 결과였다. 후진국에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건설 비리가 낳은 비극이었다. 이 사건 이후 서민 아파트 건립은 주춤했고 비싸지만 안전한 중산층 아파트가 전성기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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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으로 보는 ‘그때’]1970년 4월8일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한겨레

[길을 찾아서] 와우아파트 붕괴 계기 지역주민운동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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